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UE
몸의 공간, 눈의 공간(3)
두 건물의 이야기: 부여박물관과 공간사옥
1967년 8월 19일 동아일보에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기사가 났다.
< 부여박물관건축양식에 말썽>
“일본 『神社』와 같다”, “백제문화 고유의 것”
“이 박물관 설계는 건축가 김수근 씨가 맡았는데 김 씨는 부여박물관에 소장된 토기의 그림 무늬에서 이 같은 선을 발견, 설계에 원용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김 씨는 부여박물관의 건축양식이 일본의 신사를 닮은 것은 사실이나 그 건축양식은 실상 고유의 것이 아니라 백제에서 건너간 것이라고 주장, 본고장에서 꽃피지 못한 건축술이 백제의 목공들과 기왓장들의 손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개화된 것인데 이것이 다시 본고장에 역수입된 것뿐이라고 강조했다.”
부여박물관 왜색 논란
논쟁은 1967년 8월 24일 논단으로 이어진다.
< 신축부여박물관의 양식>
「식민지잔재」를 되씹는 강변과 횡포
김철준(서울문리대학 부교수)
“설계자는 백제토기무늬에서 일본신사양식과 유사한 선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러한 대담한 설계를 하였다고 하고 또 옛 백제양식의 건축이 일본에 건너갔던 것을 역수입한 것이라고 자부하고 있는 모양이나 이따위 횡포는 그냥의 무식에서 나오는 성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일본의 신사본전이나 조거(鳥居)를 연상케 하는 선을 가진 토기는 본 일이 없고 또 학계에 알려진 일도 없다. (중략) 일본신사양식은 남방계통이라는 것은 일본학자들이 스스로 인정하고 있고 삼국시대의 우리나라 건축에 그러한 남방계형식은 찾아볼 수 없다. 우리나라의 건축양식이 불교사원 건축을 중심으로 하여 일본에 수출되어 그곳 사원을 창건하고 궁궐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치었으나 일본신사 건축은 원시적인 형태를 지닌 남방계의 전통을 그대로 지녀왔던 것이다. (중략) 다시 말하면 삼국시대내지 통일기 신라시대에 우리나라를 통해 들어간 대육계(大陸系)건축방식이 일본신사 건축으로 하여 울타리 대신 회랑을 치게 한다든가 석등까지 놓고 신사건물의 배치 등에 영향을 주지 않은 것은 아니나 신사본전의 원형적인 결구의 형태는 그대로 변함없이 내려왔던 것이다. 신축 부여박물관은 일본에 영향을 준 백제양식을 다시 찾아온 것이 아니라 그들이 고수하여온 남방계의 특징이 나타나는 것만을 수입한 셈이다.”
논쟁의 쟁점은 부여박물관(현 부여군 문화재사업소)의 형태가 일본 신사(神社)와 닮았다는 것이다. 박물관 정문이 흡사 일본신사의 정문인 「도리이(鳥居)」를 그대로 가져온 것처럼 보인다면, 박물관 지붕 용마루의 모양새는 일본신사 지붕의 양쪽 끝 X자 형태의 지기(千木)와 중간의 가츠오카(堅魚木)와 너무나 흡사하다는 것이다. 이에 건축가는 백제의 건축이 일본으로 전파된 것이기에 비슷해 보일 수밖에 없다고 항변하고, 백제 전문가들은 일본신사는 일본 고유의 건축 양식이기에 부여박물관은 일본 건축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일본의 건축물을 닮았다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일까? 여기서 당시 시대적 상황을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경제개발 명목으로 일본과 국교정상화를 추진했고, 국민적 반대에도 불구하고 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을 체결했다. 이로 인해 전국에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는 등 반일감정이 극도로 치닫는 시절이었다. 특히 문화적 영역에서도 일제에 의해 강요된 근대화를 극복하고 우리만의 근대화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상황에서, 우리 고유의 백제 문화를 보존하는 부여박물관이 일본의 건축, 그것도 신사를 닮았다는 것을 충격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역사 및 문화계 인사들의 공방이 오가던 지면에, 드디어 1967년 9월 2일 논단을 통해 건축가 김중업이 등장한다.
