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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화- 아래로부터의 숭고/ 이선영

sosoart 2016. 6. 5. 23:27


박미화 / 아래로부터의 숭고

이선영

아래로부터의 숭고

 

이선영(미술평론가)

 

2016년에 담 갤러리에서 전시된 박미화의 작품들은 최근 몇 년 새 만들어진 것들이지만, 마치 오랜 세월의 더께를 둘러쓴 사물의 면모가 있다. 바닥과 벽, 계단 위, 창턱 등에 배열된 크고 작은 것들은 새로운 것만이 진리인 세상에서 ‘오래된 미래’같은 신선함으로 다가온다. 태양아래 새로운 것은 없는 세상에서 영원히 되돌아오는 것은 보편성이다. 박미화의 작품들은 그러한 보편성에 기댄다. 그러나 그것은 위로부터 말해지는 보편성이 아닌, 아래로부터 돋아나는 보편성이다. 여러 겹 가해진 시간의 흔적은 예술작품이라는 독특한 인공물에 우연과 자연을 포함시킨다. 지상의 작은 피조물들을 닮은 그것들은 어떤 논리와 전략, 노동과 솜씨의 결과물이 아니라, 오래 전에 익명의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져 거의 자연의 산물로 변해 버린 듯한 모습이다. 그것들은 지금 생겨난 그대로 또 다른 시간의 주기 속에서 자기 삶을 살아 갈 것이다. 



담갤러리 전시전경


윈도 갤러리 전시전경

그것들은 오래된 벽이나 바닥, 바위나 나무껍질만큼이나 단순하게 다가온다. 미학은 단순함을 ‘기교 없는 합목적성’(칸트)이라고 정의한다. 장-뤽 낭시는 [숭고에 대하여-경계의 미학, 미학의 경계]에서, 이 ‘기교 없는 합목적성’은 목적 없는 합목적성의 예술, 다시 말해 자신의 자유로운 목적지를 향하는 인간의 합목적성의 예술(양식)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재현의 굴종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제시의 자유, 자유의 제시, 그리고 뒤로 물러서거나 거리를 둔 제시로서의 봉헌을 위해 운명 지어져 있다. 이번 전시의 주제인 ‘헌화’는 단순성과 봉헌을 연결 짓는다. 봉헌도 그렇지만, 단순성은 재현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제시될 뿐이다. 장 뤽 낭시에 의하면, 그것은 다른 것을 형태화하는 대신, 대상을 갖지 않은 채 스스로를 위해 스스로의 형태를 갖추는 형태이다. 그것은 스스로를 이미지화하는 이미지, 다른 것의 형상이 아니라, 스스로의 형태를 구성하는 형태이다. 


[숭고에 대하여]는 상이성에 세계에 도래하는 단일성, 잡다한 지각 영역으로부터 돌연 일어나 상이한 것들을 하나로 묶는 단일성, 대상도 주체도(따라서 목적도) 지니지 않는 그저 단순한 단일성을 말한다. 봉헌은 그저 단순하게 그 모든 것이 우리 앞에 제공되도록 내버려 둘 뿐이다. 이 맥락에서 단순함은 미가 아닌 숭고와 연결된다. 아이가 빚은 송편처럼 소박한 형상이 종종 등장하는 박미화의 작품이 숭고하다면, 그것은 아래로부터의 숭고에 해당될 것이다. 그녀의 작품에는 알아볼 수 있는 형상들이 등장하지만, 신체 기관은 물론이고 얼굴 표정 또한 최소한의 표현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낳는다. 자연을 닮은 미니멀리즘인 셈이다. 초자연과 인공 그 중간쯤에 있을 법한 사물들의 이름과 의미는 불확실하다. 우연히 발굴된 유물같은 사물에는 막 생산된 것 특유의 날카로운 윤곽이나 뻔지르르한 표면은 발견되지 않는다. 다양한 재료가 사용된 입체와 평면 작품들은 대부분 변색되어 있고, 닳아있고, 더럽혀져 있으며, 손상되어 있다. 또는 그런 것처럼 보인다. 



