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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기철- 삶의 불화에 대한 호쾌한 대응/ 이선영

sosoart 2016. 11. 18. 20:22

권기철 / 삶의 불화에 대한 호쾌한 대응

이선영

삶의 불화에 대한 호쾌한 대응

  

이선영(미술평론가)

  

가창 창작스튜디오에서 열리는 권기철 전에는 작품이 많지 않다. 그는 열심히 그리며 전시회도 많이 하지만, 출품작을 까다롭게 선별하는 편이다. 그러나 전시작품의 하나로 설치된 신문지 더미들은 작품이 나오기까지의 무수한 시간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시간이 집적되어 공간화 된 그것들은 본격적인 작업을 위해 ‘손풀기’로 매일 먹으로 그렸던/썼던 것들이다. 연습과 본 작의 차이가 크게 나지 않는 권기철의 작품에서, 그중 몇은 선별되어 벽에 걸리는 작품으로도 활용되기도 한다. 맨 아래에 깔린 것들은 누렇게 색이 바랬다. 매일 새로운 것을 실어 나르던 신문 역시 매체로서는 역사의 뒤안길로 자리 잡으려는 즈음, 그것들은 고색창연한 모습으로 예술작품에 등장한다. 시간은 예술이 아니었던 것을 예술로 만들기도 한다. 반대로 근대에 탄생한 예술은 영원하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변할지 모를 그것을 여전히 예술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움직이지 않는 이미지는 시간의 흐름을 암시함으로서 움직일 수 있다. 






물감이 튀고 발로 밟히고 여러 번 겹쳐 그려졌던 신문지들은 시간의 단면을 잘라낸 공간으로 그렇게 서있다. 그것들의 키는 쌓인 시간에 따라 제각각이다. 그리고 전시가 끝나도 계속 자란다. 또한 그것은 그림을 설치의 방식으로 풀기도 하는 작가의 성향이 반영된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2014년 인당 미술관에서의 전시로, 그때 작가는 그림을 예전 농촌에서 대청마루 위에 사진을 걸듯이 벽 위에 어슷하게 설치해놓았다. 요즘과 달리, 이미지가 귀한 시절 하나의 액자 안에 기념이 될 만한 사진들을 빼곡이 넣듯이 말이다. 까치발을 들로 우러러 봐야 하는 평면 안에는 많은 시간들이 압축되어 있었다. 그런 류의 사진첩에는 어린 꼬마의 사진 바로 옆에 수십 년의 시간을 건너뛴 꼬마가 있기도 하다. 시간의 단면인 사진은 이러한 공시적(公示的) 배치를 통해 재차 단면화 된다. 그 전시에서 초상들을 벽에 죽 세워서 설치한 작품은 영화의 엔딩 크레딧같이 흘러가는 고마운 사람들의 행렬을 관객의 동 선과 일치시킨다. 이러한 특이한 설치 방식은 시간을 동결시키는 이미지에 대한 권기철의 해법인 셈이며, 신문지 더미도 같은 맥락이다. 


그것은 나이테처럼 시간이 공간화된 것이다. 신문지 더미와 함께 있는 그림은 잠재성과 현실성의 관계를 가진다. 수많은 신문지를 채웠던 필획들이 간혹 작품으로 뽑히기도 하지만, 값비싼 종이에 그려진 것들—그는 ‘3만원짜리 한지 한 장 망치는데 채 10분이 안 걸린다’고 한탄한다--역시 가차 없이 설치재료로 강등되기도 한다. 종이는 원재료인 나무처럼 다루어진다. 권기철의 작품에는 신문지를 화선지처럼, 화선지를 신문지처럼 다룬 것이 있으며, 그것은 평면에서 튕겨 나와 평면을 넘어서는 방식으로 제시된다. 작가는 ‘평면이 나한테 맞지만 3차원 공간에 대한 허기가 있다’고 말한다. 이 전시에서 2차원과 3차원은 상보적인 관계를 가진다. 작가가 즐겨하는 여행에 대한 기록을 오브제로 표현한 작품은 드로잉이 입체화된 경우이다. 유랑하듯 떠난 여행의 시간들은 각각의 사물로 동결된다. 박물관의 수집품처럼 진열장에 고풍스럽게 배치된 오브제들은 온전한 모습을 갖추지 못한 유물처럼 여기저기 훼손되어 있다. 








