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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한국현대미술사의 살아있는 역사 박서보 “내 인생을 모두 꺼냈습니다”
박서보 작가
“변하지 않으면 추락한다, 그러나 변하면 또한 추락한다.”
-박서보
예술에 대한 열정 하나로 아흔을 목전에 둔 지금도 붓을 드는 작가.
지우고 그리고를 반복한 끝에 발견한 비움의 미학을 캔버스에 담고
관람자의 아픔과 고뇌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하는 수행자.
끊임없이 도전하며 한국 미술계에 중요한 족적을 남긴 선구자.
그 어떤 말로도 수식할 수 없고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예술가 박서보를 만났다.
Q. 작가님의 모든 화업을 총 망라한 회고전 <박서보: 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를 개최한 소감이 어떠신가요?
이번 전시회를 준비하면서 내가 살아온 과정, 숨겨두고 싶었던 세계까지 모두 끄집어내 가져왔습니다. 그와 연관된 아카이브 편지까지도 말이죠. 전시실을 한 번 돌아보고 ‘회고전의 모델이 될 것이다’라는 생각을 했어요. 지난 1991년에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1차 회고전을 할 당시에는 선보이지 못한 작품이 많았는데 이번엔 다릅니다. 내가 미워하던 ‘유전질 시기’ 작품도 내놓고, 과거 1970년대에 반정부 성향이라고 몰려서 강제로 분해된 <허의 공간>도 다시 제작하고, 신작도 선보이죠. 마치 발가벗은 임금님이 된 기분입니다. 내 전부를 담은 그림들 역시 발가벗고 서서 관람객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Q. 5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시대를 반영하듯 지속적으로 작품에 변화를 주며 도전을 멈추지 않았는데,
그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박서보, <회화(繪畵) No.1>(1957)
<제3회 파리비엔날레>에 출품한 이 작품은 당시 프랑스 일간지 레자르 표지에 이미지가 상하 반전되어 실리는 등
현지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나는 참혹했던 전쟁을 겪은 세대이고 바로 옆에서 ‘어머니!’하고 죽는 사람을 보기도 했어요. 그걸 그려보자 마음먹으며 예술에 임했죠. <회화(繪畵) No.1>은 폭격에 의해 폐허가 된 도시의 건물잔해에 철근이 뒤엉킨 광경을 보고 제작했습니다. 나는 독종인데다 남의 것을 답습하기 싫어서 이런저런 시도를 많이 했는데, 이 작품을 제작할 때도 페인트를 흩뿌리거나 숫돌을 쓰거나 마음에 안 들면 내동댕이쳐서 발길질을 하기도 했어요. (웃음) 그런데 저녁을 먹고 돌아오니 이 작품이 새삼 매력적으로 보여 결국 완성해냈고, 우리나라 최초로 *‘앵포르멜 작품’이라는 평가를 들은 것이죠.
*앵포르멜 미술: 기하학적 추상을 거부하고 미술가의 즉흥적 행위와 격정적 표현을 중시한 전후 유럽의 추상미술
1960년대쯤 되니까 세상이 변하고 전쟁의 상흔도 가라앉더군요. 나 역시 과거가 다른 나라의 소설을 읽은 기억인 듯 아득하게 느껴지면서 여러 예술적 실험을 하기 시작했죠. 그러다 프랑스에 갔는데, 그곳에서 예술가의 정신만 강조한 작품들을 보며 ‘정신과 예술적 테크닉이 어우러져야 진정한 그림이 나온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또 작가로서 독자적인 언어를 찾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습니다. 성경부터 장자, 노자의 철학서 등 안 본 책이 없을 정도였는데 어느 날 둘째 아들이 글씨 연습을 하다가 잘 안 되니까 종이를 구기고 지우는 모습을 봤어요. 그리고 무릎을 탁 쳤어요. 내가 바라던 게 바로 저것이라고 느꼈거든요. 나라는 사람을 비우고 캔버스 역시 비워야 한다고 말이죠. 그때부터 마치 수행하듯 ‘묘법’을 지속했습니다.
작품을 제작 중인 박서보 작가 박서보, <비키니 스타일의 여인>(1968)
(스프레이 분사법으로 제작)
그밖에도 우리나라 전통미를 현대적으로 구현하려고도 해보고, 1969년 인류의 달 착륙을 계기로 무중력에 관심을 갖기도 했죠. 스프레이의 원리가 무중력 상태와 유사하다는 생각으로 스프레이 분사법을 제작 과정에 사용하기도 하고요. 방독면을 쓰고 작업했어도 독성 화학 성분이 함유된 물감 입자가 흡입되는 것은 막지 못했는지 기관지에 심각한 손상을 입고 그만둔 일도 있었죠. 목적을 두고 변화를 한건 아니지만 이런 마음은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후대에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말입니다.
Q. 앞서 말씀 하신 것처럼, 이번에는 ‘허상 시리즈’ 중 하나인 <허의 공간>을 다시 선보이는데요.
남다른 제작 비화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게 무엇인가요?
조지 시걸이라는 조각가가 사람이 식탁에서 얘기를 하는, 아주 일상적인 모습을 조각해 내놨더군요. 그것에 영향을 받아 나는 1960년대 후반에 주체인 사람을 빼버리고 허체인 옷이 혼자 뛰고, 걷는 모습을 설치작품으로 제작해서 발표를 했습니다. 이후 내 친우인 건축가 김수근의 제안으로 오사카 엑스포(Expo)'70 한국관에 출품하기로 하고 작품을 제작하는데, 모델들이 자꾸 그만 두지 않겠습니까. 왜 그런가 하고 봤더니 알몸에 석고를 붙여야 하는 걸 힘들어하더군요. 결국 내가 직접 몸에 석고를 붙여보니 마치 냉동실에 들어간 듯 춥고, 석고를 뗄 때는 불 속에 있는 느낌이더라고요. 그렇게 제작하고 아토피에 걸려 수십 년을 고생했는데, 당시 설치 도중에 ‘반정부 성향’이라고 주장하는 정부세력에 의해 철거된 것이죠. 그래도 굴복하지 않았어요. 어느 날 심근경색이 와서 입원했는데, 의사들이 나에게 ‘온몸이 다 곪아있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예술가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Q. 작가님께서는 예술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작업실에서 작업 중인 박서보 작가 (사진: 안지섭)
예술가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그 시대를 꿰뚫어 보는 통찰력과 식지 않는 열정이라고 봅니다. 오히려 지식은 자신을 개방적으로 이끌어 가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있어요. 나는 아날로그 시대에서 70년을 넘게 살았는데, 20세기를 넘어서니 디지털 시대가 오더군요. 새롭게 변화한 시대 환경에서 예술가로서 어떻게 살아남아야하나 자신감이 사라졌는데 이내 오기가 생겨 다시금 작업에 몰두했습니다. 그 작품들을 전시에서 확인할 수 있죠. (웃음)
아날로그 시대에서 예술의 특징은 작가가 감정을 캔버스에 토해놓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21세기죠. 이 디지털 시대는 어느 곳에나 스트레스가 가득 차있어요. 그림에서 무언가 쏟아져 나오면 자칫 ‘이미지의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술은 관람자의 고뇌와 스트레스를 받아들여 주는 흡인력이 있어야 해요. 마치 마르지 않은 잉크를 흡입해주는 흡인지처럼요. 그게 예술과 예술가의 역할이라고 봅니다. 예술은 그 시대의 산물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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