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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과 장식/ 이선영

sosoart 2019. 12. 20. 12:25

http://www.daljin.com/column/17382

미술과 장식 (1)

이선영

미술과 장식

  

이선영(미술평론가)

  

들어가는 말


공예를 포함한 미술 현장에서 분야에서 공예전공자들이 산업인가 예술인가의 갈림길에서 고민하는 이들을 종종 본다. 작업이라는 것이 어차피 끝없는 선택의 기로에서 방황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유달리 공예 분야의 정체성 문제는 강한 듯하다. 공예라는 단어 자체를 금기시하는 이들도 있다. 공예는 작가가 선택하는 여러 기법 중의 하나로 믿고 있는 나로서는 이러한 고민이 크게 다가오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예술을 개념만 가지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작품에는 작가의 노동과 솜씨가 필요하며, 그중 어떤 것은 전통을 통해서 매뉴얼이 잘 보존되어 있는 것도 있을 따름이다. 공예 분야에 관련된 비엔날레 급의 행사는 이러한 정체성의 문제를 다시금 묻는 계기가 될 것이다. 2019년 청주 공예비엔날레의 키워드 중의 하나인 [몽유도원도]는 전통의 상징으로 다가온다. 전통은 산업화의 아이템이 될 수 있고, 풍부한 재해석을 통해 현대적 작품으로 탄생할 수 있다. 청주 공예비엔날레가 추구하는 바는 당연히 후자라고 보여진다. 


그것은 현대미술과 공예, 또는 현대와 전통의 관계를 건드리는 문제이며, 현대 미술가나 공예가들이 모두 고민하는 절박한 문제이다. 현대 미술가들은 자신의 개념을 구체화할 수 있는 기법—전통적 공예기법을 포함한--이 필요하고, 공예가들은 현대적 개념이 필요하다. 그리고 미술이든 공예든 모두 디지털 문화나 첨단 기계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재정립할 필요성이 생겼다. 장식(공예, 디자인)의 역사에서 새로움의 기준은 예술적인 것이다. 예술은 반복되었던 것이 차이를 보여주는 순간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예술의 기원과 바탕은 장식이다. 현대는 상징이 제거된 장식, 기법이 사라진 예술이 특징적이다. 장식과 예술에서의 이러한 경향은 기계문명에 충분히 대응할 수 없게 했으며, 대중으로부터의 소외를 야기했다. 필요한 것은 상징적 우주의 회복, 또는 재구성을 위한 미술과 장식의 만남이다. 필자는 이번 강의를 통해서 장식이라는 키워드로 공예와 미술의 관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1. 장식의 발생


역사는 미술이 ‘순수함’을 획득한 때가 근대라고 본다. 그 전에 미술은 어떤 기능을 하는 수행했으며 가장 대표적인 것은 장식이었다. 장식은 스스로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 속해 있으면서 어떤 기능을 수행한다. 장식은 소소한 생활 도구의 꾸밈부터 당대의 지배적 사상을 전달하는 역할까지 두루 담당했다. 그러나 근대 이후에도 장식이 미술을 떠난 적은 없다. 그 위상이 달라졌을 뿐이다. 손으로 제작하는 미술은 기법의 문제를 초월할 수 없고, 기계로 한다고 해도 누구나 따라 할 수 있는 매뉴얼을 확립해야 한다. 구별은 우위를 평가하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미술을 장식과 구별하는 것은 미술에 우위를 부여하려는 경향과 밀접하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예술이 무슨 쓸모가 있나’ 하는 원초적인 물음이 그것이다. 기예를 무시하곤 하는 현대예술 작품들에 대해서는 지나가는 사람도 ‘이 정도는 나도 할 수 있어’라고 말하게 한다. 


예술과 장식을 구별하는 것은 기법이라는 중요한 요소를 스스로 잘라내는 것이며, 그 결과는 관념으로의 경도였다. 그러나 관념 또한 철학같이 자신의 전문분야가 있지 않은가. 생활터전이나 무덤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원시인들이 생활용품에서 제의용 물품까지, 악기에서 무기까지 모든 물건들을 장식해 왔음을 보여준다. 그것들은 단순한 무늬를 넘어서 무엇인가를 상징했다. 인간은 자연과 직접 마주하지 않고 상징적 우주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장식의 발생에 대한 서로 다른 가설이 있다. 유심론자들은 장식이 공허한 공간을 채우기 위한 것으로 본다. 한편 유물론자들은 장식을 생산력의 진보로 설명한다. 가령 그들은 수렵 생활로부터 농경 생활로의 변천을 동물 장식으로부터 식물장식으로의 변화로부터 읽어낸다. 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심미적인 취향도 변화한다. 굳이 유물론적 가설이 아니더라도, 장식의 원천이 자연임은 부정할 수 없다. 


인류학자 로제 카이유와(Roger Caillois)는 [인간과 성(聖)]에서, 각 문화 전통의 보편적인 공통기반은 바로 자연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자연적인 것이 감추고 있는 것을 명백히 드러내고 그것을 더욱 완벽하게 만들고 싶어한다. 로제 카이유와는 예술로 자연의 형상을 모방하거나 반대로 그 형상들을 거부하려 하며, 형상들의 숨겨진 법칙을 복원하려고 한다. 인류학적 관점에서 예술이란 인간이 일부러 만들어 이 세계에 추가한 아름다움으로, 자연과 예술은 다양성의 진정한 모델이 된다. 자연적 형태가 아닌 기하학적 장식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아프리카의 역사 문화재 미술’을 다루는 책 [아프리카 미술]의 저자 프랭크 윌레트(Frank Willett)에 의하면, 신석기 시대 이후의 장식은 형태와 재료와 제작공정으로부터 발생하였다. 그에 의하면 장식은 재료의 자연적 특질, 또는 재료의 가공에 기초한 우연적 효과의 모방이나 전개에 의해 얻어진 것들이다. 예를 들어 바구니나 자리를 엮으면서 발달 된 기술은 기하학적인 문양을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그런 장식은 기술의 발달과 함께 생겨난 형식이다, 프랭크 윌레트는 그것을 ‘기능에 바탕을 둔 생김새’(technomorphs)로 부른다. 그것이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기원이 잊혀지고 기하학적, 추상적 패턴으로 발전하게 된다는 것이다. 특히 이슬람 문화는 추상적 장식이 특징이다. 이슬람 문화에서는 살아있는 생물을 묘사하는 것이 억제되는 반면에, 정교한 장식적 문양이 발전하였다. 신화학자 진 쿠퍼(Jin Cooper)의 [그림으로 보는 세계문화 상징사전]에 의하면, 마호메트가 ‘신이든 인간이든 그림으로 재현하는 경우에는 나무, 꽃, 생명이 없는 대상들로만 그리도록 하라’고 말한 이래, 예술이 명상을 돕는 수단, 혹은 만다라의 일종, 곧 무한으로의 개방, 혹은 정신적 기호들로 구성된 언어형식이 된다. 이슬람의 장식들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요소들로는 구름, 잎, 다각형, 아라베스크, 알파벳 문자들, 히아신스나 튤립, 혹은 들장미나 일부 가상적 동물을 들 수 있다. 