<망거(妄擧) 부여박물관설계도를 보고>
순수한 일본식풍조, 역수입운운은 폭언
김중업(건축가)
“건축가란 가장 양식(良識)을 지닌 지성인이어야 하며 시대를 앞지르는 혁명가이어야 한다. (중략) 우리들이 놓여있는 현시점의 건축가란 과거를 안이하게 계승하려는 입장에 놓여질 수 없고 미래 특히 21세기를 준비하는 참다운 지도자이어야 한다. (중략) 그리하여 건축가의 좌표란 미래를 똑바로 금긋기 위하여 유산의 참다운 내 체험이 선행되어야 하고 이의 정확한 관조를 통한 새로운 비전이 그려져야 한다. (중략) 작년 봄에 종합박물관을 경복궁경내에 건립한다고 현상모집을 한일이 생생히 기억난다. 한국의 몇 개의 아름다운 고전건축물들을 배로 확대하여 콘크리트모작하고 이들을 한데 묶어 종합박물관임네하고 기능이 완전 무시되었을 뿐만이 아니라 고전에 대한 최대의 모독을 한 사건이 있어... 이의 천만부당함을 비판했고, (중략) 그러한데 근자 동아일보 지상에 부여박물관에 관한 기사와 사진을 보고 아연실색했다. 무어라 형언키 곤란한 북받치는 불쾌감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종합박물관의 유가 아니다. 「도리이」가 백제에서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무식에서, 이의 역수입이라는 있을 수도 없는 폭언에서, 토기의 무늬에서 건축의 선을 딸 수 있다는 데에는 무어라 형언하리요. (중략) 비건축가에게도 뚜렷이 일본식임이 짐작 가듯 일본식인 건축임에 틀림이 없었다. 정문은 순수한 「도리이」의 형상을 본 딴 것이며(「도리이」란 본시 남방종교에서 북상하여 일본에 전래되었으므로 한국에는 존재한 일이 없음) 본관은 신사의 신전을 데포르메한 것에 불과하다. 그의 동남창은 더욱이 <무자창(武者窓)>의 전용이며 측면 모습에 있어서는 숨김없는 일본식을 순수히 풍기고 있다. (중략) 사람이란 실수할 수도 있고 다급하며 무식한 이야기를 할 수도 있을는지는 모르나 건축물이란 엄연히 남아 후대에까지 욕을 먹을 수밖에 없는 일이니 깨끗하게 자신의 입장을 밝혀 일시의 실수라고 결말을 짓는 것이 가장 건축가다운 행동이라고 믿는다. 더욱이 앞날이 있는 건축가라면 말이다.”
김중업은 건축적 관점에서도 부여박물관을 일본식 건축이라고 단정 지어 버린다. 하지만 김중업은 당시 반일 분위기에서 ‘왜색 건축가’라는 딱지가 얼마나 치명적인지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선배 건축가로서 후배 건축가에게 실수를 인정하고 미래를 도모하라는 진심 어린 ‘해결책’을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김중업이 글의 앞부분에서 종합박물관(현 민속박물관) 공모전의 예를 들며 형태적인 모사 자체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는 부분이다. 특히 건축가는 우리 전통 ‘유산의 참다운 내체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기술을 활용한 창조적 작업을 해야 한다고 강변하고 있는데, 김중업은 부여박물관에서 김수근의 ‘(우리 전통) 유산의 참다운 내체험’도 느낄 수 없으며, 단지 일본 건축의 모작으로만 보인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적인 건축가, 김수근?
이에 드디어 부여박물관 설계자인 건축가 김수근이 1967년 9월 5일에 항변한다.
