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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도 있었다: 한국 현대미술사를 만든 여성들/ 현대미술포럼

sosoart 2020. 3. 19. 22:31

http://www.daljin.com/?WS=33&BC=cv&CNO=388&DNO=17699

[연재를 시작하며] 그들도 있었다: 한국 현대미술사를 만든 여성들

현대미술포럼

그들도 있었다: 한국 현대미술사를 만든 여성들” 연재를 시작하며

현대미술포럼

한국미술평론가협회에서 기획, 출판한 『한국현대미술가 100인』(사문난적, 2009)에는 여성 작가가 12명밖에 수록되어 있지 않다. 여성 작가의 수가 이렇게 희박한 것은 여성의 예술적 재능이 부족해서일까? 이번 달부터 월 2회 게재될 본 연재기사는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이 될 것이다. 

기사 제목처럼, 한국 현대미술사에 여성도 상당히 많이 ‘있었다’는 사실을 환기함으로써 미술사에서 여성이 배제된 경위를 생물학적 차이가 아닌 사회, 역사적 맥락에서 밝히고자 하는 것이 본 기획의 의도다. 본 지면에서는 작가자신의 여성주의 의식의 유무와는 관계없이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거나 차지해야할 작가들을 다루게 될 것이며 시기적으로는 근대기부터 1990년대 말까지로 한정하였다. 2000년대에는 여성작가들이 자유롭게 활동하게 되었으며 또한 수적으로도 남성작가에게 뒤지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현대미술사에서 여성의 자리를 찾아주는 일의 작은 시작이 될 이 글들이 미술사를 보는 보다 공정한 시각을 견인하는 촉매제가 되기를 기대한다.







현대미술포럼 소개

현대미술포럼은 현대미술사를 연구하는 여성 연구자들로 이루어진 모임이다. 『모더니즘 이후, 미술의 화두』 등 번역서 4권과 『한국 현대미술 읽기』 등 공저 5권을 출판하였다.




http://www.daljin.com/?WS=33&BC=cv&CNO=388&DNO=17726

현대미술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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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통을 거스르는 특유의 서정성, 박래현의 회화 | 김효정

현대미술포럼








전통을 거스르는 특유의 서정성, 박래현의 회화
   

시골 고향(鄕)에 비(雨)를 내려 씨앗이 잘 자라도록 하고 열매를 거두어 드리라. 박래현(1920∼1976)의 아호가 담고 있는 비, 하늘에서 땅으로 오직 한 방향으로 내리는 비는 끊임없이 한 길로 향했던 그의 예술 행적과 닮아있다. 1920년 4월, 평안남도 농가에서 지주의 맏딸로 태어난 박래현은 어렸을 때부터 무엇을 선택함에 있어 주저함이 없었다. 고등보통학교 재학시절 전선(全鮮; 일제 강점기 시대의 조선을 이르던 말) 여자 올림픽에 출전하여 은메달을 딴 일, 졸업 후 나이팅게일의 생애를 읽은 후 의사가 되고 싶어 누구와의 상의도 없이 동경제국여의전에 원서를 제출했다가 자신에게 주사공포증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포기하게 된 사실 등은 그의 진취성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1943년 박래현은 당시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여러 번 특선을 수상하며 중견작가로 자리를 굳히던 운보 김기창과 만났고 3년 뒤인 1946년 결혼한다. 이들의 결혼은 김기창의 표현대로 “귀먹고 가난하고 학벌도 없는 나와 지주의 맏딸로 최고학부를 나온 당신”의 결합이었고, 그 해 한국 화단에 큰 사건으로 기록된다. 겉으로 보기에 상반되는 두 남녀의 결혼이 당시 큰 이슈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박래현에게 이 선택은 평생의 반려자로 인해 자신의 예술인생이 지속될 것이라는 사실을 감지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1) 

결혼 1년 뒤인 1947년, 《김기창·박래현 부부전》을 시작으로 박래현의 작품 발표는 공모전 출품이나 그룹 초대전을 제외하고는 주로 부부전이라는 형식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이들은 우향이 병세로 갑작스레 죽기 전까지 총 14회의 부부전을 가졌는데, 작품의 수나 전시의 형식면에서 운보가 우위에 있음을 거론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여 진다. 대략 2년에 한 번씩 열린 이 전시에서 우향과 운보는 서로 선의의 경쟁자이자 예술적 동반자였기 때문이다.


분절된 선, 입체적인 선
동양화에서 일획은 마치 정론처럼 여겨져 왔다. 한 획을 긋기 전에 마음속의 운미가 모두 드러나고 한 획 한 획 그려내는 것으로 만물을 낳는다는 중국 청초 시기 화가이자 이론가였던 석도는 일획론으로서 하나의 선에 작가의 정신을 함축하여 담아낼 것을 주장한다. 2) 동양화에서 의미 없는 선은 없으며 모든 선은 세계와 인상에 대한 완전한 이해를 담는 창조적인 기초이기에 작가의 존재는 그 선을 통해 확인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박래현이 선을 다루는 방식은 이와 다르다. 1955년작 <자매>는 색동저고리를 입고 복주머니를 매단 한국 소녀들을 묘사한 작품인데, 여기서 그가 다룬 선들은 석도의 일획론과는 거리가 있다. 먹선의 시작과 끝의 굵기가 중간 중간 울퉁불퉁한 것으로 우향이 이를 한 번에 긋지 않았음을, 그럴 의도가 없었음을 알게 된다. 또한 전통적인 동양화에서 먹선은 사물이나 인물의 외곽선으로 쓰이지만 이 작품에서는 한복의 주름을 묘사하는 데 주로 할애되고 있다. 대신 분절되고 중첩된 먹선과 함께 채색 또한 여러 번의 짧은 선의 합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1955년은 우향에게 중요한 해였다. 1950년 6·25 전쟁 때 가족 모두 군산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고, 1955년 다시 서울로 돌아오기 전까지 박래현은 기존에 해왔던 사실적인 묘사에서 벗어나 입체적인 표현을 모색했다.     