신화학자들은 장식이 광대한 상징적 그물을 형성하면서 물질적 혼돈으로부터 탈출하고 무한에의 열망을 상징한다고 한다. 장식이 보여주는 요소나 반복적 단위들의 누진적인 발전, 곧 점진적으로 질서를 갖추는 양상은 우주의 진화나 발전이 암시하는 점진적인 단계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가령 인류는 척박한 환경에 맞서서 부족의 번성과 곡식의 풍성함, 가축의 증가를 기원하였다. [아프리카 미술]에 의하면, 동물의 뿔이나 달팽이의 껍질에 나타나는 지속적인 증가율의 곡선 장식은 이러한 풍요의 기원이 담겨있다. 어떤 형태는 어떤 내용을 담기에 더 적절할 수 있다. 무질서/질서에 대한 감각 또한 형태(gestalt) 심리학으로 설명된다. 루돌프 아른하임(Rudolf Arnheim)은 [예술심리학]에서 배열의 전체적인 구조를 파악할 수 있고, 또 그 구조를 분할해서 세부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때 질서가 있다고 본다. [예술심리학]에 의하면 질서 있는 형태는 대립적인 힘들의 균형에서 나오며, 가장 단순한 형식으로 배열하려는 경향을 지닌다. 


루돌프 아른하임은 질서는 좋은 기능의 충분조건이고, 같은 이유에서 유기적인 자연과 인간은 질서를 선택한다고 말한다. 인간은 자연에 내재한 질서를 파악함으로서 자신이 놓여 있는 환경을 통제하고자 했다. 추상적 장식은 그러한 의지가 담긴 시각적 주술이라고 할 만하다. 추상적 장식에는 노동의 흔적은 물론 언어적 운율이 깔려있다. 문자 이전의 인류의 전통은 구술성(orality)에 뿌리박고 있다. 월터 옹(Walter J. Ong)은 [구술문화와 문자문화]에서, 구술문화에 속한 인식체계는 정형구적 사고의 조립에 의지한다고 본다. 구술문화에서는 일단 획득된 지식을 잊지 않도록 끊임없이 반복해야만 했다. 기억의 용이함을 위해, 고정되고 형식화된 사고패턴이 요구된다. 구술문화적 전통 속에서 장식은 원시인들의 사고와 표현 방식처럼, 분석적이기보다는 첨가적, 집합적이다. 원시적 장식들은 일정한 항상성을 유지하고 있으며, 인간의 생활세계에 밀착되어 있다. 원시인들의 장식에서 알 수 있듯이, 장식이란 자유로운 창작이 아니라 관례에 따른다. 


관례에 충실한 장식은 놀이처럼 순환적이고 반복적이다.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유혹에 대하여]에서, 장식이 확립하는 질서는 관례적인 것이기 때문에, 현실 세계의 필연적 질서(법칙)와는 무관하다고 본다. 그에 의하면 모델들에 의한 장식, 그리고 그들의 불안정한 결합 관계가 장식의 세계를 특징짓는다. 이러한 기호의 망은 언어의 추상적인 구조가 아니라, 의례의 무분별한 전개 속에서 다른 기호에 연결되어 있다. 보드리야르는 놀이 이론을 장식에 적용하면서, 장식이 관례적인 반복과 차단된 우연에 도취되고, 결정적인 연속에 사로잡힌 현기증에 사로잡힌다고 말한다. 장식의 환각이다. 장식은 보드리야르가 말한 법칙과 규칙의 대조에서, 규칙에 해당한다. 그에 의하면, 법칙에 대립되는 것은 법칙의 부재나 자유가 아니라, 규칙이다. 규칙은 법칙과 달리 자신의 기원과 목적이 없다. 그렇지만 놀이의 규칙처럼 참여자들로 하여금 몰입하게 한다.


보드리야르에 의하면, 장식의 규칙은 보편적인 의미와 가치의 체계 및 객관성을 추구하는 법칙과 무관하다. 법칙과 달리 규칙은 임의적이고 근거와 기준이 없으며, 규칙의 준수에 따른 광적인 현기증이 있을 뿐이다. 계획된 질서나 우연의 질서가 아니라, 규칙에 따르기 위해 법칙에서 벗어난 것, 즉 의례적인 질서는 사회성보다 우월하다. 보드리야르는 사회성과 의례성을 대조한다. 사회성은 인간 사이에서 생각해낸 조직과 교환으로 구성된 것이며, 매력이 없는 최근의 형태이다. 반면에 의례성은 훨씬 더 거대한 체계라고 본다. 즉 의례성은 살아있는 사람들과 죽은 사람들, 그리고 동물들을 포함하고, 자연을 배제하지 않는다. 동서고금의 유적에 남아있는 풍부한 장식의 유산은 그 상징적 뿌리가 잊혀졌기 때문에 무의미한 패턴으로 보일 뿐이다. 장식이 다시 의미를 부여받기 위해서는 죽음까지도 포함하는 삶의 총체적 맥락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2. 다양한 장식 ; 문신, 마스크, 화장


장식은 무엇보다도 과잉의 것이다. 보드리야르는 인간은 늘 필요를 넘어서는 무엇에 매혹 당했다고 본다. 그것은 때로 삶을 위협할 수도 있었다. 보드리야르는 생산의 사회를 비판하면서, 가치로 교환되지 않는 것, 그리고 바로 그런 이유에서 도처에서 억압당하는 것, 즉 성, 죽음, 광기, 폭력만이 매혹적이라고 주장한다. 삶에서 억압되는 것이 회귀하는 무대가 바로 예술이다. 철학자 조르쥬 바타이유(Georges Bataille)는 [에로티시즘]에서 금기에 의해 억압됨으로서 위반에의 충동을 야기하는 삶의 어두운 측면에 주목했다. 바타이유는 노동, 세속, 과학의 세계인 삶의 영역과 파괴, 신성, 예술, 종교, 축제의 세계인 죽음의 영역을 대별 한다. 그의 기준에 의하면 세속의 세계와 신성의 세계를 갈라놓는 것은 노동이다. 바타이유는 노동이 인간과 자연을 구분하는 결정적인 기준이라고 본다. 자연과의 투쟁인 노동의 세계 저편에는, 노동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신성의 세계가 있다는 것이다. 


바타이유에 의하면 삶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지속하고자 하는 욕구에 불과한 것이라면, 소멸은 대가 없는 사치라고 할 수 있다. 예술과 장식은 사치라는 점에서 축제나 전쟁에 버금가는 분야일 것이다. 바타이유는 ‘생명체가 완성을 욕구할수록 낭비는 더욱 강해진다. 장식과 관능과 죽음은 연결된다. 사람들은 할 수 있는 한 가장 많은 낭비와 큰 위험을 추구한다. 축제 중에는 고뇌와 환희, 폭력과 죽음이 범람했으며, 소비와 소진만이 최종적인 목적’이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죽음과 성욕은 적대적인 원칙으로 서로 맞서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원 안에서 교환된다’(보드리야르) 인체에 가하는 장식의 양상은 문신이나 가면, 화장 등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원시인뿐 아니라 현대인도 문신이나 그리기를 통한 장식, 깍기와 자르기, 뚫거나 상처 내기 등으로 신체 변형을 한다. ‘문신(tattoo)’이란 말은 폴리네시아어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빈 성과학연구소가 편집한 [성학 사전]에 의하면, 문신은 송곳니나 바늘로, 혹은 조개껍질이나 이빨로 피부에 상처를 내고, 일정한 물질을 피부에 넣는 관습으로, 예전에는 거의 남자만 하고, 여자들 사이에선 매춘부만 했다. [성학사전]에 인용된 많은 전승에 의하면, 문신이 인간과 신의 혈연관계를 나타내며, 이런 의미에서 문신은 부적, 또는 효험이 확실한 마력의 표시로서 그려진다. 러시아의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인 플레하노프(Plekhanov)는 [주소 없는 편지]에서 북아메리카 몇몇 부족은 문신으로 부족의 시조 동물을 그려 넣음으로서, 선조와의 신비적 관계와 씨족 관계를 나타낸다고 한다. 여기에서 신체장식은 출생증명, 통행증, 비망록 등의 유용한 역할과 심미성을 지닌 것이다. 몸에 하는 장식은 원시 민족들만의 관습은 아니다. 그것은 현대의 하위문화에도 생생하게 살아있다. 그것은 현대를 거슬러 원초적인 것과 직접 접속하고자 하는 욕망이며 과시적 효과도 있다.


