침묵으로 어루만지는 조각
김성호(미술평론가)
정현도의 조각에는 의미심장한 메시지, 스펙터클한 장치와 화려한 장식이 부재한다.그의 조각에는 긴 침묵의 단아함이 있을 따름이다. 우리는 그곳에서 모종의 '침묵의 메시지'를 발견한다. 그는 조각을 통해서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침묵의 시선과 '말하지 않은 것'
그의 작품〈묵시(默視)〉시리즈는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관객에게 '무언의 바라봄'을 요청한다. 그의 작품 보기(seeing)에서, 풍크툼(punctum)과 같은 강렬한 지각적 체험은, 조각의 표면 밑으로 깊숙이 잠입한 작가의 침묵의 언어 탓에, 관객들 앞에 쉽사리 떠오르지 않는다. 그의 조각에 자리한 침묵의 언어는 낮은 목소리로 웅얼거리는 명상의 언어이거나 침묵의 틈새에서 잔잔하게 울려나오는 한두 마디의 화두와 같은 언어들이라서 곱씹어 보아야만 찾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그의 조형적 말하기(speaking)는 보이기(showing)란 조형적 선명함 속에 얹혀 흐르는 '잔잔한 물'과 같은 무엇이다. 조각의 표면 위로 흐르는 그것은 기승전결의 내러티브이기 보다는 하나의 시어(詩語)와 같은 잔잔한 심상(心想)을 전하고, 하나의 경구(警句)와 같은 진한 공명(共鳴)을 전한다.
우리는 그의〈묵시(默視)〉라는 제목의 일련의 작품들에서, 브론즈의 매끈한 표면과 잔잔한 요철을 지닌 내면이, 종이가 접혀진 것과 같은 굴곡을 지니면서, 서로 만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마치 보자기나 봉투처럼 혹은 새의 날개처럼, 또는 송편이나 만두의 피(皮)처럼 양 끝단이 만나 안의 내용물을 살짝 끌어안은 모양새이다.주지할 것은 표면이 내면을 끌어안거나 내면이 표면을 살짝 밀어올린 것 같은 형상의 작품이 피상적으로는 매끈한 표면과 요철의 내면을 지니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것이 브론즈라는 동질성의 것이라는 사실이다. 즉 '동질이형(同質異形)'의 상태로 우리에게 자신의 모습을 선보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껍질이 내용물을 담고 있는 것으로 선보이는 일종의 환영은 브론즈 재질의 변주로 인해 기인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정현도는 견고한 조각체를 연성의 무엇으로 바꾸면서, 동질이형의 몸체로 변주시킨다. 그것은 동질의 재료가 마치 껍질처럼 얇은 무엇으로 변환되어, 전혀 다른 재질의 상태로 맞물리는 이접(移接)의 상태로 나타난다. 이러한 변주의 흐름과 환영의 일렁임을 하나의 스틸컷 이미지처럼 정지시키는 것은 단연 조각체와 조각대 사이에 가늘게 놓인 만남의 장치이다. 그것은 간단히 스틸봉으로 장치되거나, 브론즈의 조각체가 조각대 사이에서 지지대의 형상으로 가늘어진 것이기도 하다. 극소(極小)의 접촉지대, 그것은 정현도의 조각을 모뉴먼트의 한 양상으로 정초시키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각의 이상적인 모델을 제시한다. 가느다란 지지대가 조각의 몸체를 떠받들면서 조각체의 표면 위에 잔잔히 흐르는 '침묵의 언어들'을 정지시키는 효과를 유발함과 동시에 작품과 관자와의 사이에서 또 다른 순환의 움직임을 작동하게 만드는 것이다.이처럼 그의 작품에서 발현되는 '침묵의 언어'는 관객의 '침묵의 시선'과 교차하면서 아무도 '말하지 않은 것', 혹은 '말하지 않고 남겨둔 것'에 대한 이야기를 조용하게 시작한다.
默視_(40x15x90cm)_동_2011
默視_(45x15x55cm)_동_2011
'어루만지는 심흔'과 기억
그의 석조 작품인〈심흔(心痕)〉시리즈에서도 이와 같은 '동질이형'의 침묵의 언어는 흐른다. 브론즈로 된〈묵시(默視)〉시리즈에서 보았던 내면과 표면이〈심흔(心痕)〉시리즈에서는 하나의 표면 위에 모두 올라선 것이 다른 점이지만, 동질이형의 속성은 동일하게 자리한다.
대리석의 매끈한 표면과 요철면의 대립은 조형언어가 지닌 기초적 면모를 부각시키면서 등장하게 된 하나의 메타포이다. 달리 말해, 점-선-면으로 확장하는 공간에 대한 정제된 사유이자, 메스와 볼륨을 응축시킨 하나의 조각체 안에서 도모하는 메타포이다. 그것은 대주우주의 혼돈과 소우주의 질서가 하나의 자리에 내려앉은 것이자, 온갖 미학의 정제된 메타포이다.
여기에 정현도는 자신의 심상을 조각체에 얹어 조형적 메타포를 심적 메타포로 전환시켜낸다. 예를 들어 대리석의 매끈한 표면은 공간을 점유하는 대외적인 조각의 외양이지만, 요철의 표면은 공간 속에 자리한 대내적인 조각의 마음이다. 그것은 시간 속에서 상처를 혹은 그리움을 혹은 소중한 기억을 남긴 인간의 마음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심흔(心痕)〉은 이처럼 상흔(傷痕)과 희락(喜樂)을 오고가며 긍정과 부정의 기억들을 시간 속에 함께 새겨 넣는다. 그런 면에서 요철의 표면들은 그에게 있어 가히 '심(心)적 메타포'라 할 것이다.