어머니_잣나무, 목탄, 아크릴채색_154×42×30cm_2016



[어머니] 부분


 거기에서 알아볼 수 있는 이미지들과 느껴지는 분위기는 주체와 타자, 여성과 아이, 식물과 동물, 희생과 봉헌, 상념과 애도, 삶과 죽음 등이다. 한 공간에 놓여진 존재들 사이에는 심연과도 같은 불연속성이 있다. 흙과 나무, 합판과 종이, 목탄과 아크릴 등의 재료가 사용된 테라코타, 조각, 드로잉, 회화 등 여러 장르와 재료가 사용된 각각의 작품들을 가느다랗게 이어주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모성이다. 이 전시에서 우선 모성은 [어머니]라는 제목을 단 채 기념비적인 형상에서 발견된다. 손 없는 입상 옆에 목 없는 좌상이 놓여있다. 2015년의 갤러리 3에서의 전시작품인, 수많은 이름들 앞에 서있는 목과 팔이 없는 입상 [어머니]가 이번 전시에서 목 없는 피에타상과 장승형태로 변형된 듯하다. 그 밖의 작품에서도 모성은 편재한다. 모성은 보이지 않는 중심을 이루면서 전시장 여기저기에 띄엄띄엄 놓여 있는 존재들의 내적인 관계를 만든다. 그 모성은 그 기원을 가늠할 수도 없는 오래된 여성상에 가깝다. 인류 초창기의 모권제가 지나간 후, 여성은 오랫동안 남성적 속성을 가지는 소유권을 전달하는 재생산의 역할에 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생산력의 발전을 통해 겉보기의 진보를 낳았지만, 많은 인류를 피폐하게 만든 가부장적 문화가 저물고 있는 시점에 이 근원적인 여성이 호출된다. 여성도 남성도 아버지도 아닌, 모성 말이다. 여성보다 더 포괄적인 존재인 모성은 여성에 의해 더 자연스럽게 드러날 수 있다. 엘렌 식수는 ‘여성 속에는 늘 많거나 적거나 간에 약간의 어머니가 있다’고 말한다. 물론 어떤 부류의 남성들에게 여성되기가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또한 이 임무를 맡는 사람은 단순히 여성이어서만도 아니고, 여성(적) 작가여야 할 것이다. 가족의 재생산에 귀속되곤 하는 여성은 작업을 지속하기 어려운 점도 있지만, 어떤 경계를 넘어서면 더 자연스럽게 모성이라는 이상적 모델과 가까워질 수 있다. 한동안 은둔의 시기를 보내다가 생애 최초의 나홀로 여행 이후 40대 후반이 되어 다시 작업에 불이 붙은 작가가 무엇부터 시작할지 모를 때 처음 만지작거린 것이 한 덩어리의 흙이었다. 



피에타_조합토 산화소성 1220도_45×43×19cm_2015



[피에타] 부분


흙으로 형상화한 근원적 여성은 인간 뿐 아니라, 미소한 식물과 동물 등 지상의 모든 타자들을 포용한다. 오래된 나무나 흙같은 고풍스러운 재료로 만들어져 신비한 아우라를 간직하고 있는 그것들은 신까지는 아니어도 근대에 와서 더욱 협소해진 인간의 개념을 벗어나는 또 다른 주체이다. 작품 속 여성은 이 지상에서 벌어진 경악할 만한 사건들에 반응한다. 그런데 대부분 비극으로 다가오는 사건들에 대한 그녀의 반응은 다소간 실망스럽다. 다 시들어가는 풀과 볼품없는 작은 화분, 움직이지 못하는 다리와 상대를 향해 뻗을 수 없는 팔은 위로가 되기에는 미흡하다. 그것들에는 때로 새처럼 그 모든 것을 초월할 수 있는 날개도 돋아나 있지만 저 높은 곳을 훨훨 날기에는 너무 자그마하다. 하지만 그 날개는 무엇인가를 싸안아 줄 수는 있을 것이다. 여성은 초월적이지 않다. 그녀는 좋은 의미로든 아니든 지상에 얽매여 있다. 