“형태와 색채의 융합을 생각하게 되고 색의 변화가 이룩하는 고유한 형태의 화면 통일에 신경을 쓰게 되며 때로 특유한 선이 암시하는 입체성을 생각하게 되었다”
박래현, 「동양화의 추상화」, 『사상계』, 1965. 12.

<자매>에 나타난 선에서는 작가의 정신, 만물의 모습을 함축한 유일무이한 육중함을 느낄 수 없다. 대신 화면 구성의 한 요소로서 채색의 선과 동일선상에 놓여 그 거대한 무게를 나눠 갖고 있다. 막중한 위치에서 벗어난 필선은 작가가 위에서 직접 언급했듯이 ‘때로는 특유한 선’이 되어 ‘입체성’을 나타내는 결과를 가져온다. 작품을 자세히 보면, 단순하고 평범한 두 소녀의 모습이지만 언니의 살색과 저고리의 색이 같아 구분이 되지 않고 동생의 치마 또한 어디가 시작이고 끝인지 알 수 없게 표현되어있다. 인물의 형상을 마무리 짓는 데서 탈피한 먹선은 고정된 위치에서 벗어남으로써 그림의 입체감을 부여한 것이다. 물론 그가 직접 언급한 ‘입체적’이라는 표현 때문에 1950년대 중반부터 한국 화단에 수용된 큐비즘의 영향을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수없이 짧은 선으로 대상의 존재를 조금씩 보듬어 가는 박래현의 감성은 여러 각도에서 본 대상을 ‘분석적’으로 접근하여 평면에 재구성하는 큐비즘과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인다.      


작품의 주제보다 화면의 구성과 재료에 몰두하다
박래현은 군산 피난시절 동양화의 새로운 조형적 가능성을 실험했고, 이는 전통 동양화에서 보기 힘들었던 감각적인 구성미로 구현되었다. 《대한미협전》에서 최고상인 대통령상을 수상한 그의 대표작 <이른 아침>(1956)은 구성미의 정수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장날을 맞아 이른 아침부터 시장에 내다 팔 것들과 어린 아이들을 이끌고 가는 여인네들의 행렬을 차분하게 담아내고 있는데, 처음 우리의 시선을 끄는 인물들은 동요하지 않는 어미들의 묵묵한 시선과 대비되는 두 아이다. 엄마의 손에 팔을 잡힌 채 이탈을 제지당하는 큰 아이와 고개가 젖힌 줄도 모르고 잠에 흠뻑 빠진 채 등에 업힌 작은 아이의 머리 방향은 화면의 정 가운데에서 사선으로 떨어지며 아낙네들의 조용한 행렬에 긴장감을 준다. 이에 더해 세 번째로 가고 있는 여인의 큰 과일 바구니에서 삐져나온 꽃가지도 아이들과 같은 각도로 떨어진다.    

1960년대 한국 화단에는 앵포르멜 경향의 작품들이 나타났다. 비정형이라는 뜻의 앵포르멜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아카데믹한 기하학적 추상에 반발하여 나타난 것으로 추상의 서정적인 측면을 강조했고 두터운 유화물감의 질감을 살려 표현했다. 1959년, 박래현 역시 자신의 화면이 점점 추상화되는 것을 경험하고 있었다. 뚜렷한 형태가 사라질수록 화면 전체의 구성과 이미지의 분위기에 더 집중하게 되었고, 새로운 조형적 요소를 탄생시키며 작가로서의 희열을 느꼈던 것 같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우향이 앵포르멜 경향을 받아들이면서도 동양화가 갖는 재료적 특수성을 더해 독자적이고 서정적인 화면을 구축해 나갔다는 사실이다.     

1960년대 중후반 박래현의 작품에서는 추상적이고 선명한 색면들과 함께 기다란 띠들이 등장한다. 이것은 맷방석의 엮음을 연상시키기도 하고 줄줄이 꿴 엽전 같기도 하며 현미경을 통해 본 세포들처럼 보이기도 한다. ‘엽전 시리즈’라고 불리는 이 작품들 중 1967년작 <작품 19>를 보면 우향이 아교를 쓰는 방식, 긴 띠 안에 무수한 가는 선들을 새기는 방식을 통해 화면의 추상화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먼저 아교물은 동양화의 물감인 분채나 석채를 쓸 때 이를 화선지에 접착시켜주는 역할을 하는 재료이다. 아교를 물에 희석시킬 때 그 비율을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색이 종이에 스며드는 효과가 달라지는데, 이를 이용해 그림을 메우고 있는 긴 띠들의 외곽이 마치 불에 그을린 종이의 끝처럼 표현했다. 마지막으로 긴 띠를 보면 붓의 큰 움직임이 주는 효과에만 기대지 않고 그 안에 세필로 하나씩 선들을 새기고 번지게 하여 작품의 완성도를 높였다. 결론적으로 우향은 동시대 퍼져있던 앵포르멜 경향을 흡수해 화면의 추상화를 이끌어 내었지만 철저히 자신의 방식으로, 동양화의 매체적 특성을 살리는 방식으로 방향을 잡았던 것이다. 


박래현의 창작열은 쉰이 가까운 나이에도 현재 진행형이었다. 우향은 운보와 함께 1964년부터 1967년까지 미국과 유럽, 중동지역과 남미, 멕시코 등지를 여행했고 그 이후 뉴욕에 남아 7년여 기간의 유학생활을 갖는다. 현대 미술의 중심지였던 뉴욕에서 그가 선택한 매체는 판화였다. 왜 판화였을까? 이 시기 작품들을 조형적으로 분석하는 것 대신, 그가 판화를 선택한 이유를 유추하면서 박래현의 예술인생을 소급해 보는 것으로 이 글을 끝맺고 싶다.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박래현은 청각장애가 있는 예술가를 남편으로 맞아들였다. 때문에 남편이 할 수 없는 일상의 잡무들이 주변에 늘 쌓여 있었고 그가 “붓을 들 수 있다는 것은 모든 일이 민속하게 정리된 후가 아니면 안정이 될 수 없는 일”(「남편시중기」, 『여원』, 1962. 11.)이었다. 듣지 못하는 배우자를 위해 항상 소리로 가득 찬 편에 서는 일, 그것이 박래현의 일상이었던 것이다. 

