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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상봉

sosoart 2008. 12. 7. 21:30

 정물 (1954) 
이 그림 속에 등장하는 백자와 국화 등은 도천이 생전에 가장 사랑하던 한국적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소재들입니다. 그는 백자를 두고 자신의 친구라고 말하였을 정도로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요. 이렇게 그가 향토적 소재로부터 느끼는 친밀감과 애정은 일제시대에 억압받았던 민족적 정서에 대한 그리움일 것입니다.

 

 

 

 코스모스 (1958) ]
코스모스 또한 조선의 가을 길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름답고 우아한 꽃이죠. 밝은 조선의 풍요로운 가을 햇살처럼, 코스모스 또한 우리 민족의 정서를 풍요롭게 하는 소재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흐드러진 듯한 꽃들이지만 우아하면서도 당당하게 자신의 품위를 잃지 않고 있는 것이 한결 같은 민족의 자부심과 일맥상통 하는 듯 합니다.

 

 

 성균관 풍경 (1959) ]
그는 정물화를 주로 그렸으나, 비원이나 성균관 등과 같은 고궁이나 전통 가옥을 소재로 하는 풍경화도 종종 그려내었습니다. 그는 우아하면서도 품위있는 조선 민족의 정서를 반영할 수 있는 소재들을 대상으로 그림을 그렸는 데요, 위의 그림에서도 당당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 은행나무와 함께 고풍스러운 성균관의 가을 풍경을 담아내었습니다.

 

 

[ 정물 (1966) ]
두 점의 이조 백자들과 사과, 모과 등 여러 과일들을 정갈하게 배치해 낸 정물화입니다. 우리나라 전통의 탁자 위에 사물들을 흐트러짐 없이 배치해 놓아 도상봉 특유의 엄격함과 자기 절제의 의식이 엿보이기도 합니다. 또한 작가 특유의 무게감있는 색조 분위기로 인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차분한 자아 성찰의 기회를 얻게 하기도 합니다.

 

 

백일홍 (1967) ]
노랑과 주황, 분홍, 빨강 등 모두 화려한 색이지만 도천은 이러한 꽃들의 색을 더욱 어둡게 하고, 뒷배경 또한 어둡게 처리하여 매우 차분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었습니다. 그리고 한두송이가 아닌 스무 송이 이상의 꽃들을 도천만의 백자에 담아 한가운데에 배치함으로써 도상봉 특유의 진중한 분위기의 그림이 만들어졌습니다.

 

 

고관설경 (1969) ]
하얀 눈이 내린 전통 가옥의 모습을 눈덮힌 가지들이 인상적인 나무들과 함께 배치하여 그려놓았습니다. 어느 것 하나 흐트러짐 이나 별다른 것도 없이 자신만의 세계를 관조하듯 도천의 그림은 조용히 일상생활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꽃 (1971) ]
하얀 국화와 노란 백일홍 그리고 라일락 등을 흰 화병에 꽂아 놓고, 무늬가 있는 천으로 뒷 배경을 삼아서 그려진 그림입니다. 여러 가지의 꽃들을 모아놓은 그의 그림은 실로 싱그러우면서도 견고한 느낌을 주고 있지요. 또한 빛을 받은 국화의 화사한 흰색이 매우 인상적이며 꽃과 잎들의 묘사에서도 섬세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 개나리 (1973) ]
화사하면서도 차분한 느낌의 노랑색으로 그려진 개나리 한다발이 화폭에 하나 가득 놓여 있습니다. 따뜻한 느낌의 개나리가 하얀 백자에 꽂혀 있어서 그 우아함이 더해져 있는 듯 합니다. 이렇듯 도상봉이 그리는 꽃들은 우리에게 친숙하며, 가까이에 존재하는 것들입니다. 이는 우리의 정서를 반영한다 볼 수 있습니다.

 

 

 비원 풍경 (1973) ]
도천이 그린 풍경화들은 대부분 조용한 분위기의 공간 안에서 그 공간을 관조하는 시선으로 그려진 것들입니다. 어느 누구의 방해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공간을 채우고 있는 풍경들을 보면서 그는 그 풍경과 같은 마음으로 살기를 바란 것 같습니다. 그 또한 세상의 유혹이나 명예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작품 세계를 이루어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 안개꽃 (1974) ]
하얀 안개꽃이 주는 차분하면서도 풍성한 느낌이 화면에 가득한 이 작품또한 그의 여러 정물화와 같은 의미에서 그려진 작품이죠. 물론 사진과 같지는 않더라도, 안개가 주는 이미지를 매우 정확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입니다. 그러기에 가벼운 안개라 할 지라도 결코 가볍지 않은 그림으로 느껴집니다

화가 소개

조선의 백자를 사랑하여 자신의 호를 ‘도자의 샘’이란 뜻의 도천으로 지은 화가 도상봉. 
그는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되기 시작하던 때, 함경남도에의 부유한 상인의 집안에 맏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여느 부잣집 아들처럼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는 유학생활을 하였지요. 