부러진 손가락, 들어낸 얼굴, 상반신을 관통하는 칼까지 가지가지다. 그때그때 아팠던 부위는 다르다. 다쳐서, 아파서 상처부위에 감았던 기브스는 뼈를 덮는 살이 되었다. 거기에서 밖으로 배어 나온 것은 피이자 먹물이다. 작가에게 물감은 체액과 동렬에 놓인다. 장난스러우면서도 처절한 그것들은 작업이 희열만큼이나 고통의 산물임을 보여준다. 이 불편한 형태들에서 불상 같은 평온한 도상이 중첩되는 것은, 그것들이 여섯 번이나 다녀왔던 인도여행의 산물이서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희열과 고통이 삶과 죽음처럼 순환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예술 때문에 아프지만 예술 때문에 치유된다. 병 주고 약주는 것이 예술이다. 먹으로 그린 그림은 시간을 넘어서 행위의 궤적까지 드러나 있다. 장난감을 만지기 전부터 붓을 가지고 놀았던 작가에게 ‘그림을 그리게 된 동기’ 따위의 질문에 대한 합당한 대답은 없다.  


2013년경부터 시작한, 먹을 뿌리면서 그리는/쓰는 방식 또한 유희적인 측면이 있다. 붓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구멍을 뚫은 먹통에 먹을 넣고 종이에 바로 뿌리는 방식이다. 미술사에서 드리핑기법은 회화와 행위의 경계를 붕괴시켰다. 그것은 화가를 작품과 대면시킨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위치시킨다. 어릴 때부터 서예를 해왔기 때문에 권기철의 작품은 이미지와 서체의 호환성이 크다. 그의 작품에서 글자는 이미지로, 이미지는 사물로, 사물은 자연으로, 자신이 기원했던 시공으로 소급해 올라간다. 화가가 아니었다면 목수를 했을 것이라고 말하는 작가의 이상은 자연과 호흡하는 작품이다. 소급은 피처럼 진한 예술이 상콤달콤하게 희석되는 문화의 지배적 흐름에 역행한다. 자크 랑시에르는 [미학 안의 불편함]에서, ‘문화에 맞선 예술의 투쟁은 사회에 맞선 세계의 방어, 문화상품에 맞선 작품의 방어, 이미지에 맞선 사물의 방어, 기호에 맞선 이미지의 방어, 시뮬라크르에 맞선 기호의 방어’라고 말한 바 있다. 








책제목에서 추정컨대, 미학 안에서 불편함을 발견하는 이 철학자는 시뮬라크르<기호<이미지<사물 순으로 중요도를 배정함으로서, 현시대의 대세에 역행하는 예술의 상황을 진단한다. 권기철의 최근작품에서 뿌리는 기법은 먹의 궤적들을 더욱 힘 있게 했다. 먹은 종이에 번지고 스며드는 것이 아니라, 튕겨진다. [어이쿠]라는 같은 제목을 단 그의 그림들은 찌릿찌릿한 형상들이 마치 감전된 것 같은 모습이다. 비록 그가 전기보다는 전기에 실려 오는 음악에 더욱 많이 감전되기는 하지만 말이다. 자화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오브제 작품 [어이쿠-Everybody Hurts]의 작품제목은 그가 청년기에 ‘귀를 헌납했던’ 록그룹과도 관련된다. 대학교 1학년 때 장정일을 만나 재즈와 클래식 쪽으로 선회하기는 했지만, 팝과 록을 포함한 음악은 ‘남루한 십대를 무던히도 속삭여준’ 유일한 것으로 오늘의 그를 만들었다. 영혼이 만드는 음악은 영혼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음악은 작업에 몰입하기 좋게 자신을 예열하는 시간을 마련한다. 작가에 의하면 음악은 ‘내가 작업할 수 있는 분위기, 감정을 끌어 올리는 역할’을 수행한다. 그는 작가노트에 ‘지고의 선(善)은 음악이다. 음악은 무엇인가의 겹침이다. 만남이다. 홀로 태어나는 소리는 없다’고 쓴다. 물론 긴 예열의 시간이 지난 후, 작업에 진입하는 순간에 음악은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작가가 먹통을 틀고 춤을 추듯이 행하는 것들은 그자체가 또 다른 음악이기 때문이다. 권기철의 친구 장정일은 소설 [보트하우스]에서 ‘시인이 시를 쓰고 소설가들이 소설을 쓰는 것은 물론, 피아니스트들이 피아노를 치고 화가가 붓질하는 것은 마음의 어딘가가 불행하고 불만에 차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삶과 불화하지만, 그것에 짓눌리지는 않는 권기철에게 예술작품은 ‘심약한 우리의 정서를 보듬어 삶의 불화(不和)를 청소하고 카타르시스를 주는 거울’이다.

 


어이쿠- 210x 474cm 한지위 먹 2014



어이쿠-210 x 474cm 한지위 먹 2014



어이쿠 210 x 248cm 한지 위에 먹 2014




출전; 가창 창작스튜디오



출처: 김달진 미술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