작품 속 여성은 슬픔을 어루만져주기 보다는 슬픔을 배가한다. 거기에는 재현하기 힘든 슬픔이 있다. 미학자들이 말하듯, 아름다움은 재현될 수 있지만 숭고는 제시될 수 있을 뿐이니까. 날개달린 아이를 품고 있는 [피에타]의 목은 잘려져 있다. 그녀가 안고 있는 아이만큼이나 새까맣게 그을린 채로. 아이와 여성은 서로에게 속해있다. 이러한 부재와 공속은 어떤 슬픈 표정보다 도 더 슬픈 표현을 낳는다. 오랜 비바람에 이리저리 튼 나뭇결 깊숙이에서 부처의 표정이 언뜻 비치는 거대한 조상은 그 앞에 놓여 진 작은 사체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다. 작품 [어머니]는 그 크기에 비해 너무 무력해 보인다. 팔목이 절단된 채 차렷 자세로 굳어있는 입상은 죽은 것을 거두는 행동을 포함한 어떤 행동도 부질없어 보일만큼의 망연자실이 있다. 애도의 느낌이 가장 강력한 것은 전시장의 벽면에 붙은 이름들이다. 거기에는 ‘실존했던 사람들이지만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지난 100여 년간에 국내외에서 죽은 소박한 사람들의 이름들’이라고 한다. 한 칸 한 칸이 묘비인 셈이다. 




이름_나무에 조각_182×206cm_2015(부분)

 

비슷한 맥락에 있는 작품이 2015년에 전시 된 작품 [얼지마, 죽지마, 부활할 거야]인데, 그것은 층층이 창이 달린 배 모양의 판 위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침몰하는 배에서 죽어간 아이들이 맨 마지막 순간에 불렀던 이름은 누구였을까. 어머니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 남은 어머니는 저곳으로 떠나간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벽에 붙은 묘비들에는 무명의 영토 위에서 생멸한 익명의 존재들에 대한 사념들이 떠돈다. 그 위에 가해진 수많은 흔적들은 거기에 새겨진 이름들이 전부가 아님을 알려준다. 그 서판에 쓰여진 이름은 지워지고 또 다른 이름이 새겨지기를 반복할 것이다. 어찌 보면 비극의 본질은 단순하다. 체계화를 통해 촘촘히 연결된 망 속에서도 자기만의 이익과 소통불능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더욱 위험해진 현대사회에서 빈번히 겪는 때 이른 종말이 드러난다. 죽기에는 너무 어린 동물의 사체, 그리고 아이의 무덤가에 서있을 법한 새싹이 새겨져 있는 작은 묘비가 표현하고 있듯이 말이다. 


물론 박미화의 작품에는 슬픔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모성이라는 실로 포괄적인 실재를 제외한다면 어느 하나로의 환원은 그녀의 작품과 거리가 멀다. 작품 [이름]을 형상화하기 위해 피부를 연상시키는 엷은 나무판 위에 휘둘렀을 칼질을 떠올리면, 마치 씻김굿을 하는 듯한 카타르시스가 느껴진다. 양인지 강아지인지 불확실한 동물이 바닥에 죽은 채 누워있는 장면도 그 와중에 귀엽고 장난스러운 모습이 남아 있다. 마침 벽에 걸린 그림 속에서는 그 비슷한 동물이 부시시 깨어나고 있는 중이다. 조금 전에 본 비극적 장면이 마치 잠깐의 장난인 양 말이다. 양을 표현했는데 강아지처럼 보이는, 나름 ‘실패작’인 이 작품은 이상한 변형 때문에 희생양이라는 묵직한 주제를 피해간다. 그렇지만 어이없는 비극을 표현하기에 부족하지는 않다. 땅이 꺼져 버릴 듯한 슬픔을 그 반대의 방향으로 돌리는 것은 날개이다. 상복으로 보일수도 있는 하얀 의상의 여인은 선녀처럼 화사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윈도 갤러리에 놓인 작은 비석과 날개 달린 조상은 모든 사건이 다 지나가고 난 후, 더 이상 슬픔도 기쁨도 남아있지 않은 무덤덤한 평정심이 있다. 