이이자와 코타로(飯沢耕太郎)는 [사진과 페티시즘]에서 살아있는 피부에 새기는 문신의 불가사의한 매력, 그리고 현대의 사도마조히즘적인 패션의 꼭 맞는 가죽옷이나 고무 의상은 제멋대로의 방향으로 자기 증식되는 성적 욕망을, 질서가 부여된 통로를 따라서 쾌락의 게임으로 조직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가 사진을 통해 많은 예를 들고 있듯이, 현대의 하위문화에서 달군 쇠로 몸에 기호를 새겨 넣는 브랜딩(branding)이나 몸에 구멍을 뚫는 피어싱(piercing)은 신체의 훼손을 통해 폭력적인 관능성을 자극하는 장식이다. 이러한 신체에 대한 장식은 범죄와도 연결된다. 미셀 푸코(Michel Foucault)는 [감시와 처벌]의 공개처형에 대한 글 중에서, ‘모반을 일으킨 자는 빨간 속옷을 입히고, 가슴과 등에는 반역자라는 말을 써 붙이도록 한다. 그가 존속 살해자라면 그 속옷에는 단검 또는 사용된 흉기를 수놓도록 한다. 독살범일 경우에는 붉은 셔츠에 뱀과 기타 독성이 있는 동물의 장식을 붙이도록 한다’고 기록된 19세기의 공안법전을 인용한 바 있다. 


과거에 죄수들은 그가 지은 죄를 몸에 새기곤 하였듯이, 잔인한 장식은 사회적 처벌의 흔적이며, 주홍글씨처럼 강력한 낙인 효과를 지닌다. 그러나 그러한 실제적 뿌리가 제거된 채 과시적 장식이 되기도 한다. 몸에 새겨졌던 장식으로서의 문신은 이제 언제라도 필요에 따라 쉽게 없앨 수도 있는 것이 됐다. 가면을 쓰는 것도 인류학적 장식문화의 거대한 일부분이다. 시제어 퍼피(Cesare Poppi)는 [가면, 또 하나의 얼굴]에서 가면은 사회에 질서를 부여하는 위계적인 체계의 상징이거나, 축제의 의식용 장비들로 사용되었다고 말한다. 가면이 갖는 근본적인 힘은 ’정체성을 변화시키며, 동시에 그것을 고정시키는 능력’(시제어 퍼피)에 있으며, 아울러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는 메커니즘이라는 데 있다. 그러나 멕시코의 시인이자 비평가 옥타비오 파스(Octavio Paz)는 가면을 축제라는 과도적 시기에만 한정하지 않았다. 그는 [낭만주의에서 아방가르드까지의 현대 시론]에서 ‘살아있는 동안 우리는 가면, 또는 이름, 즉 우리가 만들어낸 허구, 우리의 얼굴과 분리될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 


화장술 또한 가면만큼이나 오래된 몸 장식의 기술이다. 원시 부족의 경우 과도한 안면 장식은 거의 가면과도 같은 면모를 가진다. 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Claude Levi Strauss)는 [슬픈 열대]에서 원주민들의 안면도식은 개인에게 인간으로서의 준엄을 부여하였고, 자연에서 문화로, 무(無)정신의 동물로부터 문명화된 인간에로의 이행을 나타내는 경계선이라고 말한다. 브라질의 카두베오족의 분장은 상징적 형식을 부여하려 했던 한 사회의 환상으로 설명된다. 화장으로서 그 문화의 꿈, 즉 황금시대를 서술하는 상형문자를 장식하는 것이다. [슬픈 열대]에 등장하는 카두베오족에게 존재란 장식하는 것이며, 장식이란 그들이 지능도 창의력도 인간성도 없다고 간주한 무(無)장식적 존재에 대한 우월감의 확인이다. [슬픈 열대]에 등장하는 므비야 족은 자연에 대한 공포를 안면문양과 낙태, 그리고 영아살해라는 관습으로 표시하였다.


도미니크 파케(Dominique Paquet)는 [화장술의 역사]에서 고대인의 이상은 몸단장이나 인위적인 장식이 아니라, 부분과 전체의 균형에서 비롯되는 조화였다고 말한다. 부자연스럽고 과도한 화장술은 창녀나 소문난 성도착자들의 전유물로 간주 되었다. 이 책에 의하면 중세에도 신체에 변형을 주는 것은 음란함과 교만함을 저지르는 것이었다. ‘신의 섭리는 자연스럽고, 악마의 소행은 작위적’이라는 믿음이다. 헛된 겉치레는 죄악의 온상이었다. 도미니크 파케는 ‘화장으로 만들어낸 가면은 신이 빚어낸 얼굴 위에 칠한 악마의 모습이다’라고 한 성(聖) 제롬의 말을 인용한다. 그에 의하면 조물주는 인간을 자신의 모습대로 창조했으므로, 겉치레는 신의 작품을 손상하는 일이다. [화장술의 역사]는 17세기 궁정에서 화려한 궁정문화 속의 인위적인 기교가 번성했지만, 18세기의 상승하는 부르주아 계급은 귀족의 인위적인 색채보다는 자연스러운 질서, 또는 무질서를 선호하였다고 전한다. 


부르주아가 요구했던 근대적 평등에는 몸의 진실성에 대한 요구가 있었던 것이다. [화장술의 역사]에 의하면 낭만적 풍조는 이러한 자연스러운 경향을 바꾼다. 낭만주의에서는 질병을 모방하는 창백한 화장법이 유행했다. 낭만주의자들의 병적 초췌함에 대한 선호는 중산계급의 이상적인 아름다움(자연스러움)에 대한 반발로 형성된 것이다. 후기 낭만주의자인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는 [화장예찬](1863)에서 아름다움의 이상을 자연에서 인위적인 기교로 옮겨 놓았다. ‘아름답고 고귀한 모든 것은 이성과 계산의 결과물이다. 자연이 만든 모든 것은 끔찍하다’(보들레르)고 말하는 모더니스트들은, 인위적인 기교로 자연을 초월하고자 했다. 19세기 말 퇴폐주의 예술가들은 현대성을 추구했는데, 화장은 그 상징의 하나였다. 그들은 기괴함을 찬양하면서, 인위적인 기교의 의미를 진실을 모방하는 허위에서, 허위를 모방하는 진실로 변화시킨다.  


보드리야르는 [유혹에 대하여]에서, 화장을 비롯하여, 의례화하는 것, 의식화하는 것, 괴상한 옷을 입는 것, 가면을 씌우는 것, 팔다리를 자르는 것, 모양을 그리는 것, 고문하는 것, 이 모든 것은 유혹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의 기준에 의하면 장식을 추동하는 유혹은 자연적이지 않다. 미(美)나 장식은 반(反) 자연적이다. 사실, 자연에는 불필요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자연은 경제적이다. 그러나 미와 장식은 자연스러움 대신에 강렬함을 추구한다. 강렬한 미학을 위해 폭력과 잔혹도 동원된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적 폭력이나 잔혹이 아니라 의례적인 것이다. 실제의 상해가 아니라 강렬한 미학을 실행한다. 보드리야르의 논지를 응용하자면, 장식은 유혹을 통해 실재의 체계를 종결짓는다. 그것은 육체를 가상으로, 속임수로, 덫으로, 동물적인 모방으로, 제의적인 모사로 덮어씌우는 것이다. 보드리야르에 의하면 장식의 열정은 놀이의 순수한 형태이며 형식적인 한술 더 뜨기이다. 기호의 현혹적인 매력과 지배인 의례적 장식은 강렬함을 넘어 현기증을 초래한다.  

