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UE
폐허/유적(Ruins)에 관한 두 관점,
그리고 ‘한국적 건축’에 대한 의문들...
“피라미드가 지어지던 순간으로 가보자. 건설현장의 먼지 속에서 피라미드를 쌓아올리는 공사 소음이 들린다. 이제 우리는 그 모습을 완전히 드러낸 피라미드를 본다. 그 주위에는 침묵의 느낌이 감돌며, 그 속에서 인간의 표현하려는 염원이 느껴진다. 이 염원은 피라미드의 첫 돌이 놓이기 전부터 존재했다. 나는 건물이 지어질 때는 아직 유용성의 속박에서 자유롭고, 그 존재를 향한 정신은 마냥 드높다고 생각한다. 건물이 완성되어 사람들이 사용할 때 건물은 자신의 건설과정에 담긴 모험담을 들려주려 하지만, 모두 유용성에만 관심을 가질 뿐, 그 이야기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이제 그 사용이 다 하고 건물이 폐허가 되면 시작할 때의 경이로움이 다시 나타난다. 잡초에 몸이 휘감겨도 기분이 좋으며, 다시 한 번 정신은 드높고 유용성으로부터 자유롭다.”
고대 유적에 숨어있는 건축적 영감
건축가 루이스 칸(Louis Kahn, 1901-1974)이 1968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침묵과 빛’ 강연에서 한 이야기이다. 루이스 칸은 고대 유적에서 건축의 근원을 본 것이다. 초기에 모더니즘적 건축 언어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루이스 칸은, 1950년대 초반 그리스, 이탈리아, 이집트를 답사하며 고대 유적에 크게 감동을 받았고, 이를 자신만의 건축의 시작점으로 삼았다. 루이스 칸은 자신의 건물을 둘러싼 외벽을 ‘폐허(ruins wrapped around buildings)’라고 부르곤 했는데, 소크 생물학연구소(Salk Institute for Biological Studies, 1959), 필립 엑서터 도서관(Phillips Exeter Academy Library, 1965). 킴벨 미술관(Kimbell Art Museum, 1966) 등 루이스 칸의 건물에서는 마치 수천 년 된 것 같은 폐허의 아우라가 느껴진다.
고대 건축에서 자신의 건축적 영감을 찾는 것은 루이스 칸만은 아니다. 근대건축의 선구자였던 르꼬르뷔제(1887-1965)는 갓 스무 살의 나이에 동구 유럽과 그리스 터키의 고대 고전 유적을 둘러보는 ‘동방기행’을 통해 자신만의 건축적 지향점을 찾았다. 이때 현장에서 그린 수많은 스케치와 사진들은 <새로운 건축을 향하여(Vers une architecture, 1923/Toward an Architecture, 1927)>에서 새로운 기술을 대변하는 비행기와 자동차 사진과 함께 절묘하게 편집되어, 새로운 시대에 맞는 기술 미학의 규범으로 제안되기도 했다. 이렇게 고대 고전 건축은 르네상스나 바로크 시기 건축의 입면과 평면 구성 요소로만 활용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근현대에 이르러서도 형태와 배치 그리고 동선(르꼬르뷔제의 ‘건축적 산책’) 등 새로운 영감의 원천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고대 고전 건축, 특히 그리스 로마 건축 순례는 서양 건축가들에게 단순히 관광이 아니라 건축의 근원을 찾아가는 오래된 전통이자 자신만의 건축을 찾아가는 필수적인 과정이다.
한국적 건축의 근원
그렇다면 우리의 건축은 어떠한가? 한국적 건축의 근원이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질문을 바꿔 우리의 전통하면 떠오른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아마도 조선백자나 고려청자, 다보탑이나 석가탑이라고 쉽게 말할 것 같다. 하지만 한국적 건축의 근원으로 무엇이 떠오르느냐고 물어보면, 대부분 고민한다. 그리고 잠시 후 경복궁이나 창덕궁 같은 궁궐을 언급하거나, 담양 소쇄원이나 안동 병산서원 같은 원림이나 서원을 언급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장소를 언급하면서도 머리에 명확하게 그려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왜 우리에게는 아크로폴리스나 파르테논 신전처럼 명확하게 머릿속에 그려지는 건물이 없을까?