‘헌화’ 전에는 애도와 추모가 있지만 무겁지만은 않다. 전래의 문화에서 간편한 제사를 위한 사당도(祠堂圖)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 [감모여재도](感慕如在圖)는 화병에서 폭발하듯 튀어나온 부스스한 꽃다발과 저 멀리 보이는 촛대가 장중한 추모의식을 대신한다. 이 전시에서 많이 사용된 매체인 목탄은 새까맣게 타버린 마음을 표현하기에 적절한 매체로 다가온다. 그러나 박미화의 작품에서 죽음은 끝이 아니다. 우리가 죽음을 잊는다면 그것은 진짜 끝이다. 그러나 예술이라는 방식을 통해 다시 불러들여진 죽음은 삶의 일부가 될 수 있다. 이와 관련된 가장 직접적인 도상은 식물이다. 낙엽이 져도 매해 어린잎을 다시 내는 식물은 부활하는 존재이다. 죽음은 단순히 삶에 대한 경고이기 보다는, 진지한 삶에 필요한 균형추이다. 죽음을 잊고 사는 삶은 가볍다. 삶과 죽음의 긴밀한 관계설정이라는 점에서, 예술은 이전 시대에 종교가 맡았던 역할을 세속적인 사회에서 수행한다. 


삶이 양이면 죽음은 음이다. 인류의 문화적 상상력에서 여성은 오랫동안 음에 속해왔다. 음 또한 양이 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음의 정당한 몫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여성이 단지 예술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가 될 때, 가부장적 상상력을 계승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자화상이 등장하는 여성의 작품은 더 이상 남성을 위한 빈 거울이 되어선 안 될 것이다. 많은 칼집이 나 있곤 하는 박미화의 작품에서 거울은 이미 금이 가 있다. 금간 거울에서 희미하게 등장하는 이는 누구인가. 이상하게도 작품 속 여성들은 작가를 닮았다. 작가는 그녀가 특정인물이나 모델이 아니라고 하지만, 남들은 그녀를 닮았다고 말 들 한다. 자기도 모른 채 나온 것이 자화상이다. 작품 속 인물은 실제 인물처럼 소박하다. 애매모호한 표정의 그들은 무엇인가를 적극적으로 전달하고 표현하는 것에 소극적이다. 슬픔이나 애도조차도 전시의 전반적인 분위기에서 나오는 것일 뿐이다. 





새_조합토 산화소성 1220도_47×25×19cm_2015(부분)









 가령 인물이 들고 있는 꽃을 보면 그렇다. ‘헌화’라고 하는데, 잡풀처럼 보이는 시든 식물 한 무더기를 누구한데 주려는지, 주기는 주려는 것인지 모호한 자세다. 시든 것들을 거둬들임으로서 헌화에 상응하는 행위를 할 뿐, 그 자체가 헌화인지는 불확실하다. 꽃병에 꽂혀있는 것이든 들고 있는 것이든, 시든 꽃은 죽어가고 있는 존재임에는 분명하다. 무덤가에 바쳐진 꽃이 누워있는 것과 비슷하다. 이 시든 꽃은 말린꽃과도 틀리다. 그것은 아름다움의 절정을 일순간에 고정하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는 과정을 제시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다소간의 체념이나 포기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생로병사의 순환주기 속에 포함되어 있는 모든 생명의 운명이다. 반면 지극히 현세적인 현대사회는 이러한 운명을 애써 잊으려고 한다. 그저 살아생전에 열심히 생산하고 쓰고 죽는 것이 목표일 따름이다. 그것이 ‘풍요의 사회’를 견인하는 원동력이다. 무대만 생각하지 무대 이면을 생각하지 않는 방식에서, 죽음은 결코 나의 일이 아닌 것이다. 