    

3. 근대디자인과 장식


근대가 한창이던 19세기에 고딕 복고운동을 펼친 비평가 존 러스킨(John Ruskin)은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예술은 모두가 어느 장소엔가 부합되어 있다. 즉 어떠한 목적에 종속되어 있다. 장식성이 없는 최고급 예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장식은 근대적 기능주의자들에게는 제거되어야 할 구시대의 유물일 뿐이었다. 19세기 중반 기능주의의 선구인 호레이쇼 그리노(Horatio Greenough)는 장식이란, 가식이고 자신의 불완전성을 가장하려고 하는 유치한 노력이라고 보았다. 그는 장식과 기능을 대조시키고 전자는 인위적인 것, 후자는 자연적인 것이라 평가한다. 그리노는 장식을 비유기적이고 비기능적인 요소의 도입이라고 본다. 유기적인 조직체에 비유기체를 도입하는 것은 파괴행위요, 퇴락의 징조라는 것이다. 장식을 좋아하는 것은 야만적이고, 자신과 같은 근대인은 ‘벌거숭이’, 즉 본질적인 것의 당당함을 추구한다고 말한다.


특히 기능주의자들은 ‘장미꽃 무늬가 새겨진 엔진같은 물건’ 같이 새로운 재료에 구시대적인 장식을 하는 경우를 혐오하였다. 아르누보는 ‘장식적인 질병’(월터 크레인Walter Crane)이라고 매도되었다. 장식에 대한 비판은 모더니즘의 개척자였던 아돌프 로스(Adolf Loos)에게서 절정을 이루었다. 그는 제목도 의미심장한 [장식과 죄악](1908)이라는 논문에서, 장식으로부터의 자유를 위하여 싸울 것을 천명한다. 그는 이 논문에서 문화의 진보는 실용적인 물건에서 장식을 제거하는 것과 같다고 본다. 장식은 현대문화와 유기적인 관계를 갖지 못하며, 현대문화의 표현도 아니다. 따라서 장식으로부터의 해방은 정신적인 힘의 표상이라는 것이다. 아돌프 로스는 장식을 극단적으로 배제함으로서 급진적인 미적 순수주의를 발전시켰다. 그러나 그에게도 장식을 하려는 충동은 조형예술의 기원이 된다. 장식은 에로틱한 것--그는 최초의 장식인 십자가의 에로틱한 기원을 지적한 바 있다—이며, 문화적인 배설 충동의 산물이기도 하다. 


아돌프 로스는 죄인의 80%가 문신을 하고 있는 감옥의 예를 들면서, 비록 지금 감옥에 있지 않더라도 문신을 한 자는 잠재적인 범죄인이거나 퇴행적인 귀족주의자로 간주할 만하다고 본다. 아돌프 로스는 장식은 범죄자에 의해 만들어질 뿐만 아니라, 인간과 나라의 건강과 재정, 따라서 문화적 발전에 커다란 손실을 끼침으로서, 죄를 범한다고 본다. 인간의 노동이나 물자가 소모되어 가는 것은 국민경제에 대한 죄악인 것이다. 그는 문화발전의 속도가 장식을 애호하는 낙오자들 때문에 느려진다고 본다. 장식은 이미 현대문화의 자연스러운 생산물이 아니라, 후진적이고 퇴행적인 현상을 나타내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장식은 노동력의 소비이며, 따라서 건강의 낭비이고 파손된 재료를 의미한다. 기능주의자들은 과도한 문화위생학—더러움과 깨끗함을 나눔으로서 문화적 질서가 생겨난다는 인류학적 가설에 의하면, 문화 또한 위생학이다--을 가지고서, 장식을 제거해야 할 할 병균처럼 여겼다. 


그들의 논조는 거의 종교적인 울림까지 지니고 있다. 데 스틸(De Stijl)그룹은 ‘최초의 말은 순수성이다. 즉 백색의 세계로 갈색의 세계를 대체하자’고 주장했으며, 아돌프 로스는 ‘이제 도시의 가로는 흰 벽처럼 빛날 것이다. 성스러운 도시, 천상의 도시 시온처럼...그러면 완성은 곧 올 것이다’ 고 말했다. 그들은 마치 곰팡이 같은 장식을 세척하고, 투명하고 맑고 순수한 것을 되찾고자 하였다. 장식은 형태와 기능에 적합해야 한다는 것이, 기능주의자들이 장식에 부여한 역할이다. 기능주의자들에게 장식은 이미 존재하는 미의 윤곽을 한층 더 정확하게 하기 위해 응용되는 것에 불과하였다. 루이스 설리반(Louis Sullivan)은 [건축에 있어서의 장식]에서 모든 장식의 추방이 급선무지만, 그다음 단계는 유기적인 장식을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아돌프 로스가 허용했던 유일한 장식적 요소는 그 주어진 성질을 위해 펼쳐지는 재료뿐이었다. 여하한 상징적이거나 표현적인 변형은 용납되지 않았다.


1920년대의 ‘새로운 정신’은 기하적 추상을 추구하였다. 르 꼬르뷔제(Le Corbusier) 와 오장팡(Amédée Ozanfant)은 기계시대의 새로운 미학을 대변하면서, 순수한 추상적 형태와 색채에 의한 순수주의와 기계미학을 주장하였다. 1920년대의 순수주의자들은 고대 그리스를 찬미하였는데, 그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는 훈련과 논리, 명쾌함과 질서의 동의어였다. 앙리 반 데 벨데(Henry Clemens van de Velde)는 그리스인의 정신과 논리를 가지고 물질의 바른 형태, 그 완전함을 추구하자고 말한 바 있다. 근대 디자이너들은 미의 보편성, 객관성, 표준성을 주장함으로서, 장식의 침투를 원초적으로 배제하였다. 근대 디자인의 보편적인 어휘는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명제이다. ‘기능으로서의 미’를 주장하는 막스 빌(Max Bill)은 ‘형태는 최소의 재료로 최대한의 효용을 창조한다’고 말한다. 산업디자인의 미는 형식의 정확성을 보여주며, 그것은 기능의 기호가 투명한 것을 의미한다. 기능주의의 완벽한 모델은 기계이다. 


여기에서 기계 미학이 발생한다. 엔지니어들에게는 기술과 재료가 미의 원천이자 구조가 된다. 그들은 ‘물질에 대한 진실’을 추구했던 것이다. 피터 웰렌(Peter Wellen)은 [순수주의의 종언]에서 아돌프 로스(Adolf Loos)와 소스타인 베블렌(Thorstein Bunde Veblen)은 모더니즘에 대한 모범 답안을 내놓았다고 본다. 그들에 의하면 공리가 장식을, 엔지니어가 유한계급을, 생산이 소비를 대신할 것이었다. 경제뿐 아니라, 문화와 정치에 있어서까지 부르주아적인 것이 귀족적인 것을 대신할 것이라고 하였다. 무장식주의를 표방하는 신즉물주의(Neue Sachlichkeit)나 바우하우스 운동, 기능주의의 선구자들은 역사주의에 반발하여, 세계는 우선 엄청난 상징의 폐물로부터 해방되어야 하며, 그 잡동사니들을 제거해야만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양식모방이나 재료 속에 포함된 위장된 상징가치로부터 세계를 구해내기 위해, 재료, 기술, 기능의 진실성을 내건 것이다.   