그 실마리를 건축가 승효상의 글에 찾을 수 있다. “우리의 옛 건축은 주재료가 나무요 흙이었던 까닭에 폐허가 되면 그 건축은 거의 완벽히 사라지고 만다. 많은 파편이 지저분하게 남아 아직도 그 존재의 미망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서양의 폐허가 아니라, 건축의 숙명을 순순히 받아들여 맑은 수묵화처럼 존재를 비움으로써 완결하는 폐허다. 그게 바른 건축이요 그로써 진실이었다.” 승효상이 2011년 4월 30일 자 중앙일보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폐허>라는 제목으로 기고한 글이다. 루이스 칸의 말과 비교해보면 두 건축가의 폐허에 대한 극명한 관점의 차이를 엿볼 수 있다. “과거에 있었던 것은 항상 존재한다. 현재에 있는 것도 항상 존재한다. 미래에 있을 것도 항상 존재한다.(What was has always been. What is has always been. What will be has always been.)”는 루이스 칸의 말처럼, 루이스 칸에게 폐허는 모든 건축의 시작이자 이상향이다. 반면 승효상에 폐허는 건축의 끝이자 종착점이다. 모든 것이 비워진 우리의 폐허는 승효상에게 새로운 ‘비움’의 가능성을 제공한다.
여기서 두 건축가가 마주했던 폐허를 머릿속에 그려보자. 석조로 지어진 그리스 로마의 유적은 그 오랜 세월에도 불구하고 건물의 벽면과 기둥이 상당 부분 남아 있기에 충분히 원형을 머릿속에 그려볼 수 있다. 하지만 성주사지나 황룡사지와 같은 우리의 유적은 대부분 텅 빈 벌판이다. 목구조에 흙으로 채워진 우리의 건물은 긴 세월 동안 수많은 침략과 약탈로 인해 불타고 허물어져 고작해야 초석 정도만 남아 있다. 그 초석들을 바라보며 수백 년 전 수천 년 전 이곳에 서 있던 건물을 머릿속에 그려보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물론 과거에 연연하게 하는 서양의 폐허와 달리 새로운 미래를 가능하게 하는 우리 폐허의 ‘우수성’을 주장하는 승효상의 말은, 당시 강요되던 ‘한국적 건축’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건축을 하고 싶은 욕구가 반영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과거에 연연할 거리조차 없는 우리의 유적이 ‘한국적 건축’을 설정하는 데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프랑스 대사관과 공간사옥
우리는 종종 현대 건축물 중에 대표적인 한국적 건축으로 김중업의 프랑스 대사관과 김수근의 옛 공간사옥을 꼽는다. 프랑스 대사관(1961)이 우리 전통의 ‘살아있는 선’을 표현했다면, 공간사옥(1971, 1977)은 우리의 전통 ‘공간’을 담았다고 한다. 하나는 우리의 형태라면 다른 것은 우리의 공간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의문이 든다. 아무나 함부로 갈 수 없는 대사관 건물의 ‘살아있는 선’은 도대체 누가 그렇게 경험했고, 건축 관련 일이 아니고서는 맘대로 들어갈 수 없는 회사 사옥의 ‘공간’은 또 누가 그렇게 경험했느냐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렇게 유명한 ‘살아있는 선’을 우리는 왜 최근 들어 더 논하지 않으며, 또한 전통의 현대적 해석이라며 만들어진 수많은 ‘마당’은 왜 정작 우리의 옛 마당처럼 작동하는 경우가 거의 없느냐는 것이다. 또한 전통 갓의 형태를 빌린 건축가 이희태의 절두산 순교 성지(1961)나 건축가 김석철의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1993), 한옥의 기와지붕을 빌린 전주시청사(1981)나 독립기념관(1987)처럼, 우리 전통 건축의 형태나 소품의 형상을 빌린 건축물들은 왜 건축계 내부에서는 종종 수준이 떨어지는 것으로 조롱을 받지만, ‘달항아리’의 형상을 참고한 이번 밀라노 엑스포 한국관처럼, 우리 주변에 전통적인 형상을 따온 건축물들이 계속 지어지고 있느냐는 것이다. 의문에 의문이 꼬리를 문다.