< 「神社」 模倣아닌 「내것」 부여박물관설계자 김수근 씨의 辯>
“동아일보 8월 19일자 사회면 톱에 “김 씨(필자를 지적) 토기의 무늬에서 선을 발견하고 일본의 신사건축양식은 백제의 것이 일본에서 개화되고 그것이 역수입된 것뿐이라고 강조했다”고 나와 있는데 그 글은 분명히 그 기자의 글이지 본인의 말이 아니다. 한국건축계의 말석을 더럽히고 있을망정 그래도 오랜 세월 그 길을 전공한 건축학도가 그렇게 무식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나는 그 기자의 악의를 노엽게 생각하기에 앞서 그 분의 양심의 소재와 우리말의 이해력을 묻고 싶을 정도다. (중략) 신문에 실린 박물관대문과 층계손잡이를 맞춰 찍은 사진은 일본의 「도리이」(鳥居)와 비슷할 정도가 아니라 나 자신 깜짝 놀랄 정도였다. 사실 사진기술은 마력을 발휘할 수 있다. 조작이나 사각에 따라 장난감 자동차 위에 코끼리도 올려놓을 수 있고 코끼리를 큰 기둥처럼 찍을 수도 있다. 나중에 누가 얘기해주었지만 우리의 밥상도 옆으로 찍으면 틀림없이 「도리이」(鳥居) 그대로 보인다고 했다. (중략) 몇 분은 내가 일본의 「도리이」(鳥居)나 신사당(神祠堂)의 지기(千木)의 본향(本鄕)조차 모르는 무식꾼인 것처럼 몰아대고 김중업 선배는 부여박물관이 신사의 데포르메이고 프로포숀이나 평태가 매우 그로테스크하다고 한다. 그것이 특히 부여박물관이라는 것을 비난하고 있지만 내가 명확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설계는 백제의 양식도 일본의 신사양식도 아닌 현대건축을 전공으로 하는 김수근의 양식이라는 것이다.“
김수근은 억울했다. 그는 “토기의 무늬에서 선을 발견하고 일본의 신사건축양식은 백제의 것이 일본에서 개화되고 그것이 역수입된 것뿐이라고 강조했다“는 말은 자신의 말이 아니라 기자의 글이라 주장한다. 그리고 자신의 건물이 신사의 ‘도리이’처럼 보이는 것은 사진의 ‘조작’이라고 항변한다. 그러면서 부여박물관은 ”백제의 양식도 일본의 신사양식도 아닌 현대건축을 전공으로 하는 김수근의 양식“이라고 강변한다. 어디서 베껴온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만의 창작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자 취재 기자가 1967년 9월 7일 김수근의 주장을 반박하는 ‘취재 경위’를 올린다.
< 金씨의 辯>처럼 惡意있을리 없다... 하지도 않은 말 記事化될 수 없어... 취재 경위(고수균 동아일보 사회부기자)
“...생전 처음 만난 사람에 대해 악의를 가질 리 없다. 악의를 설령 가졌다 해도 몇 시간 뒷면 인쇄되어 나올 기사에 하지도 않은 말을 적어놓을 수는 없는 것이다. 또 하지도 않은 말이 신문에 났을 경우 보름 동안이나 아무 말도 않고 잠잠하게 있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특히 지식인이라 자처하는 사람들에 있어서는.”
이어 김수근의 답변을 반박하는 김중업의 글이 다시 1967년 9월 12일에 올라온다.
< 부여박물관의 조형문제>
김중업(건축가)
“건축가는 자기를 자기 건축에 표현한다. 그것은 그저 막연히 「전통의 내재미와 외적인 형식미」의 추구가 아니라 자기의 발견이고 더 큰 의미의 자기 즉 전통이 소화되며 그것을 통하여 하나의 「조형」이 탄생된다. 그렇기 때문에 부여박물관은 창작이 아니라 일본의 모방에 나온 습작이란 것을 알려주고 싶다. (중략) 부여박물관은 일본건축(특히 일본전통건축의 현대화에 앞장선 丹下(단게)씨의 작품)과 같은 처리방법 즉 선과 선이, 또 면과 관통교호(貫通交互)되는 디테일로 취급되어있어 지독히 강렬한 일본냄새를 풍기고 있으며 이 냄새 자체가 「김수근 자신의 것」이라면 그저 「작가 자신의 개성이 지독히 일본적이다」라고 말하는 수밖에 없다. 지붕에 달린 무자창이나 용마루의 곡선이 일본의 「가고」(駕籠=가마의 일종)에서나 일본의 상다리에서 볼 수밖에 없는 곡선일 때 이미 개성이며 창작이란 언어보다는 차라리 모방이라 해야 할 것이다. (중략) 평면처리부터 작가의 일본적인 의도를 알 수 있다. 일본건축은 내부공간처리에서 오는 분위기감보다는 디테일의 장식성추구에서 오는 입체감이 발달되어 있어 공간 자체의 변화성은 무질서하거나 단조롭다. 따라서 시각처리가 일연(一連)적이 아닌데 그 특징이 있어 공간 자체는 무미 단조롭고 각 벽면요소들은 재치만이 강조되어왔다. (중략) 비례는 그 취급에 있어 일관성이 없으며 필요 이상의 낮은 천정고를 강조하여 대문에서부터 본 건물까지 서프레싱(억압감)시키므로 조형을 마치 기어 다녀야 할 정도로 인간을 억압시키고 있으며 그 서프레싱의 변화가 일률적으로 취급되어 불쾌감을 피할 수 없다. 더구나 한국이 일본조형 밑을 기어서는 안 될 것이다.”