피터 웰렌에 의하면, 역사적으로 모더니즘의 첫 파도는 기계의 형식에 강박적으로 사로잡혀, 장식과 잉여의 유혹을 물리친 엔지니어의 미학이었다. 베블렌의 [유한계급론]의 표현을 사용하면, 과시적인 낭비나 전시의 성격을 지닌 유한계급의 예술이, 정밀하고 노동자답고 생산지향적인 엔지니어의 예술에 굴복한 것이다. 기계 미학은 기계의 형식과 닮은 예술을 추구하는 기능주의가 자리 잡고 있었다. 구성주의, 바우하우스, 데 스틸, 순수주의(Purism), 에스프리 누보 등이 그 예이다. 모더니스트들은 ‘위대한 남성적 절제’, 단순성과 무장식, 생산 노동에의 적응성을 높이 평가했다. 미스 반 데어 로에(Mies van der Rohe)의 ‘적을수록 많다(less is more)’라는 구호는, 그린버그적 환원주의, 즉 회화의 모든 특성은, 더이상 환원될 수 없는 시각적 요소만 남을 때까지 극단적으로 단순화한다는 미학적 교조주의를 예시한다. 그러나 미는 물론이거니와 기술의 국제성이나 보편성조차도 근대성의 신화에 불과하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보드리야르는 [생산의 거울]에서 근대성의 신화에서 생산주의 이데올로기를 본다. 그는 생산과 유혹을 대립시키면서, 유혹을 복잡한 의례나 놀이(장식도 해당)로 본다. 유혹은 생산과 욕망의 논리를 거부하고, 사상과 기호와 매혹의 차원에서 자신의 미적 내기를 추구한다. 유혹은 아무런 근거 없이 그저 기호들의 작용을 즐길 뿐이다. 유혹은 가상으로서 실재의 모든 깊이를 뒤집는다. 이 세계는 변별적인 구조와 대립에 의해서가 아니라, 유혹적인 가역성에 의해 해석되는 것이다. 유혹은 내용 없는 형태를 끝없이 재현하는 망상조직이 된다. 유혹은 축적, 진보, 성장, 생산, 가치, 에너지, 욕망과는 달리 유희와 도전의 공간, 불확정적인 질서이다. 생산은 대상들, 즉 축적되고 명확한 목표를 가지는 실제적인 기호들만 생산하지만, 유혹은 속임수 및 표면이고, 불필요한 과정에 불과하다. 보드리야르에 의하면 부르주아의 시대는 생산과 본능의 시대였다. 생산의 차원에 대립 되는 것은 ‘기호와 의례의 차원’인 유혹의 귀족적인 차원이다. 


[생산의 거울]에 의하면 부르주아 혁명은 귀족적 유혹을 끝장냈다. 유혹은 자연스러운 욕망이나 본능의 해방 및 생산, 리얼리즘의 질서에 도전한다. 보드리야르는 이러한 유혹이 조형예술의 하나로, 욕망의 소박함이나 자연그대로의 상태가 아니라, 기호들의 놀이이고 기교라고 본다. 장식적 유희의 목적은 쾌락을 통해 쾌락의 끝이나 그 너머로 나아가는 데 있으며, 유희의 논리는 현기증 나는 열정이라는 것이다. 바타이유는 [에로티즘의 역사]에서 제한 없는 형태와 기호들의 놀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 진정한 존재, 절대성에 이르려는 욕망이 없다면, 어떤 개인이나 행위이든 그 자체로는 가치가 없으며, 오직 유용성이 있을 뿐이라고 본다. 장식의 거부는 흘러넘치는 것을 질서 있게 정돈하고, 남아돌고 불필요한 것을 혐오하는 간결 절약의 정신이다. 보드리야르는 [유혹에 대하여]에서 의례적 규칙을 사회적 법칙과 대조한다. 그에 의하면 현대의 사회적인 것에는 유혹이 없다. 놀이와 의례성의 세계를 사로잡는 죽음과 유혹의 내기에 비한다면, 현대의 사회성과 그것이 확립하는 의사소통과 교환의 방식은 추상적이고 빈약하다.


4. 모더니즘과 장식


20세기 초의 모더니즘은 순수와 정화를 내세우면서, 세기말의 분위기를 일소하고자 했다. 모더니즘 비평가 로저 프라이(Roger Eliot Fry)는 아르누보를 ‘전세계 스튜디오의 작업장에 퍼져있는 습진’이라고 비난하였다. S.K. 틸야드(S.K.Tiyard)의 [모더니즘의 충격]에 의하면, 비본질적인 호사스러움과 대비되는 순수성의 개념은 모더니스트와 미술공예 운동 양자에서 중심이 되는 이념이었다. 틸야드에 의하면 미술공예의 작가들처럼, 초창기 영국의 모더니스트들은 자연적인 사실의 재현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단순성과 순수형식을 선호하였다. 장식은 당시의 지배적인 회화의 서술성을 벗어나, 리듬과 박자같은 추상적인 패턴을 사용한다. 또한 오웬 존스(Owen Jones)가 [장식의 문법]에서 주장하듯이, 디자인은 자연형식에서 벗어날수록 장식적이 된다. 그에 의하면 디자이너의 모델을 차라리 음악이나 수학이 된다. 장식미술은 단순한 자연모방이 아니라, 구성과 조화라는 추상적 법칙을 통해 고양되는 것이다. 


틸야드는 장식이라는 단어가 미술공예의 용어들 가운데 가장 고무적으로 사용되었다고 지적한다. 모더니즘에 대한 미학적 근간을 마련한 비평가 로저 프라이의 초창기 용어에서, 장식은 단순한 패턴이 아니라, 표현과 정서를 함축한다. 또한 로저 프라이는 형식적인 실험으로서 공예의 가능성을 논하였다. 그는 비잔틴 에나멜의 예를 들면서, 여기에서 색상과 형식의 추상적인 관계, 그리고 순수 디자인의 의미를 배울 수 있다고 하였다. 로저 프라이의 비평적 어휘들인 장식, 총합, 디자인, 리듬, 선, 패턴 등은 근대디자인과 근대미술에 함께 적용될 수 있는 용어였다. 그는 후기 인상주의에 대해, ‘탁월한 장식적 요소들 안에서 미술의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였다고 평가했다. 근대 예술인들이 회화의 장식적 가능성 속에서 성장하였으며, 모더니즘 조각과 관련된 대부분의 작가들이 훈련받은 공예인이었음도 아울러 지적되었다.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의 화려한 패턴, 그리고 서술적 요소보다는 장식적 요소에 집중하였던 고갱(Paul Gauguin)이나, 페르시아 카펫의 직조를 연상케 하는 세잔(Paul Cézanne)의 화면들 및 모네(Claude Monet)의 수련을 그린 그림들을 보면, 모더니스트에게 장식은 단지 형식적인 요소는 아니었고, 그들 자신의 취향과 세계관이 녹아 있는 것이었다. 모더니즘에서 차용된 장식에는 원시주의가 깔려 있다. 고갱은 페르시아, 캄보디아 그리고 이집트 미술을 항상 기억하고자 했다. 그는 그리스 미술은 아무리 아름다워도 중대한 결함을 안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원시주의를 통해 ‘아주 먼 옛날의 야만스러운 호사스러움’을 표현하려 했다. 고갱에 의하면 이 호사스러움을 낳는 것은 비단도, 벨벳도 아마포도 황금도 아니라, 다만 화가의 손길로 풍요로워진 색채일 따름이었다. 고갱은 ‘미술은 이야기가 아니라, 음악의 누이로서 형태와 색채로 살아간다’고 말한다.