요철의 표면은 점점이 모여 하나의 잔잔한 네거티브의 표면을 만들고 다시 서서히 흩어져 매끈한 포지티브의 표면 속으로 산란되어간다. 유입과 유출, 응축과 확산의 대립을 하나의 표면 안에 끌어안는 것은 음양의 조화이다. 그것은 작품의 곳곳에서 읽힌다. 앞서의 응축과 확산을 서서히 이끌어간 조형 언어도 그러하거니와, 조각체의 정면과 측면이 예각(銳角)으로 또는 유선형으로 만나면서, 결코 직각으로 대립하지 않게 한 세심한 배려, 유선형의 조형이 또 다른 조형을 마치 골과 마루처럼 만나 서로를 어루만지게 한 조형적 접근 등에서 우리는 이러한 작가의 음양 조화의 언어를 읽는다.
보라! 매끈함과 거칠음은 대리석의 속살 같은 빛깔 위에 또는 자연석의 어머니 품 같은 빛깔 위에 함께 자리한다. 아련한 유색의 표면 위에 올라선 이러한 대비적 속성은 그것을 음양의 조화처럼 배치시키는 작가의 조형적 접근을 통해서 서서히 산란과 응축을 전개시킨다. 빛의 투영에 의해서 요철의 공간 위에 드리워지는 가벼운 그림자들은 서서히 밝음의 공간으로 거꾸로 서서히 어둠의 공간 속으로 잠입한다. 그것은 마치 나무들의 그림자가 바닥에 일렁이는 숲 속을 거니는 산보자의 시선을 간접 체험하게 한다. 생각해보라! 서서히 숲의 짙은 어둠의 그늘을 들어설 때에도 나무사이로 밝음은 함께 유영해 들어온다. 이러한 애환과 희락이 공존하는 숲의 그늘처럼, 과거와 현재, 네거티브와 포지티브의 음양이 공생하는 그의 조각은 이제 빛의 힘을 빌려 치유와 안위 그리고 다독거림으로 스스로를 어루만진다.
心痕_(65x20x40cm)_자연석_2005
침묵의 '겹'과 '결'으로
나무로 된〈적(積)〉시리즈는 그의 작업의 또 다른 완결체이다. 이것은 이전의 작업들이 하나의 질료 위에서 구축하던 대립적 요소의 '음/양의 조화로의 변주'가 원초적인 상태라는 '또 다른 작업 방향'으로 구축된 것이라 할 것이다. 이것은 여전히 우리에게 조용하지만 보다 강력한 메타포를 전한다. 시공간의 흔적이 다른 나무 개체들이 이리저리 집적되면서 엇갈려 드러내는 나이테의 무늬들의 협주(協奏)는 그의 작품이 이러한 음양의 조화와 치유의 심성이 함께 어루만진 결과임을 보여준다.
나무 집적체들의 협주를 통한 하모니, 그것은 이 세계의 대립과 쟁투에 대한 화해를 소망하는 강력한 메타포로 작동한다. 나무 개별체 사이의 균열과 틈새를 최소화하기 위해 서로가 밀착된 그것은 튀어나오면 튀어나온 채로, 들어가면 들어간 채로, 서로의 몸을 힘주어 끌어안는다. 인간사회에 대한 강력한 사회적 메타포로 해석될 수 있는 이러한 조형 방식에서 그는 실상 미학적 합일을 구하려는 노력에만 집중한다. 그것은 틈과 균열의 네거티브를 결이라는 포지티브로 치환시켜 내는 노력이다. 즉 사물의 물성들이 제각기인 개체들의 만남이 만드는 어찌할 수 없는 균열과 틈들의 존재를 최소화시키면서 '겹(layer)'을 만들어내는 방식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골과 마루를 조각체에 남겨두되, 조화롭게 위치시키고, 그것으로부터 하나의 요철의 '결(grain)'을 만들어내는 방식이 그것이다. 그것은 존재론적 미학의 강력한 메타포로 작동한다. 그가 의도하지 않았을지라도 그의 침묵의 조각은 결국 인간사회에 대한 메타포로 확장하게 된다.
積-(76x17x43cm)_나무_2006
積_(70x25x160cm)_나무_2006
현란하고 설치 일색인 오늘날의 미술현장에서 조각의 본질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면서 존재론적 미학을 실천하는 그의 조각이 마땅히 조명되고 재해석되어야 할 이유가 바로 그것들이다.●
조각가 정현도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 및 동대학원 조소과를 졸업하였다. 서울, 부산, 전주, 교토, 오사카 등에서의 개인전 15회를 비롯하여 Total 야외 조각초대전, 87 · 2001 Art Fair, 중진조각가 17인전, 한국지성의 표상전, 중국, 장춘, 상하이 국제조각 심포지엄 외11회의 단체전에 참여하였다. 1982 중앙미술대전 장려상, 제1회 대한민국 미술대전 대상,제1회 우성 김종영 조각상 수상을 포함한 5회의 수상경력이 있으며 현재 전북대학교 예술대학에서 교수로 재직 중 이다.
출전/
김성호, “침묵으로 어루만지는 조각”, (정현도 작가론)『미술과비평』, 2014 여름호, pp.( ~ )
출처" 김달진 미술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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