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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평론-정미정 / 여기는 어디? 나는 누구?, 이선영

sosoart 2012. 11. 12. 11:58

 

정미정 / 여기는 어디? 나는 누구?

이선영

정미정의 작품에는 배, 자동차 같은 이동수단과 그 안에 가득 쟁여져 있는 식물이 등장한다. 실려 있다기 보다는 억지로 구겨 넣은 듯, 늘 과적 상태여서, 자연스러운 과정이 아닌 강제성이 느껴진다. 비율이 맞지 않기 때문에 야채를 실은 자동차라고는 할 수 없다. 스스로 이동할 수 없는 식물은 바람이나 동물에 의해 포자나 씨가 날라지듯, 새로운 이동수단에 의해 전파(산종) 된다. 식물은 북극이나 사막 같은 극한의 환경으로 이동되고 거기에서 생존할 것을 요구받는다. 초기 그림에 배경으로 등장하는 북극이 냉혹함을 상징한다면, 요즘 그림의 사막은 건조함을 상징한다. 공장에서 막 뺀 자동차 광고모델처럼 보이는 멋진 이동 수단들은 여행의 경쾌함을 고양시키는 듯하지만, 새로이 정착할 곳의 삭막함 때문에 사형수의 마지막 만찬처럼 잔인함을 더할 뿐이다. 정미정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깔끔한 형태와 예쁜 색감 역시 그러한 역설을 배가한다. 식물은 새로운 생태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돌연변이 한다. 극한의 상태에서 종(種)이 변종으로 된다는 것은 진화론에서 잘 알려진 사실이다.



처음에 식물은 브로콜리였다가 나중에 보다 많은 종들이 복합된 종이 된다. 브로콜리 자체가 가지에 가지를 친 하이브리드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복잡한 말단을 가진 식물은 이제 외관상으로도 괴물이 되었다. 내포적 다양성에서 외연으로의 확장이 이루어진다. 가지를 연속적으로 뻗는 브로콜리가 시간적 연속성을 함축한다면, 여러 식물이 꼴라주 식으로 얽혀 있는 것들은 공간적 병렬이다. 분지의 흐름을 추적할 수 있는 브로콜리가 계통수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면, 하이브리드 식물들은 뿌리 줄기적이다. 시간의 흐름은 가속화되어 그 흔적을 공간적 병렬이라는 현재로 응축한다. 뿌리와 몸통으로부터 분리되어 낯설게 다가오는 기표들은 과거 및 미래와의 연속성을 상실한 현재들로 쇄도한다. 그것은 강렬하지만 존재를 해체시킬 수도 있는 위험성이 있다. 변화하는 현실에 신속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는 주체가 어느 지점부터 확장/분열/해체 되는지는 늘 불확실하다.

낯설고 비우호적인 자극에 대응할만한 시간은 충분히 주어지지 않는다. 미리 변형되어 있어야하고, 각각의 상황에 맞는 촉수를 바로 갖다 대고 대처해야 생존할 수 있다. 인간을 은유하는 식물들은 존재 전체가 생성되거나 변형될 틈이 없기에, 그렇게 이질적인 말단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다. 아크릴로 칠해진 색깔 또한 강렬하다. 식물은 고유색은 형광 빛으로 강화 되었고, 그것이 생명력의 새로운 기표가 되었다. 소비자에게 선택되기를 바라면서 구색을 맞춘 시장의 상품들이 비슷한 색상을 가지듯이, 그것들은 표피적인 다원성이라는 하나의 성질을 내장한다. 정미정의 하이브리드 식물들은 화려함이라는 외관은 비슷하지만, 종 다양성으로 가득한 자연을 특징짓는 백화만발의 상태는 아니다. 모든 것을 조금씩 갖추었기에 서로가 비슷한 개체들이 다수 있을 뿐이다. 지배적 질서와 동화하기 위해 동일성의 원리로 무장된, 준비만하다가 끝나는 ‘스펙’ 인생들이 떠오른다. 준비기간은 무한히 늘려지고 그것이 정작 작동할 수 있는 시간은 더욱 짧아진다.

다양한 것이 상호보완 하는 세계가 아니라, 비슷한 것들이 무한 경쟁하는 세계가 바로 지옥인 것이다. 오늘날 지옥은 정미정의 그림 속 북극이나 사막처럼 쿨하고 투명하게 나타난다. 더 이상 순수한 의미의 자연, 즉 다양한 자연은 없다. 자연 속에 문명이 있고, 문명 또한 자연 화 된다. 새로이 조합된 자연의 연속 선 상에서 돌연변이적 주체 또한 발명된다. 핵심은 없이 화려한 위장들로 둘러쳐진 존재들은 작가 말대로, ‘표류하는 연극적 자아, 그리고 이종교배의 현실들’을 상징한다. 기계를 통해 여행하지만, 그 내부에서도 이동은 일어난다. 정미정의 작품에서 주체와 객체의 변화를 야기하는 유목은 내적이면서 외적인 조건이다. 작가는 요즘 작품의 시작이 여행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한 도시를 배경으로 쌍엽 비행기와 자동차를 비롯한 다양한 교통수단이 있는 작품과 배경이 복잡하게 중첩된 작품이 쌍으로 배열된 <Drifting theatrical self-trevel 1,2>(2009)은 시공간적 흐름을 내포하고 있는데, 공존과 병렬, 활기와 혼란의 양가감정을 야기하는 도상들의 시작이 여행이었음을 알려준다.