고갱은 자기 그림의 음악적 요소가 ‘물결치는 수평선, 노란색과 보라색으로 연결된 주황색과 청색의 조화와 거기에서 파생되는 느낌, 푸르스름한 스파크의 광휘’라고 표현한다. 그는 파랗고 가는 선을 이용한 윤곽처리와 선명한 색채를 스테인드글라스, 법랑세공, 도예에서 차용하여 양식화시켰다. 마티스(Henri Matisse)의 캔버스는 자주색, 야자나무 잎, 무화과 나뭇잎으로 장식된 평면으로 되어있다. 그라비에 지라르(Gravier Girard)는 [마티스]에서, 마티스는 세밀화에서 양탄자에 이르는 이슬람 미술의 다양한 세계를 섭렵하였다. 뒤얽힌 식물 모양과 추상적인 곡선을 이용한 아라베스크 줄무늬는 사실적으로 관찰된 모티브에 국한되었던 답답한 공간과는 전혀 다른 세계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장식적 테두리, 겹쳐지는 무늬가 낙원의 무한성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공간이었다. 앙리 마티스는 자신의 방을 꽃무늬 직물, 벽걸이 장식, 카펫, 튀어나온 격자창을 완비한 동양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극장으로 변화시켰다. 


그의 작품 속의 동양적 장식 커튼과 양탄자의 배열, 화려한 의상은 조형적 긴장을 발생시킨다. 그것은 다양한 요소들의 상호작용에서 야기된, 특수한 그림의 질서가 낳는 긴장이다. ‘나의 계시는 동방으로부터 왔다’고 말한 마티스는, 서구에는 전례가 없는 새로운 장식적 문양을 만들기 위해 아랍적인 장식 선을 사용해 소묘한 뒤, 그 위에 높은 명도와 채도의 색으로 칠하는 기법을 동방으로부터 배웠다. 마티스는 과잉이나 방탕, 사치를 배제하면서, 장식예술이 불러일으키는 생기를 이젤화에 표현하는 방법을 발견했다. 무엇보다도 마티스가 추구하는 것은 ‘표현’이다. 그에 의하면 ‘사람의 얼굴이나 행위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내 그림의 전체적인 배열이 표현적’이다. ‘인물이나 사물이 점하고 있는 면과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빈 공간, 비례 등 이 모든 것이 각각의 역할을 담당한다. 구성이란 화가가 자신의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 다양한 요소들을 장식적인 방법으로 임의로 배열하는 기술이다’(마티스) 


마티스는 하나의 구성을 이루는 모든 부분이 균형에 이를 때까지 작업을 계속한다. 바야흐로 모든 부분이 자기에게 걸 맞는 관계를 찾아내는 순간이 도래한다. 그는 드로잉, 색채, 명암, 구도 같은 그림의 구성요소의 내재적 가치, 수단의 순수성을 존중하고자 하였다. ‘기분 좋은 팔걸이 의자’와 같은 작용을 하는 예술을 추구했던 마티스에게  ‘장식은 예술작품의 본질적인 특성’이 되었다. 마티스는 깔개나 막, 태피스트리같은 장식물을 그림의 모티브로서 자주 사용하였다. 그 외에도 그는 커다란 장식벽화에 몰두했고, 만년에는 자른 종이를 풀로 붙인 그림을 통해 장식과의 친근성을 보여준다. 노르마 부르드(Norma Broude)는 [미술과 페미니즘]에서 마티스가 장식예술을 통해 고급예술의 형식을 창조했다고 평가한다. 평론가나 미술사가들도 마티스의 예술을 ‘단순한 장식’에서 ‘의미 깊은 추상’으로 힘차게 끌어올렸다고 평했다. 


마티스의 절장지 그림은 그린버그에 의해 ‘장식이라기 보다는 진실한 의미에서의 회화’라고 평가되었다. 대상을 원근법 없이 그려내는 마티스지만, 그에게 추상화가들은 대부분 허공에서 출발하는 ‘장식화가’로 비판된다. 추상화가들은 근거와 힘, 영감과 느낌이 없다는 것이다. 마티스는 추상화가들과는 달리 현실과의 관계를 중요시한다. 고갱에 있어 장식은 상징이었다. 알베르 오리에는 상징주의 미술의 특징의 하나를 장식이라고 본다. 오리에(Georges Albert Aurier)는 ‘장식적인 그림은 동시에 주관적이며 종합적이고 상징적이며, 관념적인 예술의 형상화이다. 장식적인 그림이야말로 참다운 그림이다. 그림은 인간이 만든 건축물의 진부한 벽면을 사상, 꿈, 관념으로 장식하기 위해 발명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원시사회에서 최초의 그림은 장식이었다고 하면서, 장식적인 미술은 단순하고 자연발생적이며, 시원적인 미술의 형태로 귀결된다고 본다. 


오리에는 고갱은 천재적인 장식가로 평가한다. 고갱이 자신의 상징주의와 그림의 조건을 일치시키고자 한 것처럼, 근대 디자인에 대해서도 ‘재료’에의 충실을 요구했다. 고갱은 근대의 상징인 에펠탑에 공감하면서 건축 공학자는 자기 고유의 새로운 장식수단을 가지고 있으므로, 철이라는 재료에 적합한 장식의 형식이 준비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세기가 전환될 무렵, 아르누보와 국제적인 미술공예 운동은 추상예술의 출현을 싹트게 했다. 노르마 부르드에 의하면 유겐트 스틸은 ‘장식적’ 미술의 측면에서 추상이론을 전개해 나갔다. 즉 일체의 재현의 요구에서 벗어나 조형요소들 자체의 발전을 유도했다는 것이다.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의 경우, 유겐트 슈틸을 통해 패턴과 면이라는 초기 실험을 재촉하고, 마침내는 절대적인 추상으로 향했다고 지적된다. 칸딘스키는 양복이나 핸드백, 보석, 가구, 자수 벽걸이 디자인 등 여러 장식예술에 몰두한 바 있다. 


노르마 부르드는 마티스의 곡선 리듬 및 평면적인 형태의 장식적 배치가 국제적 미술공예 운동에 참가한 예술가들이 디자인했던 직물, 태피스트리, 자수 벽걸이의 특징과 관련이 있다고 지적한다. 물론 1912년 칸딘스키는 [예술에 있어서의 정신적인 것]에서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서 ‘단순한 장식’을 거부했다; ‘만약 우리들을 자연스럽게 얽어매고 있는 끈을 타파하고, 순수한 색채와 독립된 형태를 순수하게 결합시키는데 몰두한다면, 넥타이라든가 카펫과 닮은 단순한 기하학적 장식작품을 만들어 낼 것이다. 형과 색의 아름다움은 그것만으로 충분한 목적이 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장식은 그것에 반응하여 불러일으키는 정신의 설레임이 약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모더니즘은 장식과 추상과의 기본적인 구별을 지지하였다. ‘단순한 장식을 의미심장한 추상으로 옮겨놓는 것’이 추상화가 칸딘스키의 재능으로 평가되었던 것이다.