짐작하건데 박래현에게 예술은 시끄러운 세상 속 도피처, 혹은 그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힘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엽전 시리즈 회화의 긴 띠 속 무수한 선들을 하나씩 그으며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를 찾았기에 작업실 안에서 만큼은 평온한 마음으로 예술 속으로 침잠해 들어갔을 것이다. 또한 판화라는 매체는 회화와는 다르게 직접 작가가 손으로 그 물질성을 느낄 수 있고 그의 장기인 세밀한 터치가 물질에 그대로 드러나는 결과를 즉각적으로 보임에 따라 그 작업 과정은 우향에게 더없는 기쁨을 줬을 것으로 생각된다. 유학, 결혼, 출산, 여행, 또 다시 유학, 박래현의 일생에서 했던 모든 선택은 예술로 향하는 것이었다. 예술이 소멸되지 않는 길을 가는 것이 자신을 잃지 않는 것이었다. 



김효정(1983∼), 이화여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 현재 독립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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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로서는 다소 충격적인 박래현의 결혼 전 서약이 그 증거이다. “첫째 우리가 같이 살아가다가 헤어질 경우 서로 친구로 우정을 계속해 줘야 해요” “둘째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예술에 대해 간섭치 않고 계속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야 할 것” “셋째는 서로 인격과 예술을 존중할 것”, 김기창, 「나의 아내 박래현」, 『여성중앙』, 1976. 3.

2)  저우스펀, 『석도』, 서은숙 역, 창해, 2006.



박래현, <자매>, 1955, 종이에 수묵담채, 72.5×57cm, 개인소장



박래현, <이른 아침>, 1956, 종이에 수묵채색, 238×179cm, 개인소장



박래현, <작품19>, 1967, 종이에 채색, 121.2×104.2cm, 개인소장




(2) 윤영자의 생명주의 조각, 그 모성적 근원 | 윤난지

현대미술포럼





http://www.daljin.com/?WS=33&BC=cv&CNO=388&DNO=17771


윤영자의 생명주의 조각, 그 모성적 근원



한국미술의 현대화 과정 초기에 미술사에 남은 여성미술가들 중에는 남성과 동등한 조형어휘를 구사하고 동등한 사회적 인정을 얻음으로써 자기실현에 이른 선구자적 작가상에 상응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여성주의가 동의의 지평을 확보한 현 상황보다 훨씬 어려운 조건에서 작업해야 했으므로, 전위의식이라는 문자 그대로 앞서서 투쟁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을 통감하고 이를 실행에 옮긴 작가들이다. 한국 현대조각의 기수의 대열에서 빠지지 않는 윤영자(1924∼2016)가 그 대표적인 예로, 그는 여성이라는 조건을 뛰어 넘고자 한 초기 여성 모더니스트의 한 전형이다. 그는 당대 보편적인 조형어휘로 정착되어 간 모더니즘 조각의 형식을 공유하면서 자신의 독자적 영역을 구축하여 한국 현대조각의 리더의 위치에 서게 되었다.


윤영자가 작가로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우리 미술사가 이 땅에서 교육받은 미술가들로 구성되기 시작한 1950년대 중엽이었다. 주로 토쿄 유학생들이 주도해 온 우리 미술의 현대화 과정이 이 시기에 이르자 순 한국산 미술가들에게 넘겨진다. 해방을 기점으로 신설된 미술대학들을 통해 배출된 소위 ‘전후 세대’가 6ㆍ25 전흔의 복구기였던 1950년대 중엽부터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된 것이다. 홍익대학교 미술학부가 창설된 1949년에 동 대학교에 입학한 윤영자도 그 중 한 사람으로, 여성으로서는 매우 드문 경우였다.


1950년대는 우리 사회가 전반적으로 현대화를 지향하는 시기였으나 여성의 사회적 조건은 근대 이전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그것은 현대화 담론 자체가 근본적으로 여성을 배제한 담론이었음을 드러내는데, 미술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다. 특히 근육적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장르이자 그 표상인 조각은 남성의 미술로 성별화되었으며, 따라서 조각의 현대화 과정은 다른 어느 영역의 그것보다도 여성을 소외시켜 온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정황에서 한 여성작가가 조각을 전공하였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주목받을 만한데, 윤영자는 더하여 당대의 새로운 조형언어를 과감하고 진지하게 실험하였다.


성차별적 구조를 넘어서는 윤영자의 투철한 작가의식은 형식과 재료 뿐 아니라 작업의 양과 폭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그의 작업은 고전주의, 사실주의, 생명주의, 순수추상 등 다양한 양식과 석고, 시멘트, 브론즈, 스테인레스 스틸, 석재 등 각종 재료들을 아우르며 작품의 종류도 소품으로부터 거대한 기념물에 이르기까지 넓은 스펙트럼을 이룬다.


윤영자가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것은 대학교를 졸업한 1955년경으로, 초기 작업은 고전주의에서 사실주의에 이르는 조각의 전통을 충실하게 계승한 것이었다. 인체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여인상>(1955)이나 부르델의 헤라클레스를 연상시키는 <하늘을 찌르는 사나이>(1956)가 그 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사실적인 재현에 머무르지 않고 단순화된 곡선형 매스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기다림>(1959)이 그 예로, 이를 통해 그가 표면의 세부를 정리함으로써 내부로부터 용솟음치는 힘의 강도와 방향 그 자체를 드러내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인체나 생명체의 외관을 묘사하기보다 그 내부에 함축된 생명력을 표출하고자 한 ‘생명주의(biomorphism)’ 조각의 조류에 동화되어간 것이며, 1960년대 중엽부터는 완전한 추상조각 또한 실험하게 된다. 이와 같은 과정은 새로운 자극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그의 실험정신을 확인하게 한다. 서구의 다양한 경향들을 단기간에 압축적으로 수용한 당대 한국미술의 일반적인 정황에서 윤영자도 예외가 아니었으며 따라서 그러한 제3세계적 조건이 만들어낸 독특한 전위정신을 공유하였던 것이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 헨리 무어나 장 아르프가 주도한 생명주의 조각은 동시대에 공존한 기하추상 조각과는 다른 경로로 조각의 추상화(抽象化)를 이끌었다. 기하추상 조각이 형태에 대한 논리적인 분석을 통해 전통과의 단절을 시도한 예라면 생명주의 조각은 주관적인 감정이입을 통해 형태를 변형시킴으로써 전통을 새로운 국면으로 계승한 예다. 무기물인 돌이나 흙에 생명을 부여한다는 생명주의 원리는 조각가의 작업을 조물주의 창조에 비유하여 온 조각의 오랜 전통을 이끌어온 원리인데, 현대의 생명주의자들은 보다 축약된 양식으로 이를 구사하였던 것이다. 즉 그들은 유기적 형태의 단순화와 변형을 통해 생명현상 그 자체를 시각화하고자 하였다.