서양의 유적과 달리 초석만 남아 있는 우리의 유적을 바라보며 원형을 그려보는 것은 엄청난 상상력을 요구한다. 심지어 우리의 유적은 자연의 일부로 보이기마저 한다. 한국적 건축을 최근 더 논하지 않거나, 새롭게 논하지 않는 것은, 그 논의의 대상을 머릿속에 그려볼 수 없기 때문 아닐까? 구체적인 대상이 없는 이론은 추상적이고 피상적인 것으로 치부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서양 건축의 원전으로 여겨지는 파르테논 신전의 경우, 눈앞에 보이는 유적에서 형태적인 요소를 쉽게 인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형태를 통해 추상적인 체계를 이차적으로 읽어내는 것도 그렇게 어렵지 않다. ‘동방기행’ 중 아크로폴리스에서 지낸 3주 동안 매일매일 파르테논 신전을 찾았던 르꼬르뷔제는, 이때의 압도적인 감동이 자신의 건축에 “결정적인 빛. 결정적인 볼륨: 아크로폴리스(Decisive light. Decisive volume: the Acropolis.)”을 제공했다고 말년에 회고한다. 서양의 건축가에게 아크로폴리스는 실증적으로 근원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한국적인 것을 떠올리려면, 평상시 익숙한 건물의 형태나 물체의 형상이 그 자리를 차지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 서양의 유적지에 남아있는 신전이나 건물들은 직접 내부로 들어가 온몸으로 공간을 체험해보는 것이 가능하지만, 고작 초석만 남아 있는 우리의 유적지에서 그런 건축적 내부 공간을 상상하는 것은 물론이요 경험해보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다. 종종 폐사지(廢寺址)에 석탑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이곳에 있던 공간의 일부라기보다는 하나의 완결된 조형물로 다가온다. 특히 어스름한 저녁에 처연하게 홀로 서 있는 석탑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더 이상 인공적인 구축물이 아니라 항상 이곳에 있던 자연의 일부로 느껴지기 시작한다.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
승효상은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 2012>에서 성주사지의 폐허에서 느낀 감동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모든 건축은 사라졌다. 그럼에도 유장한 산의 능선에 둘러싸인 이 폐사의 풍경은 대단히 아름다웠는데, 그 까닭이 자연풍광이나 남은 잔해가 주는 시각적 미학이 아니었다. 바로 스산하기 짝이 없는 그 장소에서 원형의 환상과 폐허의 실체가 교차하면서 나타나며 깨달은 건축의 본질이요 숙명이었다. (중략) 부족한 나의 공간지각 능력은 여기에서 드디어 한계를 맞고 말았다. 한 번으로 완성된 것도 아니었으며 여러 차례의 중창과 불사를 거쳤을 이 사찰의 공간구조를 남아 있는 불과 몇 조각의 파편으로는 도무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황망해 가쁜 숨을 몰아쉰 후, 그 역사가 생명을 다하여 땅으로 스며 이루어진 현실의 폐허를 보았을 때, 비로소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자부한 그 공간지각 능력은 부질없는 집착이었다. 성주사지에 보이는 것은 침묵의 세계였으며 아마도 그게 이 절을 세운 목적이었다. 이 폐허는 쓸모없게 된 사찰이 아니었다. 여전히 우리 삶의 부질없음을 끊임없이 가르치는 ‘보이지 않는 절’이었던 것이다.” 건축 거장조차 상상해내지 못한 ‘근원’을 우리가 어떻게 상상해낼 수 있겠는가.