 

한편 칸딘스키는 음악과 미술의 유사성에 주목함으로서, 앞서 말한 고갱의 예처럼, 장식미술의 열렬한 지지자들과 같은 경향을 보여준다. 오스카 와일드(Oscar Fingal O'Flahertie Wills Wilde)는 감수성을 기르는 것은 장식미술이라고 하였으며, 세기말의 나비파는 장식미술이야말로 진정한 회화라고 본다. 그들에게 회화란, 인간이 만든 건물의 평범한 벽면을 시와 꿈과 이념에 의해서 장식하기 위해서 생겨난 것이다. 드니(Maurice Denis), 보나르(Pierre Bonnard), 뷔야르 (Jean-Édouard Vuillard) 등이 포함된 나비파의 화가들은 벽면, 천장화, 장식용 못, 판화, 벽걸이, 무대장치, 포스터 작업을 하였다. 1912년 브라크(Georges Braque)와 피카소(Pablo Picasso)가 꼴라주를 시작함으로서, 실재와 재현된 것과의 거리를 없앴다. 입체파 작품은 조형적인 순수성에 기초한다. 입체파로부터 몬드리안(Piet Mondrian)의 신조형주의에 이르기까지의 새로운 조형은 회화적인 것도 장식적인 것도 모두 지양하고자 하였다. 기하적 추상미술은 미술이라는 용어 자체를 지양하면서, 디자인이나 건축 등으로 해소되곤 했다. 서구와 소련의 구성주의가 대표적이다. 


노르마 부르드에 의하면 20세기 주류 미술이 점차 추상화되어감에 따라, 예술가와 비평가는 추상과 ‘다만 장식적인 것’과의 명확한 구분에 몰두하였다. 그것은 고급예술로서의 추상예술이란 위치를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저급예술이란, 요컨대 장식미술품, 혹은 상업예술가나 여성, 농민, 미개인들의 손에 의한 가내 공예품 등이다. 그러나 장식예술이나 장식 충동이 20세기 초기의 주요한 모더니스트 양식을 형성하거나, 그 출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특히 원시미술이나 동양, 회교 미술의 ‘발견’으로 화가들은 그림의 구성적 요소들이 갖는 감각적이고 장식적인 힘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미술의 자기 동일성을 확립하려는 순간에 스며든 타자의 몫이 밝혀지기 시작한 것은 모더니즘 이후의 일이다. 사실 ‘장식은 모더니즘 회화를 괴롭히며 떠나지 않는 유령’(그린버그)이었다. 


그렇다면 모더니즘 회화의 공식 임무는 ‘장식을 장식에 대항해 사용하는 법을 발견하는 것’(그린버그)이다. 피터 웰렌은 [순수주의의 종언]에서 그린버그가 주장한 회화적인 것(the pictorial)과 장식적인 것(the decorative) 사이의 대립은, 기능적인 것(the functional)과 장식품적인 것(the ornamental) 사이의 대립처럼 모더니즘 미학의 기반에 놓여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유사한 일련의 대립 쌍 중의 하나이다. 엔지니어/ 유한계급, 현실원칙/ 쾌락원칙, 생산/ 소비, 능동적/ 수동적, 남성적/ 여성적, 기계/ 신체, 서구/ 동방 등. 이런 대립 쌍들은 정확히 동격인 것은 아니지만, 하나의 계열을 이루면서 서로를 시사하고 있다고 본다. [순수주의의 종언]에 의하면 그린버그는 시각상의 이미지를 회화의 물적 지지대(material support)--이젤화에서는 캔버스, 벽화에서는 벽이 회화의 물적 지지대—속에 용해시킴으로만 장식을 피할 수 있다고 결론짓는다.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는 입체파가 그림을 하나의 장식된 오브제로 변형시켰다고 하면서, 더이상 캔버스에 장식이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장식과 캔버스의 초월적 통일이 이루어짐을 예시한다. 그리하여 장식성은 더 높은 가치의 이름으로 정당성을 얻는다. 모더니스트에게 회화는 과학과 유사한 법칙을 가진다. 그린버그에게 ‘순수성이란 자기규정(self-definition)’을 말한다. ‘목적 없는 합목적성’이라는 칸트의 이념은 ‘기능 없는 기능주의’로 바뀌었다. 그림만이 가지는 독특한 점은 ‘회화적인 것(pictorial)’이며, 그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린버그에게 장식성과 대조되는 회화성(painterliness)란, ’느슨하면서도 빠른 붓놀림, 선명하게 자리 잡은 형상 대신에 얼룩지고 혼융된 양감, 그리고 커다랗고 뚜렷한 율동 감, 분할된 색채, 물감의 불균등한 채도와 밀도, 붓 자국, 나이프 자국, 혹은 손가락의 흔적 등’이다. 


이것이 그린버그가 끊임없이 되물었던 ‘예술의 가치나 특질의 궁극적인 원천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이었다. 나는 화가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의 의견이 추상회화와 장식성의 논란에 대한 잠정적인 답이 될 것으로 믿는다. 베이컨에게 이미지는 가련한 장식의 기능을 벗어나지 못한 추상과 구별된다. 그는 미셸 아셍보(Michel Archimbaud)와의 대담에서, ‘그림을 그리는 재료 자체가 추상물이다. 그런데 회화란 단지 물질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물질과 주체 사이에 벌어지는 갈등과 긴장의 결과이다. 그런데 추상화가들은 이러한 갈등을 처음부터 제거 한다...추상은 근본적으로 회화를 순수하게 장식적인 어떤 것으로 환원하는 듯이 보인다’고 말한다. 이때 베이컨이 지적한 장식성은 실재나 상징과는 분리된 껍데기 같은 패턴을 말하는 듯하다. 베이컨이 보기에 장식적 추상화의 문제점은 ‘매력적이고 예쁘기는 하지만 인간을 변화시키지는 못한다’는 데 있다.

 

5. 포스트모더니즘과 장식


알브레이트 벨머(Albrecht Wellmer)의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변증법]에 의하면, 기능주의의 공리들은 하나의 도덕적, 미학적인 순화와 같은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기능주의의 기술편향은 획일성을 낳았다. 통속적 기능주의는 공학적인 환원주의, 자본과 관료주의적 계획에 복종하는 근대화 과정에 맹목적으로 복종했다. 포스트모던 시대에 비합리주의와 더불어 장식은 부활하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그러한 경향을 기능주의의 황폐함과 시야가 짧은 총체성, 보편성이란 미명 하의 획일성을 거부하는 시도로 본다. 부활한 리듬, 패턴, 그리고 장식적인 예술은 다시금 환경과의 융합을 추구한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보다 많은 파괴와 오염을 가져왔던 근대적인 문화 위생학을 거부하는 것이다. 기계가 근대적 조형의 원형이 되었다면, 전자 미디어는 탈근대적 조형의 원형이 된다. 


전자공학 시대의 생산물들은 산업시대의 생산물과는 달리 밋밋한 표면으로만 가시화된다. CD같은 디지털 방식의 표면은 내용물들을 감쪽같이 숨긴다. 그 비어있는 표면 위에 새로운 장식들이 덧붙여질 수 있다. 움직이는 그림이라고 할 수 있는 영상물이 끝없이 흘러나오는 환경 자체가 장식적이다. 모더니즘에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의 전환은 기술의 포기가 아니라, 기술의 심화일 수도 있다. 즉 기술의 발전이 근대적 획일성을 다양성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복잡한 것도 패턴을 분석해 보면, 고도로 질서 잡힌 것임이 현대 과학 이론에서 주장되고 있다. 예컨대 프랙털 기하학은 장식예술의 다양한 형식들을 예시한다. 만델브로트(Benoît Mandelbrot)가 1975년에 주장한 프랙털 이론은, 해안선이나 구릉 등 자연계의 복잡하고 불규칙적인 현상들을 아무리 확대하더라도 다소 전체와 같은 불규칙적인 모양이 나타나는 자기 상사성을 가지고 있다는 가설이다. 