한국의 현대조각가들은 기하추상 조각보다는 생명주의 조각에 더 이끌렸는데, 그것은 아마도 조각을 살아 있는 유기체로 보는 생명주의 예술관이 예술행위를 자연의 일부로 보는 동양의 전통 예술관에 상응했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윤영자 또한 실험기의 과감한 도전 이후 생명주의라는 자신의 길을 발견한 후부터는 여타 경향들에 휩쓸리지 않고 그 길을 고수하였다. 이런 점에서 그를 한국의 대표적인 생명주의 조각가로 지칭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추상조각을 실험한 이후에도 그의 작업 목록은 단순화된 인체 형상에서 완전히 추상화된 형상에 이르기까지 유연성을 보인다. 그는 구상과 추상 중 어느 한 진영에 헌신해야 한다는 모더니즘의 순수주의 강령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입장을 견지했던 것이다. 즉 조각의 현대화에 동참하면서도 다양한 양식에 대하여 열린 태도를 보여주었던 것인데, 이는 그의 작업이 남성적 배제의 논리가 아닌 여성적 포용의 원리에 근거하여 이루어졌음을 드러낸다.


윤영자의 작업은 그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대강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즉 단순화된 윤곽선의 여체 또는 모자상, 알 같은 형상을 품고 있는 익명의 생명체, 그리고 율동적 움직임의 일루전을 내포한 추상형상 등인데, 이들은 결국 ‘모성’이라는 주제로 수렴된다. 그의 작업에는 여성으로서의 주체의식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남성 작가들 또한 모성 주제를 다루는 경우가 빈번하지만 이는 당연히 여성의 경우와는 다른 태도에 근거한 것이다. 스스로가 어머니 혹은 잠재적 어머니인 여성 작가에게 있어 모성을 다루는 시선은 자신을 향하게 되고 따라서 이에 근거한 작품은 자서전적인 것이 된다. 심지어 그 형상이 남성을 포함한 타자의 시선을 재생산한 것이라고 해도 그 시선에서 자기반영적 의미는 배제할 수 없다. 또한, 그 시선은 몸을 통한 경험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촉각과 긴밀하게 짜여 있다. 윤영자의 작품은, 외견상 여타 생명주의 조각과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이같이 지극히 주관적이고 또한 신체적인 차원에서 경험한 생명현상의 표상이라는 의미를 또한 함축한다.


생명현상이라는 보이지 않는 힘을 시각화하기 위해 윤영자가 기용한 형식은 ‘정과 동의 변증법’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세포가 분열하여 두 개의 개체로 정착되고 그것들이 또 다시 분열하여 또 다른 힘의 균형점에 이르는 것과 같은 탄생과 성장의 과정은 끊임없이 유동하는 힘과 그 힘을 구체화하는 정적인 물질 간의 상호작용 속에서 이루어진다. 움직이는 힘은 정착할 물질을 요구하고 불활성의 물질은 역동적인 에너지를 통해 되살아난다. 윤영자의 작품은 바로 이러한 변증법적 과정을 조형언어로 옮겨 놓은 것이다. 꽉 찬 덩어리와 텅 빈 공간들, 수직적 견고함과 수평적 유동성, 매끄러운 윤곽선과 거친 표면, 전체 구성을 제어하는 탄탄한 구조와 그것을 뚫고 불거져 나오는 곡선형의 매스 등이 팽팽한 긴장의 절정에서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베르그송이 말한 ‘생의 약동(élan vital)’의 시각적 구현에 다름 아니다.


윤영자의 작업에서 이러한 생명의 에너지를 가시화하는 태도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재료에 충실하기(truth to material)’다. 타틀린같은 구축주의자(Constructivist)가 물질 그 자체의 본성을 강조하기 위해 외친 지극히 유물론적인 이 구호가 윤영자에게는 물질에 깃든 생명력을 찾아내는 길이 되었다. 윤영자는 각종 재료들을 그 물성에 가장 적합한 형태를 위해 사용함으로써 그것이 함축한 생명의 힘을 구현하고자 하였다. 예컨대, 곡선형의 매스에는 부드러운 대리석을, 즉흥적인 얼룩을 위해서는 브론즈의 부식된 색채를, 날카로운 윤곽처리를 위해서는 스테인레스 스틸을 사용하였다. 그는 또한 대리석의 결을 이용해서 볼륨감을 강조하거나 흐르는 율동감을 나타내기도 하고 금속의 반사표면으로 형태가 공간으로 확산되는 효과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물질이 조각의 재료가 되는 순간 살아 있는 생명체로 환생하게 하는 것, 그것이 그의 예술적 목표였다.