하지만 우리에게도 건축적 근원으로 여겨질 만한 오래된 건물들이 주변에 많이 있다. 비록 여러 번 중건되기는 했지만, 신라시대부터 불도를 닦는 도량으로 존재해왔던 부석사, 조선시대부터 수도의 한복판의 길잡이 역할을 했던 경복궁이나 숭례문... 하지만 이들은 왜 우리의 ‘파르테논’이 되지 못했을까? 우리는 왜 이들을 우리의 건축적 근원으로 삼지 않았을까? 오랫동안 정치와 권력의 상징이었던 경복궁, 종교와 사상의 중심이었던 부석사는, 충분히 서양 문명에서 파르테논이 수행했던 정치적 사상적 그리고 상징적 역할을 우리의 역사에서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지 못했다. 왜 그럴까? 서양은 왜 그렇게 근원에 집착했고, 우리는 그렇지 않았을까?
과거의 근원부터 미래의 이상향까지
그리스 헬레니즘(Hellenism)과 유대교 헤브라이즘(Hebraism), 그리고 기독교의 선형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서양 철학은 항상 근원의 탐구에 천착했다. 끊임없이 근원을 갈구하는 이들에게, 외세의 침략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진 유대교의 신전과 달리, 역사의 풍파를 견뎌낸 그리스의 신전은 자연스럽게 건축적 근원으로 각인될 수밖에 없었다. 반면 오랫동안 우리 문화의 사상적 배경이었던 불교와 유교는 근원에 집착하지 않았다.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바탕으로 현실 세계에 이상세계를 건설하려 했던 유교나, 순환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해탈을 통해 부처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는 불교는 과거의 근원보다는 미래의 이상향을 지향했다. 유교에게 건물은 기능적이며 실용적인 존재였다면, 불교에게 건물은 극복해야 할 물욕의 대상 중 하나였다. 특정한 건물에 연연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 결합한 기독교적인 서양 철학이 고대 이교도의 신전을 물리적인 근원으로 삼을 이유 역시 없었다. 문제는 우리 미천한 인간은 무엇인가 눈에 보이는 ‘근원’을 설정해야지만 그에 상응하는 추상적 관념이나 사상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금 의문이 든다. 유교 사상을 바탕으로 한 조선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경복궁과 숭례문은 충분히 파르테논의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비록 현재 우리가 대한민국에 살고 있지만, 조선시대 위인들이 모든 화폐를 차지하고 있고, 아직도 조선시대의 국가관과 도덕관이 유효한 상황에서 경복궁과 숭례문은 건축적 근원으로 받아들여졌어야 하는 것 아닐까? 또한, 더 이상 국교는 아니지만 신라시대부터 존재해 왔던 부석사 역시 그 역사와 존재감으로 인해 건축적 근원의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사실 경복궁이나 숭례문은 사람이 사는 공간이 아니라 형상적인 이미지로 더 다가온다. 우리의 몸으로 점유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 그림 속의 이미지처럼 느껴진다. 그렇다고 우리가 사는 일상의 공간이었던 한옥이 특별한 형상이나 형태로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도 아니다. 이는 아마도 우리의 전통 가옥이 서양에서 '건물의 얼굴'이라 칭해지는 파사드(입면)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전통 가옥의 입면이라고 해봐야 목구조 사이를 메우는 지극히 부가적인 창호나 흙벽밖에 없다. 서양의 건축처럼 입면이 구성된 후 건물이 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건물의 영역과 방향 그리고 방의 개수를 설정하고 구조를 올리고, 방의 기능에 따라 벽이 채워지기 때문이다. 또한, 한옥은 시대별로 건축 공법의 변화와 발전에도 불구하고, '입면'의 부재로 인해 특별히 시각적으로 그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모든 한옥이 비슷한 형태로 인지되기 때문에 어느 한 건물이 특별한 이미지로 그려지지 않는다. 서양의 파르테논이 신전 중의 신전이라는 하나의 고유명사로 받아들여진다면, 우리의 경복궁과 숭례문 그리고 수많은 고궁과 사찰은 한옥이라는 일반명사로 수렴되는 것이다. 어찌 보면 그렇게 수렴된 하나의 이미지로 ‘처마의 선’이 떠오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모든 건물이 똑같이 생긴 것으로 여겨지는 상황에서, 우리 건축의 본질이 형태가 아닌 공간에 있다고 주장하기는 참 쉬울 것이다. 