레비 스트로스(Claude Levi-Strauss)는 [미학 에세이]에서 장식은 전체적인 조화로부터 임의로 떨어져 나간 세부의 해체와 대치에 의해서, 직관보다는 지적인 표상에 의해서 작업이 진행된다. 레비 스트로스는 춤을 보조하는 음악은 오브제의 장식과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반복되는 구나 절, 되풀이되는 모티브 등과 같은 간단한 요소들의 혼합이나 반복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것은 공허한 것(내용이 없기에)이기도 하지만, 장식의 본래적 기능, 즉 공허함을 메꾼다. 장식에 대한 레비 스트로스의 생각은 공간 공포증의 해소를 위해 장식이 생겨났다는 심리학적 가설을 떠오르게 한다. 의상의 아름다움을 만드는 장식적인 리듬, 즉 규칙적인 순환은 무용의 리듬이나 기술적 활동의 전개에서 반복적인 행위의 리듬, 운동의 규칙적인 리듬과 동일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 장식은 무엇보다도 기능과 필요보다는 욕망과 감성이 소비를 주도하는 대중문화에서 부각된다. 


아브라함 몰르(Abraham Moles)는 [키치란 무엇인가]에서 대중문화의 사물(대부분 키치)은 넘쳐흐르는 장식으로 우리의 기분을 전환 시켜준다고 본다. 그에 의하면 사회가 풍요로워지면 욕구보다도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수단이 많아지고, 그 결과 장식이나 부록과 같은 무상행위가 나타난다. 그에 의하면 키치적 사물의 표면은 항상 다양한 형태와 문양으로 가득 차 있다. 키치를 지배하는 것은 이리저리 짜 맞추고 배열하는 유희이며, 그 결과가 장식이다. 키치가 소재를 원상태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는 드물다. 나무에는 대리석 모양이 칠해지고 플라스틱 표면에는 자연소재의 무늬가 덧붙여지는 등 재료의 눈속임이 만연한다. 유선형의 유행에서 보여지듯 기능주의조차도 장식화 된다. 쏟아져 나오는 희한한 상품들은 어디서부터 여분의 것(장식)이고, 어디서부터 필요(기능)인지 점점 더 불확실해진다. 하위문화에서의 장식문화는 더욱 다채롭다. 


더글러스 러시코프(Douglas Rushkoff)의 [카오스의 아이들]에 의하면, 청년 하위문화에서 나타나는 신체장식들은 고도로 위계화 된 체계에서 낙오된 사람들이 풍속이다. 이들이 즐겨 하는 문신이나 피어싱은 육체의 표면적을 넓히는 효과를 지닌다. 인간의 육체는 옮기고 떼어내고 늘려서 의도하는 새로운 모양을 가질 수 있다. 피부는 예술을 위한 캔버스가 되는 것이다. 하위문화는 70년대 말의 펑크스타일처럼 일부러 무질서하게 서로 어울리지 않는 요소들을 한데 모아놓기도 하고, 성적 소수자들의 이상야릇한 패션 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눈에 띄는 화려함이 특징적인 하위문화의 장식은 이종교배의 미학을 보여준다. 피터 웰렌은 바타이유의 논지를 빌어 하위문화의 장식이, 저항의 기표로서 아래로부터의 현란한 과시라고 해석한다. 포스트 모더니즘에서 장식의 재등장은 모더니즘이 쇠퇴하는 증후라고 할 수 있다. 모더니즘에서 억압된 장식은 부활한다. 


피터 웰렌에 의하면 모더니즘을 구성하는 여러 대립 항들, 즉 기능/ 장식, 유용/ 무용, 자연/ 인공, 기계/ 신체, 남성/ 여성, 서구/ 동방의 대립 항들의 얽힘을 풀어내는 해체 작업이 이루어진다. 그는 해체가 항상 부정적인 것으로 여겨진 타자, 즉 그동안 보완적 가치만을 인정받았던 장식적이고 무용하고, 쾌락적이고, 여성적이고 동방적인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타자적 예술은 혼성적이고 모순적인 성격을 가진다. 타자의 부활이라는 포스트모던적 주제에서 페미니즘은 대표적인 담론이다. 노르마 부르드는 [미술과 페미니즘]에서 장식을 20세기 미술의 하층으로 쫒아낸 섹시스트의 편견을 페미니즘의 입장에서 고발한다. 장식을 취하는 페미니스트들은 섹시즘이 제기한 현대미술에서의 장식과 추상 사이의 인위적인 벽을 부수고자 한다. 신비적이고 자기 언급적 의미를 부여함으로서, 장식을 추상의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장식이 예술로서 존재하는 권리를 계속 부정하는 형식주의의 주류 담론에 대항하여, 페미니스트 예술은 장식을 그 자체로 옹호한다. 노르마 부르드는 ‘여러가지 소재로부터 긁어모은’ 미리엄 샤피로(Miriam Schapiro)의 휘메지(Femmage)의 예를 들면서, 그녀의 작품이 이미 몇 세기 동안 이루어졌던 여성의 전통적인 수공예 예술을 이용하였다고 한다. 노르마 부르드에 의하면 미리엄 샤피로는 마티스나 칸딘스키와는 달리, 소재가 원래 가지고 있는 본래의 특질을 없애거나 변용시키지 않았다.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는 여성 예술가들과의 공동작업과 합작 등, 원천을 있는 그대로 제시하는 긍정적인 정신이야말로 샤피로의 페미니스트 아트를 특징짓는다고 해석한다. 차라리 페미니스트 아트는 장식과 조형의 위계적 이분법을 벗어나서, ‘단순한 장식’으로 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하고자 한다.

  

6. 결론을 대신하여; 장 보드리야르의 가상에 의한 유혹의 전략으로서의 장식


가상과 실재라는 이분법은 장식을 부차적인 것으로 만들어왔다. 그러나 이제는 정보화 사회가 추동하는 전면적인 코드화에 의해 실재가 소멸되어 가는 시대의 미술과 장식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한다.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시뮬라시옹]에서 그러한 변화를 암울하게 분석한 바 있다. 또한 그의 다른 책 [유혹에 대하여]는 장식에 새로운 빛을 던져준다. 그 책은 이성으로 무장된 전투적인 페미니스트의 심기를 긁으면서, 새로운(?) 페미니즘을 제시한 책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이 책에서 여성의 고유한 전략은 유혹이라고 단언한다. 여성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 생산되지 않은 존재, 표면의 깊이가 불분명한 존재로 그녀의 유혹은 상징적인 세계의 지배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여성은 욕망이나 본능이 아니라, 인위적인 기교와 의례의 초상으로, 유혹을 대변하고 있다. 이 위대한 유혹자들은 기호와 이미지의 반짝이는 망으로 우리의 감각 세계를 공략한다. 


이러한 가상의 순수한 유희 속에서, 순식간에 의미와 권력의 모든 체계가 무너진다. 보드리야르에 의하면 오늘날 모든 실재는 죽은 물질, 죽은 육체, 죽은 언어가 저장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존재를 존재에 대항하거나 진리를 진리에 맞서게 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장식과 전략의 연결이 중요하다. 그에 의하면 현실과 현실의 복제 사이의 거리, 즉 같은 것과 다른 것 사이의 차이가 사라지기 때문에, 재현은 불가능하고 가상에 의한 유혹만이 남는다. 이러한 유혹에는 어떤 전략을 지배하는 주체나 대상도 없고, 내적인 것이나 외적인 것도 없으며, 자연과 문화의 구별도 사라졌다. 모든 심급과 본질은 소멸되었기에, 인위적인 기호의 완전함만 남는다는 논리이다. 장식은 유혹적이다. 보드리야르에 의하면 장식은 유혹처럼, 의례화 된 가상에 따르는 기호의 순수함, 순수한 가상의 지배이다. 시뮬레이션의 시대에, 가상의 위상은 유례없이 높아진다. 따라서 가상의 상징인 장식의 위상 또한 높아진다.   

  



출전; 2019 청주공예비엔날레 세미나 강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