이같이 재료의 물질적 본성에서 생명력을 이끌어내는 태도 또한 생명에 대한 모성적 경험, 즉 신체적이고 따라서 매우 구체적인 경험과 관련지을 수 있다. 일반적인 생명주의 조각이 생명력을 단지 ‘재현하는’ 조각이라면, 이 여성작가의 조각은 작가자신의 신체적 경험의 등가물이라는 매우 주관적인 의미를 함축한다. 그것은 모성적 숨결을 불어 넣은 작가의 자식인 셈이다. 이렇게 객관적 대상인 동시에 주체의 경험인 윤영자의 조각은 타자와 자아가 하나가 되는 모성성의 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이상에서와 같이, 윤영자는 구체적 내러티브나 사회적 메시지보다 형태의 미학을 우선시해 온 탐미주의자이자 그런 신념을 일생 지켜온 전형적 모더니스트였다. 이런 점에서 그는 한국 현대미술사의 초기 모더니스트 조각가 반열에 자리매김 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미술이 진공의 작업실이 아닌 공적 소통의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사회적 활동임을 의식하고 그 제도 공간을 바로 잡고자 한 여성 미술인이었다. 그는 고등학교 교사와 대학교수를 합쳐 30여년을 미술 교육계에 봉직했고 퇴임 후에는 석주미술상을 제정하여 여성 작가들의 활동을 지원했다. 그는 예술의 사회적 조건을 이론적인 비판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시행착오로 열린 실천을 통해서 넘어서고자 한 몇 안 되는 미술인 중 하나다. ‘순수한’ 작업과 그 작업에 교차하는 ‘불순한’ 맥락들, 중성적인(실은 남성적인) 형식주의 모더니스트의 얼굴과 사회적 불평등 구조를 체감해 온 한 여성작가의 얼굴, 그 사이에 조각가 윤영자의 진정한 정체가 있다.


윤난지(1953∼), 이화여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박사, 이화여대 교수(∼2019), 현재 현대미술포럼 대표



윤영자, <기다림>, 1959, 화강석, 70×42×32cm




윤영자, <율(律)>, 1979, 대리석, 79×42×18cm




윤영자, <애(愛)>, 1988, 브론즈, 95×30×22cm





(3) 원문자의 ‘부드러운 욕망’ 들여다보기 | 김현숙

현대미술포럼





http://www.daljin.com/?WS=33&BC=cv&CNO=388&DNO=17797


원문자의 ‘부드러운 욕망’ 들여다보기 1)
                         
“여성성의 힘과 발현은 발견되는 것이기 보다 내재되어 있다”고 말하는 원문자(1944∼)에게 여성성이란 투쟁이나 혁신을 통해 획득되어지는 차원이 아니라 ‘휴머니튜드’로서의 포용과 조화의 영역에 해당한다. 자신의 작품 속에 여성성이 내재되어 있음을 부정하지 않았음에도 현재까지 원문자 작품에 대한 여성주의적 해석을 발견하기 어려운 것은 작가 스스로 적극적이고 전략적인 여성주의와 거리를 두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은 원문자 작업 전체를 관통하는 특성으로 여성적 감수성에 주목하였으며, 1970년대 한국 단색화와 동일 계열로 파악되었던 종이부조 작업을 여성주의적 시각으로 재검토하였다. 특히 2004년에 제작된 <부드러운 욕망> 시리즈에 주목한 것은 이 작품들이 《부드러운 욕망》전을 위해 제작된 일시적 경향에 불과할지라도,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내면 깊숙한 곳에 감추어진 욕망이 작가의 자기 검열 레이더망을 빠져나와 과감하게 드러날 수 있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화조화로 드러난 여성적 터치와 감수성
원문자는 1944년 부천에서 출생하여 1966년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를, 1968년에 동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하였다. 학부시절에 이화문화상 장려상(1964)과 제3회 신인예술상(1964)을 수상하면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국회의장상(1970), 대통령상(1976)을 수상하는 등 일찍부터 실력을 인정받았다. 작가로서의 데뷔와 성공이 화조화를 통해 이루어졌는데, 산수화가 자신과 맞지 않았기 때문에 화조를 그렸다는 작가의 언술을 통해서 수묵화보다 화려하고 장식적인 채색화 쪽에 더 친숙감을 느꼈음을 알 수 있다. 이상범, 변관식, 허백련, 노수현 등 수묵산수화가 화랑가에서 큰 인기를 끌고 서세옥, 신영상, 안동숙 등에 의해 서구의 앵포르멜과 미니멀 아트를 수용한 수묵추상 작업이 크게 유행하던 시기에 화조화에 주력한 것은 시류보다 자신의 기질을 따르는 태도를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산수화가 조선시대의 유교적 가치관을 가장 첨예하게 응축시킨 화목이라면 화조화는 민화, 이불, 배갯모, 가구 장식 등 일상생활 속에 존재하고 장식적, 기복적 성격을 지니는 등 여성적 접근이 용이한 분야이다. 1976년 제 19회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작품 <한정>에서 볼 수 있듯이 자연에 대한 신뢰와 경외감을 바탕으로 온화하고 섬세하게 표현된 새들의 평화로운 서식지 풍경의 여성적 터치와 감수성에 관해서는 일찍이 평론가 오광수와 박영택에 의해 주목된 바 있다.

“여성성에 대한 은유”로서의 종이부조 작업
1980년대로 넘어가면서 초기 화조화의 섬세함과 부드러움은 농묵의 구사, 활달한 필선, 구성적 공간 운영으로 변화하였으며, 종이부조 작업으로의 전환은 이 시기 직후에 감행되었다. 화조에서 종이부조로, 구상에서 추상으로의 전환으로 특징되는 종이작업은 <무제>(1990)에서 보듯 펄프의 유연성이 만들어낸 요철과 굴곡, 흰색에 가까운 펄프 그대로의 색을 조형 요소로 한다는 점 때문에 1970년대 단색화와 같은 계열로 이해되었다. 김영기는 한지 표면의 질감과 형태의 추상화를 통하여 종이 자체의 아름다움을 자연스럽게 드러냈다고 평하였고, 최광진은 “환원적이고 물성적인 특성을 강조하는 모더니즘”으로, 김혜주는 평면성, 정적과 적막, 고도의 심미적이며 명상적인 측면을 부각시켰다.