이러한 배제가 역설적으로 어처구니없는 죽음들을 양산하는 것은 아닌가. 한 작품 속 여성은 꽃들을 생각한다. 박미화의 작품 속 꽃들이 대부분 시들어 있음을 생각할 때, 그것들은 얼마 전에 우리 사회를 강타했던 그 사고로 피지 못한 채 죽은 꽃들이 떠오른다. 한동안 대한민국 전체를 침몰시켰던 그 사건에 대해 많은 이들이 애도했지만, 자식을 낳은 어머니들만큼 애통해 한 이들이 있을까. 특히 수년전부터 배를 작품 속에 등장시켜온 박미화에겐 남다르게 다가올 사건이었을 것이다. ‘헌화’ 전의 인물들은 꽃이나 화분을 안고 있기도 하다. 작품 [화분]에서 칼로 그어져 그려진 여성은 평화롭고 소박한 일상을 영위하는 여성상과는 거리가 있다. 테라코타로 만들어진 여성상은 입체작품이지만, 얼굴은 선으로 그어져 있다. 힘주지 않고 쓱쓱 지나간 선들은 볼 때 마다 달리 보이는 미묘한 표정을 남긴다. 마치 모래사장 위에 그린 동그란 얼굴처럼 지우고 다시 그릴 수 있는 빈 서판 같은 얼굴이다. 



감모여재도_종이에 목탄, 아크릴채색_106×78cm_2016


전적으로 새로운 시작이 아니라, 이전의 것이 흔적으로서 남아있는 박미화의 작품은 지금 막 새기고 있는 것 역시 하나의 흔적이 될 것임을 인식한다. 중요한 것은 흔적과 흔적의 관계들이 만들어내는 조화이다. 그것을 의고주의나 골동취미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전통은 물론 자연으로부터의 분리와 자율화를 꾀했던 문화가 낳은 비극들이 줄을 잇고 있는 현재 타자들과의 관계망을 다시 구축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작가는 작업을 통해서 사회를 다시 발견한다. ‘예술을 위한 예술’의 주장과 달리, 예술과 사회는 반대 항에 놓여있지 않다. 예술과 사회는 꽃과 뿌리의 관계다. 꽃이 피어야 열매(경제)도 맺는다. 작가는 홀로 작업하지만, 작품은 타자의 것이다. 시작은 박미화가 하지만 작품을 이끄는 주체는 타자(자연, 무의식, 몸, 신)들이다. 모성은 주체 내에 타자를 포함하는 대표적 존재이다. 또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모든 인간은 그녀와의 대화를 통해 타자의 영역에 있는 최초의 언어를 배운다. 


물론 여성과 타자는 단순한 하나가 아니라, 차이를 통해 연결되어 있다. 임신한 여성의 해부학적 구조 자체가 그러하다. 뤼스 이리가라이는 [차이의 문화를 위하여]에서 태반의 구조는 융합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존중하는 질서 잡힌 구조라고 본다. 여성의 몸은 병이나 거부반응, 생체조직의 죽음을 유발시키지 않고 자기 안에 생명이 자라도록 관용하는 특수성을 지닌다. 즉 모성은 자기 안에서 타자를 관용하는 모델이라는 것이다. 뤼스 이리가라이는 [사랑의 길]에서도, 그자체로 사유되지 않는 일종의 대타자인 어머니와의 태곳적 관계를 복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그것이 타자인한 재현되기 힘들다. 그것은 숭고처럼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주체가 중심이 되는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 독백이라면, 타자는 대화를 통해 점차적으로 확실해질 뿐이다. 박미화의 대화적 작품은 독백의 세계가 구축해 놓은 아성에 균열을 일으킨다. 