김중업은 9월 2일자 글의 “(우리 전통) 유산의 참다운 내체험”에 이어 “건축가는 자기를 자기 건축에 표현한다. 그것은 그저 막연히 「전통의 내재미와 외적인 형식미」의 추구가 아니라, 자기의 발견이고 더 큰 의미의 자기 즉 전통이 소화되며 그것을 통하여 하나의 「조형」이 탄생된다.”라고 말하며, 건축적 창작에서 온몸으로 체화된 경험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즉 김수근이 부여박물관에 담겨있다고 주장하는 ‘전통의 내재미와 외적인 형식미’는 단지 피상적인 주장일 뿐 체화된 표현일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면 김중업이 보기에 김수근은 한국에서 태어난 한국의 건축가이기에, 부여박물관과 같은 너무나 명백한 일본식 건축을 설계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일본 건축물을 어디에선가 보고 베낀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9월 5일 자 글에서 김수근이 부여박물관이 ”백제의 양식도 일본의 신사양식도 아닌 현대건축을 전공으로 하는 김수근의 양식“이라는 답변은 김중업에게 충격이었다. 왜냐면 김수근의 주장은 마치 ‘나는 일본 건축가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말이기 때문이었고, 김중업은 ”부여박물관은 일본건축(특히 일본전통건축의 현대화에 앞장선 丹下씨의 작품)과 같은 처리방법 즉 선과 선이, 또 면과 관통교호(貫通交互)되는 디테일로 취급되어있어 지독히 강렬한 일본 냄새를 풍기고 있으며 이 냄새 자체가 「김수근 자신의 것」이라면 그저 「작가 자신의 개성이 지독히 일본적이다」라고 말하는 수밖에 없다“고 하며 크게 실망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김수근은 김중업의 글에 등장하는 丹下(단게 겐조(丹下健三), 1913-2005)를 도쿄대학원 대학원에서 ‘스승’으로 모셨다. 1951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건축공학과를 중퇴한 김수근은, 1954년 일본으로 건너나 동경예술대학(東京藝術大学) 건축과에 입학하면서 내부 공간의 분위기를 중시하는 요시무라 준조(吉村順三, 1908-1997)의 영향을 받았고, 1958년 도쿄 대학교 대학원 입학하면서는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근대건축을 추구했던 단게 겐조((丹下健三, 1913-2005)의 영향을 받게 된다. 김중업이 일본 건축가 단게 겐조를 콕 집어 말하는 것은, 일본 전통 건축의 형태를 현대화하려 노력했던 단게 겐조의 영향이 김수근에게서 느껴졌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특히 단게 겐조의 카가와 현청사(1958)에서 수평과 수직부재가 교차하는 방식이나 구라시키 시청사(1960)의 말려 올라가는 형태의 캐노피는 김수근의 자유센터(1963)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당시 일본이 단게 겐조를 필두로 전통적인 건축 속에서 근대건축의 보편적인 시스템을 찾고 있었던 반면, 우리의 경우 전통적인 형상의 차용에 더 몰두했다는 점이다. 이는 김중업이 비판했던 종합박물관(현 민속박물관)처럼 전통 건축의 요소를 직접 빌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전통 갓이나 초가지붕의 형태를 표현한 건축가 이희태의 절두산 성당(1966)의 경우처럼 건축적 영역을 벗어나 한국적 형상을 찾게 되는데, 이러한 경향은 놀랍게도 최근 지어진 전주시청사(김기웅, 1981)나 독립기념관(김기웅, 1987)이 청기와 지붕, 예술의전당(김석철, 1993) 오페라하우스의 갓 형태의 지붕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한국적인 건축의 본질은?