변화무쌍한 자연의 리듬과 숨결을 회화 자체의 법칙에 종속시켜서 기하학적 형태로 단순화시킨 서구 추상미술과 달리 한국의 단색화는 이성의 자리를 종이, 안료, 천, 나무 등 자연의 물성에 양도함으로써 서정적이고 자연스러우며 편안한 추상화를 탄생시켰다. 단색조의 비구상이며 종이의 물성을 발현시킨 점에서 원문자의 종이부조는 단색화와 동일 계열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단색화가 서구 모더니즘 미술의 조형 원리인 그리드와 평면성을 수용하여 현대성을 획득한 것에 반해 원문자의 경우는 오히려 그것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음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그리드는 모더니즘 추상미술의 발전을 견인한 인간 사고의 합리적, 이성적 가치체계를 대변하는 상징물이었으며, 평면성이란 현실계의 3차원적 재현을 거부하는 회화 고유의 문법이다. 그리드와 평면성을 토대로 하는 추상미술은 이성-감성, 문화-자연, 남성-여성, 보편-개별, 추상-재현의 이원론적 대립구도 내에서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확고부동한 가치로 확립하기 위하여 자연의 리듬에 가까운 여성성을 침묵의 커튼 뒤로 밀어냈다. 역사상 힘과 권위를 상징하는데 동원되어 온 그리드가 전자회로나 도시의 수학적 구획의 냉정하고 권위주의적인 패권을 연상시킨다면 펄프의 자연스러운 곡선을 윤곽으로 취하는 원문자의 종이부조 작업은 그리드의 미학을 위반한다. 펄프의 성질과 형태가 그림의 바탕과 윤곽이 되며, 종이의 요철을 조형요소로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는 부조 형식이므로 전면이 균일한 올오버(all-over)의 평면 구조도 아니다. 단색조 비구상으로 물성의 발현을 지향한다는 측면에서는 단색화와 상통하지만 그리드와 평면성을 위배한다는 점에서는 단색화에 반하는 것이다. 

종이부조 작업에서 발견되는 여성적 특질은 그것이 남성적 권위를 상징하는 그리드와 평면성을 위배한다는 점뿐 아니라 종이를 선택한 작가의 취향에서도 여실하게 드러난다. 그는 자신이 종이의 백색을 좋아하는 이유로 “따뜻하고 여성만이 가질 수 있는 색깔”이기 때문이며, 종이의 흰색으로 추상 작업을 하는 이유가 “여성성에 대한 은유”를 찾기 위함이라 하였다. “종이의 본래 순수한 질감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따뜻한 흰색의 미감”이 가슴에 와 닿는다는 것이다. 

고도의 정성과 섬세함이 요구되는 수공 작업은 직조, 바느질, 자수에 비견된다. 작가는 닥을 물에 풀어서 형태를 뜨고 조형하는 힘든 공정을 아기 낳는 일에 비유하기도 한다. “아기를 돌보듯 세심하게” 오랜 시간과 노동의 과정을 거치면서 생명력을 체험하고, 조용하고 포근한 백색의 미감에서 단아한 한국 여인의 이미지를 발견한다는 것이다. 우둘투둘한 펄프의 요철로 인한 촉각적 질감의 강화, 요철에 부딪히는 빛의 음영이 단색조 화면에 다채로운 색 변화를 조성하는데, 이 또한 모더니즘 미술의 역사가 확립해온 이원론적 경계를 교란시킨다. 미묘한 음영 효과로 단일 색조를 교란시키는 은밀한 방식이야말로 원문자 작업의 요체로서 여성적 특질과 만나는 지점이라 하겠다. 

물과 풀로 반죽시킨 펄프를 두껍게 떠서 건조시켜 그 자체로 회화적 효과를 지니는 화판 위에 꽃, 나무, 새를 연상시키는 드로잉과 설채가 가해진 1990년의 작품 <무제>는 설화적, 서정적, 장식적인 아름다움의 절정에 달하였다. 새나 꽃과 같은 이미지가 화려한 추상적 패턴 속에 명멸하는 환상적 톤은 형식주의 모더니즘에서 부인되는 섬세한 직관력, 서정적 감수성을 극대화하는 동시에 추상화 고유의 영역이라 할 수 있는 상상의 영토에 닻을 내렸다. 추상과 구상의 경계를 오가면서 여성적 추상의 가능성을 펼친 원문자의 작품에서 추상화의 젠더적 구획은 효력을 잃고 마는 것이다. 

‘부드러운 욕망’의 생명체 
종래의 그림들이 내부의 질서 안에서 균열을 꾀하였다면 <부드러운 욕망> 시리즈는 거침없이 확산하는 독특한 형상이다. 유래 없이 큰 규모로 제작된 <부드러운 욕망>은 같은 종이 서로 엉겨 붙어 하나의 유기체로 살아가는 무척추동물, 일정한 형태 없이 자유자재로 몸통 구조를 바꾸는 해양 생물, 공상 과학 영화에 나오는 변신 생명체나 외계 생명체 같기도 하다. 곡선의 부드러움으로 먹이를 유혹하여 순식간에 감아버리거나 액체를 방사하여 상대를 제압시키는 길게 뻗은 촉수는 팜파탈의 치명적인 관능성, 욕망의 거침없는 분출을 연상시킨다. 

“주체는 결핍이요 욕망은 환유”라는 라캉의 유명한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욕망의 드러냄은 주체의 드러냄이자 주체의 확인이기도 하다. 주체는 결핍을 통해서 욕망을 형상화하며 이러한 과정을 거침으로써 자아는 거울 단계를 벗어나 다음 단계로 나아가게 된다. 욕망의 무한한 부드러움이 과감하게 드러난 <부드러운 욕망>을 들여다보면서 우리는 원문자의 감추어진 열정을 확인할 수 있다. 어머니의 눈, 어머니의 말이 여인의 눈, 여인의 말로 변화하면서 그의 촉수는 잃어버린 ‘진짜 나'가 있는 곳, 스스로에게 가한 통제와 규제와 검열을 벗어나 자기 안의 창조적 역량이 잠자고 있는 곳을 향해 뻗어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도 은밀하게 뻗어나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김현숙(1958∼), 홍익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박사, KISO미술연구소장, 고려대학교 겸임교수


1)『한국현대미술가100인』(한국미술평론가협회 엮음, 사문난적, 2009)에 실린「원문자, ‘부드러운 욕망’ 들여다보기」를 일부 수정하여 게재함.