[헌화]



[헌화] 부분



[화분], 나무판에 목탄, 아크릴채색_61×41cm_2015(부분)


 뤼스 이리가라이는 근대의 합리주의 전통이 -에 대해 이야기하기에만 주로 관련되어 있을 뿐, -와 함께 이야기하기는 그저 어떤 같은 대상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기 정도로 치부해왔다고 본다. 타자들과 함께함은 독백의 문화에서는 낯선 것이다. 박미화의 작품에서 타자와의 대화는 미소한 사물이나 자연은 물론, 죽은 이들까지 포함한다. 뤼스 이리가라이에 의하면 언어적 독백은 실재를 재단하고 지배하려 한다. 이름 짓고 말로서 전유하는 법을 배움으로서 인간은 기표의 세계를 가지고 자신의 안팎으로 둘둘 싼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표의 세계는 인간을 다른 모든 존재들과 실재로부터 떼어 놓는다. 그러나 박미화가 합판들 위에 새겨 넣은 이름들은 통제와 지배를 위한 명명 행위가 아니다. 작가도 모를 어떤 인간들의 이름을 새기거나 추모에는 주체중심주의의 시각에서 보자면 뭔가 무위적인 발상이 있다. 그것들은 불리워졌든 새겨졌든, 곧바로 공중으로 흩어져 버린 이름들인 것이다.  


피부 빛 합판 위에 수많을 칼질과 함께 새겨진 것은 말과 사물이 하나가 된 텍스트로서의 육체이다. 여러 흔적들로 중층적인 표면들은 기의와 분리된 기표와 같다. 즉 ‘기표와 기의는 대응하여 기호를 형성’(소쉬르)하지 않는다. 현대의 정신분석에서는 고전적인 언어학과 달리 언어를 열린 체계로 본다. 무의식 또한 이러한 언어와 같은 구조로 되어 있다. 자끄 라깡에 의하면, 의미와 사물 사이에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합치를 추구하는 끝없는 이동(담론)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관점에 의하면 담론은 상상적인 요소와 놀이, 그리고 개방성이 펼쳐지는 터전으로 간주된다. 욕망을 표상하는 대상은 기표이다. 그 대상을 포착하는 순간, 욕망은 완전한 충만감을 못 느끼고 다른 대상을 열망한다. 결코 만족할 수 없는 욕망하는 주체는 불행하다. 라깡은 주체를 통일하는 특성을 오로지 기표와 욕망의 영역 내에 둔다. 그러나 크리스테바는 라깡의 기표와 욕망 뒤에 있는 모성과 충동에 주목한다. 





켈리 올리버는 [크리스테바 읽기]에서, 오직 기표와 욕망의 영역 내에서만 일어나는 라깡의 이상화와 동일화는 충동을 단절시킨다고 본다. 반면 크리스테바는 욕망보다는 감정을 중시한다. 욕망이 사회관계의 근거를 결핍과 투쟁에 두고 있다면, 감정은 결핍을 인정하면서도 타자에로 향하는 운동과 상호유인에 역점을 둔다. 결핍보다는 타자를 향한 과잉, 즉 사랑을 강조하는 크리스테바의 이론은 금지와 억압에 근거하지 않는 윤리의 가능성을 말한다. [크리스테바 읽기]에 의하면, 법률적 모델은 법의 힘을 통해 상호관계를 가지는 독립된 주체를 상정한다. 그러나 크리스테바가 제안하는 모델은 법이나 의무가 이미 그 ‘주체’에 내재함에 따라 법 바깥/ 이전에 작용한다. 이 법은 육체 내에 있는 법이다. 사회적 관계는 이미 주체에 내재하므로 외적인 법은 필요 없게 된다. 타자를 품고 있는 모성은 이미 주체에 내재하는 법을 대변하는 것이다. 박미화의 작품 속 모성은 이러한 내재적 법에 호소한다.  

 

출처: 김달진 미술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