그렇다면 김중업이 주장하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한국적 건축은 무엇일까? 논쟁의 쟁점이 '형태'인 와중에도 김중업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관심의 대상이 ‘공간’임을 간접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김중업은 부여박물관의 내부 공간을 비판하면서, "일본건축은 내부공간처리에서 오는 분위기감보다는 디테일의 장식성 추구에서 오는 입체감이 발달하여 있어 공간 자체의 변화성은 무질서하거나 단조롭다. 따라서 시각처리가 일연(一連)적이 아닌데 그 특징이 있어 공간 자체는 무미 단조롭고 각 벽면요소는 재치만이 강조되어왔다“고 말하고 있다. 즉 우리가 추구해야 할 건축은, 전통적인 건축 형태의 직접적인 차용이나 전통적인 형태의 모사가 아니라, 벽면이 공간의 ‘분위기감’을 위해 존재하며 ‘시각처리가 일연(一連)적’인 연속적인 공간인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공간은 몇 년 후 부활한 김수근의 ‘공간사옥(1971, 1977)’에서 발견할 수 있다. 검은색 벽돌로 지어진 공간사옥은 어떠한 전통적인 형상도 읽어낼 수 없고, 거대한 담벼락 같은 외벽은 어떠한 내부 공간 구성도 읽어낼 수 없게 한다. 내부로 들어서면 반 층씩 연결된 내부 공간은 끊임없이 수축과 팽창을 반복하면서 알 수 없는 분위기로 충만하다.
그렇다면 공간사옥은 과연 한국적인 건축일까? 건축이론가 정인하는 <김수근 건축론(1996)>에서 창덕궁 연경당 평면과의 유사성과 부석사로 오르는 공간적 시퀀스의 현대적 해석을 바탕으로 공간사옥을 한국적 건축이라 주장한다. 반면 건축이론가 배형민은 <감각의 단면(2007)>에서 “한국건축을 추리소설처럼 읽는 정인하의 해석에는 공감할 수 없다. 정인하의 논리에는 김수근의 건축이 ‘한국적'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깔려있다”고 반박하며, “김수근의 건축이 한국적이냐 아니냐의 문제는 접어두도록 하자. 그보다는 그의 건축이 평면의 기하학보다 감각을 우선하는 건축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자.”고 주장한다. 이어 “서양의 전통에서 파사드는 사람과 같은 건물의 심정을 드러내 주는 얼굴이요, 건축의 내면을 향한 장이다. 이에 반해 김수근과 승효상의 벽은 일종의 담장이다. 시각을 통해 연상 작용을 불러일으키는 촉감을 통해 그 힘을 직접 느낄 수 있다. 벽은 풍경을 끌어들이는 담이요 삶의 무대이다.”라고 주장한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공간사옥이 한국적 건축을 ‘공간’에서 찾도록 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것이다.
당시 36세의 잘 나가는 젊은 건축가 김수근에게, 한쪽에서는 왜색 건축가라고 비난하고, 한쪽에서는 미성숙한 건축가라고 폄하하는 상황은 엄청난 충격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트라우마를 통해 다시금 자기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형태(눈의 공간)'를 극복한 '(몸의)공간'으로 재탄생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찌 보면 ‘부여박물관 왜색 논란’은 단지 김수근만의 트라우마가 아니라, 한국 건축계의 헤게모니가 형태에서 공간으로 넘어가게 하는 건축계 전반의 트라우마였다고 할 수 있다. 종종 우리는 직설적인 전통건축의 차용이나, 형태적인 모사에 알레르기 적으로 반응하곤 한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 전주시청사나 독립기념관, 그리고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 같은 건물이 아직도 계속 지어지고 있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과연 한국적 건축의 본질은 공간에 있기는 한 것일까? 형태적 차용이나 모사는 옳지 않은 것일까? 1996년 <김수근 건축론>이 ‘평면’과 ‘공간’에서 본질을 찾았다면, 2007년 <감각의 단면>은 ‘연상’과 ‘촉감’과 같은 ‘감각’에서 찾고 있다. 1996년에 ‘평면’과 ‘공간’과 같은 추상적인 개념에서 건축을 논하고 있다면, 2007년에는 주체적인 감각의 문제로 논하고 있는 것이다. 공간사옥이 김수근의 ‘눈’에서 ‘몸’으로의 변화이듯, 이제 우리는 건축을 ‘몸’으로 논해야 할 때이다. 다시금 한국적 건축이 무엇인지 물어보자.
출처: 국립현대미술관 http://artmu.mmca.go.kr/issue/view.jsp?issueNo=87&articleNo=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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