원문자, <정원>, 1976, 화선지에 수간채색, 165×130㎝



원문자, <무제>, 1990, 한지에 수묵, 190×167㎝ 



원문자, <무제>, 1990, 한지에 수묵채색, 268×156㎝



(4) 서울에서 파리로, 대지에서 우주까지: 이성자의 유목적 여정 | 전유신

현대미술포럼





서울에서 파리로, 대지에서 우주까지: 이성자의 유목적 여정 1)


이성자(1918∼2009)는 일본의 짓센(實踐) 여자대학에서 가정학을 전공했고, 귀국 이후 줄곧 전업주부로 지내다가 이혼을 계기로 1951년에 홀로 도불(渡佛)했다. 같은 시기에 프랑스에 진출했던 다른 한국 미술가들이 모두 기성 작가였던 것과 달리, 그는 프랑스 진출 이후에야 처음으로 미술수업을 받고 화가가 된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성자는 2009년에 작고하기까지 프랑스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대표적인 재불 작가 중 한 사람이자, 초기 도불 미술가들 중 이응노와 더불어 현지 미술계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낸 작가로 손꼽힌다.  

도불 전에는 미술과 연관된 이력이 전혀 없었던 이성자가 프랑스에서 화가로 데뷔할 수 있었던 것은 그랑드 쇼미에르 아카데미(Académie de la Grande Chaumière)와 스승 앙리 고에츠(Henri Goetz)의 조력 덕분이었다. 특히 페르낭 레제(Fernand Léger)와 아메데 오장팡(Amédée Ozenfant)의 제자였던 고에츠는 이성자를 포함한 한국 작가들에게 모더니즘 미술을 지도해 이들이 구상적인 화풍을 탈피할 수 있도록 해주었던 스승이자, 이들의 프랑스 미술계 진출을 적극 도왔던 조력자이기도 했다. 특히 그의 조교로 일하기도 했던 이성자의 초기 이력 대부분이 고에츠가 참여했던 그룹의 회원전이나 그가 제자들을 위해 열어준 그룹전이었던 점이 이를 방증해준다. 

이성자는 자연을 추상화한 <여성과 대지> 연작으로 1958년에 라라 뱅시 갤러리(Galerie Lala Vincy)에서 개인전을 개최하며 프랑스 미술계에 데뷔하게 된다. 이 연작은 자유로운 붓 터치와 거친 마티에르를 강조한 앵포르멜 풍의 작품을 시작으로 삼각형, 사각형, 원이 화면 위를 자유롭게 유영하는 듯한 작업을 거쳐 점차 기하학적인 형태들이 보다 복잡하게 구조화되는 경우로 변화를 거듭하면서 1960년대 말까지 제작되었다. 이성자가 여성과 대지를 연계하고자 한 것은 여성이 아이를 낳고 기르는 양육의 과정과 대지에서 생명을 키워내는 경작의 행위를 유사하게 인식했던 때문으로 보인다. <여성과 대지> 연작은 한국에 남겨두고 온 자녀들을 직접 양육하지는 못하지만 캔버스에 대지를 그리는 행위를 통해 그것을 대신하면서 아이들에 대한 그리움을 해소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이 연작을 통해 이성자는 프랑스 미술계에서 상당한 주목을 받게 되는데, 이 작업이 앵포르멜 미술가들과 더불어 전후의 프랑스 미술계를 주도했던 소위 ‘바젠느 그룹(the Bazaine group)’의 ‘추상 풍경화’와 연계되어 평가된 때문이었다. 이 그룹은 인상주의와 입체주의를 프랑스 미술의 핵심적인 전통으로 상정했고, 특히 프랑스의 자연을 입체주의를 통해 추상화하는 작업들을 주로 선보였다. 즉, 이들은 프랑스 미술의 ‘전통’과 그 핵심으로서의 ‘자연’에 주목했던 작가들이다. 이성자의 <여성과 대지> 연작은 특히 1920∼30년대에 랑송 아카데미(Académie Ranson)의 교수로 재직하면서 바젠느 그룹을 지도했던 로제 비시에르(Roger Bissière)의 작업과 양식적인 측면에서 여러 공통점을 드러낸다. 이성자의 스승이었던 고에츠가 그랑드 쇼미에르 아카데미에 재직하기 전인 1951-55년에 바젠느 그룹이 탄생한 산실(産室)인 랑송 아카데미에서 회화를 지도했다는 사실은 그가 이성자에게 바젠느 그룹의 미술을 소개한 매개자이기도 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성자와 바젠느 그룹의 또 다른 접점은 샤르팡티에 갤러리(Galerie Charpentier)가 개최했던 ≪에콜 드 파리(École de Paris)≫전이다. 이 갤러리는 바젠느 그룹의 작업과 같은 비구상 미술을 프랑스 미술의 전통을 계승한 전후의 현대미술로 규정하고, 상대적으로 전통과는 ‘또 다른 미술(Un Art Autre)’을 표방했던 앵포르멜에 대해서는 매우 적대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던 보수적인 성향의 전시 공간이었다. 더 나아가 20세기 전반기의 ‘에콜 드 파리’ 시기에 미술 중심지로서의 프랑스의 위상이 절정을 맞이했고, 이 시기의 프랑스 미술을 계승한 바젠느 그룹과 추상 풍경화가들이 이와 같은 과거의 영광을 되찾아 줄 적자(適者)적자라고 평가했다. 여기에 더해 또 다른 에콜 드 파리, 즉 파리에서 활동하는 외국인 미술가들 역시 이들에게는 과거의 영광을 상징하는 대상으로 인식되었다. 이 때문에 샤르팡티에 갤러리는 이 두 에콜 드 파리를 위한 전시를 1954년부터 1963년까지 매년 개최했는데, 그것이 바로 ≪에콜 드 파리≫전이었다. 이성자는 1962년에 이 전시에 참여했는데, 그가 여기에 참가할 수 있었던 것은 바젠느 그룹과의 친연성을 보이는 작품을 제작한 외국인 미술가로서 에콜 드 파리의 두 가지 의미를 충족시킨 작가였기 때문이었다. 