서울에서 시작한 유학생활 중에 그는 취미로 그림을 시작하였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명치대학 법학과에 진학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 도상봉은 곧 자신이 가야 할 길이 화가의 길인 것에 대해 확신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림을 제대로 그려보겠다며 동경미술학교로 적을 옮기게 됩니다. 물론 휼륭한 법조인이 되길 바라던 그의 가족들에게는 큰 충격이되었구요.

이렇게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꾼 데에는 화가로서 타고난 운명도 있겠지만 그 운명을 깨닫게 하기 위해 옆에서 영향을 끼친 사람이 있었습니다. 도상봉이 다니던 보성고등학교에서 미술교사로 재직하던 고희동이 바로 그였죠.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로 알려진 고희동의 작품은 그에게 새로운 시각적 자극을 주었구요, 후에 그는 본격적으로 서양화가의 길을 걷기로 마음먹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한번 마음먹은 것은 끝까지 밀고 나가는 그의 성격처럼, 자신의 그림에 대해서도 도천은 매우 철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확고한 고전주의적 태도를 끝까지 유지하면서, 관찰한 자연을 분석하고 철저하게 대상을 이해하고자 애썼습니다. 그리고 엄격하게 구도와 색채를 구상하고, 빈틈없이 작품을 완성하고자 하는 자신의 신념을 보여주었습니다.

그의 그림들은 온화하고 따뜻합니다. 부드러운 필치와 밝은 색조, 그리고 안정감있는 구도가 보는 이로 하여금 편안한 마음을 갖게 하죠. 그의 작품 대부분을 차지하는 정물화들도 그렇고, 가끔씩 볼 수 있는 인물화나 풍경화에서도 거칠거나 혼란스러운 느낌은 전혀 없답니다. 게다가 섬세하고 치밀하게 표현된 그의 묘사를 보면 작품에 대한 그의 열정이 어느 정도인가를 짐작케 하기도 합니다.

그의 작품 경향들은 그가 일본에서 유학하던 시절 그에게 가르침을 주었던 교사들 덕분이었습니다. 당시 일본에서는 프랑스에서 유학했던 몇몇 미술가들이 인상파 수법을 전달하면서 일본 화단의 근대화에 새로운 영향을 끼치고 있었습니다. 밝은 외광 속에서 인물이나 사물의 따뜻하고 온화한 분위기를 강조하여 그리던 선생들의 가르침에 따라 도천의 예술적 경향도 그러했습니다.

귀국 후 도상봉은 선전과 같은 당시의 미술전람회등에서 활동하기 보다는 학생들을 지도하는데 더욱 열심이었던 특이한 이력의 화가가 되었습니다. 경신고보, 보성고보, 배화여고, 경기여고 등에서 후학을 지도하는 일에 매진하기도 하고, 숭삼화실이란 이름의 유화교실을 열기도 했습니다. 자신의 예술 세계를 세상에 보여준 때는 가끔 열리던 동경미술학교 출신들의 그룹 전시회 정도 였습니다. 세상에 자신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기 보다는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걷고자 하였던 그는 조선의 백자처럼 우아한 삶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러나 침묵해야 할 때를 알고 20여년을 기다린 도상봉은 자신이 나서야 할 때라고 느낀 후부터는 화단의 전면에 나선 활동가가 되었습니다. 당시 친일파 주도의 선전에 반하여 국전을 창설하기도 하고, 광복 후에는 좌익 성향의 예술가 동맹에 반하여 그의 스승이었던 고희동과 함께 민족 문화의 형성을 위해 대한미술협회를 설립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여러 회의 개인전을 열어 자신이 그간 쌓아놓은 예술 세계를 보여주었구요.

회화는 생활의 반영이어야 한다던 그는 한국적 고전주의를 확립한 작가로 화단에 자리매김을 합니다. 그리고 1977년에 타계할 때까지 균형과 조화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많은 작품들을 제작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