하지만 그런 주장이 과연 우리 건축 본연의 탐구에 기인한 것인지, 아니면 서양의 건축에 만연한 공간론적인 헤게모니의 영향인지는 고민해봐야 한다. 종종 부석사로 올라가는 공간적 시퀀스를 한국적 공간의 핵심적인 특징이라 주장하곤 하는데, 솔직히 이는 르꼬르뷔제가 아크로폴리스로 올라가는 경험을 바탕으로 제안했던 ‘건축적 산책’과 너무나 비슷하게 들린다. 또한, 최근 ‘마당’이 한국적 공간의 대표적인 사례로 등장하며 현대 건축에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되고 있지만, 정작 마당의 역할을 제대로 하는 경우를 찾아보기 힘들다. 특정한 기능으로 규정되지 않고 다양한 행위가 가능한 '잠재태'로서의 마당은 아주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이는 이미 1950년대 탈근대를 추구했던 수많은 건축가가 공유했던 개념이다. 솔직히 최근의 ‘마당’이 서양의 ‘중정’과 무슨 차이가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일본과 중국의 건축적 근원
한 가지 궁금한 것은 때로는 우호적인, 때로는 적대적인, 오랫동안 애증의 관계를 유지했던 일본과 중국에서 건축적 근원이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오래전부터 조적조를 사용했던 중국이나 상대적으로 외세의 침략이 적었던 일본의 궁궐과 사찰은 비교적 온전한 상태로 남아 있다. 특히 1583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지은 오사카 성은 오사카 중심에 높이 자리 잡고, 그리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처럼, 도시뿐 아니라 일본을 대표하는 건축물로 여겨지고 있다. 또한, 도쿄의 메이지신궁(明治神宮)과 오이타의 우사신궁(宇佐神宮)과 함께 일본의 3대 신궁으로 불리는 일본 혼슈(本州) 미에현(三重縣)의 이세신궁(伊勢神宮)은 지금도 일본인의 일상생활 속에서 깊이 스며들어 있다. 만약 중국과 일본의 고대 건축물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건축적 근원의 역할을 하고 있다면, 건축적 근원 없이 방황하고 있는 우리의 상황은 안타까운 역사의 결과로 이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 몸으로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실증적인 공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작동하는 건축적 근원이 없다면, 이는 중국과 일본과 한국이 함께 공유하는 유사한 역사적 사상적 배경에 기인한다고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한 가지 변하지 않는 것은 우리에게는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는 폐허나 유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폐허가 우리에게 어떤 ‘한국적 건축’을 요구하는지 우리는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야만 한다.
과연 ‘공간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우리 건축의 핵심은 형태가 아니라 공간에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달항아리의 형태를 빌린 최근 밀라노 엑스포 한국관처럼, 공간론자들이 배격하고 조롱하는 형태적 차용은 왜 아직도 유행하고 있고, 또한 그런 건축이 왜 아무런 스스럼없이 일반인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는가? 종종 더 이상 한국적 건축이 없다는 자조적인 말을 듣곤 한다. 또한 우리 고유의 건축 담론이나 이론은 부재하고 무분별하게 수입한 외국의 이론만 만연했다는 비판도 듣는다. 하지만 한국적 건축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단지 우리가 그것을 보려 하지 않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시작은 공간적 헤게모니부터 벗어던지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금 한국적 건축이 무엇인지 물어보자.
출처: 국립현대미술관 http://artmu.mmca.go.kr/issue/view.jsp?issueNo=87&articleNo=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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