이성자의 작품에 관한 프랑스 비평가들의 비평문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한 용어 역시 ‘에콜 드 파리’였다. ≪에콜 드 파리≫전에 참여했고 생테즈 갤러리(Galerie Synthèse)에서 개인전을 개최하기도 했던 1962년은 이성자에 관한 주목할 만한 비평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기점이기도 하다. 프랑스의 유명 비평가이자 ≪에콜 드 파리≫전의 심사위원이기도 했던 조르주 부다이유(Georges Boudaille)는 이성자의 생테즈 갤러리 개인전을 “에콜 드 파리의 부흥(Renouveau de l’École de Paris)”2) 을 알리는 사례로 『레 레트르 프랑세즈(Les Lettres Française)』지에 소개한 바 있다. 그는 민족적인 요소와 프랑스 미술의 양식을 종합한 이성자의 작품을 에콜 드 파리 미술의 특징을 집약한 사례로 평가했다. 프랑스의 일간지인 『레 제코(Les Échos)』에 소개된 단신에서도 이성자는 “에콜 드 파리라는 용광로 안에서 동·서양 미술의 행복한 종합”3)을 이룬 작가로 소개되었다. 이와 같은 비평들은 공통적으로 프랑스 현대미술의 영향을 수용하면서도 자국 미술의 전통을 현대적인 양식으로 드러내는 작업을 에콜 드 파리, 즉 외국인 미술가들의 덕목으로 강조했다. 

이성자도 1960년대 초부터는 한국적인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에 점차 관심을 갖게 되는데, 특히 한국적인 전통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일깨워준 계기 중 하나는 목판화였다. 프랑스 작가들의 목판화 작업을 보면서 어린 시절 한국의 사찰에서 보았던 스님들의 목판화를 기억해낸 뒤 이성자는 이를 ‘자연’과 한국적 ‘전통’이라는 두 가지 요소를 결합할 수 있는 매체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프랑스 작가들의 목판화에서 받은 영향에 한국적인 전통이라는 주제를 결합시켜 자신만의 독자적인 목판화를 제작하게 된 이후로, 이성자는 판화를 주요한 매체로 삼고 지속적으로 이와 같은 작업을 제작했다. 

한편 이성자가 목판화에 관심을 갖도록 해 준 또 다른 계기가 되 주었던 것은 화가 알베르토 마넬리(Alberto Magnelli)였다. 그와의 친분은 ‘추상-창조(Abstration-Création)’ 그룹과 ‘그라스 그룹(Groupe Grasse)’에서 마넬리와 함께 활동했던 장 아르프(Jean Arp) 부부와 소니아 들로네(Sonia Delaunay)와의 친교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이들은 1945년에 르네 드루앵 갤러리(Galerie René Drouin)에서 열린 ≪구체 미술(Art Concret)≫전을 통해 전후의 파리 미술계에서 기하추상의 입지를 새롭게 하는 계기를 마련했던 작가들이다. 이들과의 교류는 이성자가 바젠느 그룹과의 친연성이 두드러졌던 반추상 작업인 ‘여성과 대지’ 연작을 탈피해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기하학적인 형태가 부각된 완전한 추상미술 작업인 ‘도시’ 연작을 제작하는데 있어 주요한 동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

‘도시’ 연작에서 특히 강조된 것은 음과 양으로 분리된 원의 형상이다. ‘여성과 대지’ 연작에서 땅의 생명력을 상징하는 형상으로 자주 사용되었던 원이 ‘도시’ 연작에서는 대도시가 지닌 활력을 상징하는 모티프로 변주된 것이다. 이 연작은 이성자가 파리와 뉴욕 등 서구의 대도시 풍경으로부터 감화를 받아 제작하기 시작했지만, 여기에 동양의 음양론을 연계해 도시를 음과 양의 상반된 기운이 조화를 이루는 공간으로 표현해낸 것이 특징이다. 음양의 구조로 이루어진 이와 같은 원의 형상은 이후의 작업에서도 지속적으로 등장하게 된다. 1970년대 말부터 제작되기 시작한 ‘극지로 가는 길’ 연작부터는 이와 같은 원형의 크기가 작아지는 대신 배경 공간이 보다 강조되는 양상으로 작업이 변모하게 된다. 도시 공간에 대한 관심이 전 세계 곳곳의 대도시를 이동하는 비행기 안에서 바라본 하늘 풍경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이 연작 속의 배경은 점차 광활한 우주 공간으로까지 확장되었다.


이성자의 작업에는 프랑스 진출 이후 대지에서 정주하는 삶을 벗어나 도시를 거쳐 우주 공간에 이르기까지 보다 넓고 광활한 세계로 끝없는 이주를 거듭했던 유목민으로서의 그의 삶의 여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와 같은 여정 속에서 이성자는 바젠느 그룹의 미술을 비롯한 서구 미술의 여러 경향들을 이정표로 삼아 자신이 나아갈 방향을 설정했지만, 한편으로는 서구 미술의 영향과 한국적 정체성을 어떻게 연계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늘 이 여정에 함께하고 있었다. 도불 이후 화가가 된 이력과 국내보다는 프랑스를 주요 활동 무대로 삼았던 점 때문에 이성자는 한국 미술사에서는 아직 뚜렷한 위치를 점하지 못하고 있는 작가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의 유목적 여정을 탐색하는 과정은 한국 미술의 지평을 보다 국제적인 맥락으로까지 확장시켜 줄 가능성을 열어준다는 점에서 이성자에 대한 보다 다양한 후속의 연구들이 이어져야 할 것이다. 


전유신(1975∼), 이화여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박사, 중앙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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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간미술』(2018. 03)에 실린 「서울에서 파리로, 대지에서 우주까지: 이성자의 유목적 여정」을 일부 수정하여 게재함.
2) Georges Boudaille, “Renouveau de L’École de Paris”, Les Lettres Française, 7 Juin, 1962.
3)“Seung Ja Rhee”, Les Échos, 14 Juin, 1962.






이성자, <갑작스러운 규칙(Subitement La Loi)>, 1961, 캔버스에 유채, 146×114cm


이성자, <5월의 도시 N.1, 74(Cité de mai N.1, 74)>, 1974, 캔버스에 아크릴, 81×65cm 


이성자, <은하수에 있는 나의 오두막, 8월, 2000(Mon Auberge de Galaxie, aout, 2000)>, 2000, 캔버스에 아크릴, 55×46c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