변화무쌍함은 얼음, 또는 모래로 둘러싸인 세계에서 살아나갈 수 있는 경쟁력이다. 2007-8년에 제작 발표된 작품들은 빙하나 사막으로 이동된 브로콜리들이 보이고, 2010년의 <Drifting theatrical self> 시리즈에서는 식물의 인공성과 복합성이 더욱 강도를 높여간다. 사막에 옮겨진 이종교배 식물들은 그 곳에 뿌리 내리고 생존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적응과 생존이 기적으로 느껴질 만큼 환경과의 괴리는 심하다. 정미정의 그림에는 유기체의 과장된 생명력과 무기질적 환경과의 대조가 있다. 극단적 환경은 극단적 적응력을 요구한다. 끈질긴 생명력을 가진 것들은 리좀적 형상이지만, 인간과의 비유가 있기에 수직적 구조를 유지한다. 아무런 표지가 없는 낯선 장소들은 ‘여기는 어디? 나는 누구?’라는 질문을 탄식처럼 흘러나오게 한다. 그것은 목적지에의 도착이 아니라, 표류의 시작을 알린다. 경계 없는 대지인 사막은 방황을 예고하고 있으며, 칸막이 없는 미로로 다가온다.


자크 아탈리는 [21세기 사전]에서 1만 년 전에 정착된 문명은 머지않아 유목을 중심으로 재건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물론 그것은 목동의 유목이 아니라, 도시의 일반화된 불안정함으로서의 유목이다. 어느 그림에나 서 있는 다양한 스타일의 자동차는 유목의 새로운 조건을 예시한다. 유목민으로 하여금 항상 접속 상태로 있게 하는 휴대 가능한 사물들을 통해 몸을 움직이지 않고도 지구 저편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형성된 세계화를 통해 지구 저편의 사람들과 경쟁한다. 제자리에 있든 아니든 경계 넘기는 항시적인 조건이 되었으며, 세상은 더욱 다채로와졌고 동시에 더 살벌해졌다. 자동차는 물론, 화려한 돌연변이종의 식물과 사막의 조합은 새로운 유목시대를 알리는 정미정의 도상이다. 꿈속의 장면 같은 막막한 풍경은 새로운 모험과 광기의 장소로 다가온다. 그림 배경을 이루는 사막은 전형적인 유목민의 땅이다. 도시로부터 출발했을 자동차는 사막에 불시착한다. 모든 자동차들에서 운전사는 발견되지 않는다.

점점 더 가혹해지는 환경으로의 이동이라는 한 가지 방향만 정해져 있는 요구는 맹목적이다. 로지 브라이도티는 [유목적 주체]에서 도시와 사막공간을 대립시킨다. 도시는 정착적 저장과 부가 축적되는 공간이다. 유목적 공간은 정착적 권력이 세워지는 도시에 대립된다. 유목적인 공간은 사막같이 울타리나 경계가 없는 열린 공간이다. 세계화는 국가와 민족의 경계를 없애면서 유동적인 방식으로 자본축적을 재 조직화 하였고, 세계를 사막 같은 유목적인 공간으로 만들었다. 사막은 멀리 떨어진 이국적인 장소처럼 생각되지만, 상징적 장소로서의 그곳은 도시 한복판에도 존재한다. 한낮의 햇빛을 반사하는 거대한 유리벽들로 둘러싸인 도시는 사막처럼 경계가 소멸된 거대한 표면으로 다가오곤 하기 때문이다. 오아시스도 없이 끝없이 가야할 것 같은 악무한의 광경은 현기증을 자아내며, 그것은 도시적 삶의 팍팍함과도 관련된다. 우리는 그렇게 사막을 건너왔고, 또 건너가야만 할 것이다.

정미정의 그림에서 사막의 열기는 존재를 감싸는 따스한 기운과는 거리가 멀며, 사막의 빛은 눈을 멀게 하고, 사막의 건조한 바람은 그곳에 가까스로 서있는 것들을 모래처럼 분산시킬 것 같다. 포스트모던 이론가 장 보드리야르가 미국 여행을 하면서, 그곳에서 거대한 사막을 발견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유럽인인 그는 [아메리카]에서 세계 자본주의의 최첨단 국에서 뿌리의 결여에서 발생하는 활력을 보았다. 그는 미국의 대도시와 사막에서 인간을 깊이로부터 구출해주는, 기원도 준거점도 가지지 않는 외적 초공간(hyper space)을 보았는데, 거기에서 기존 세계를 특징짓는 의미와 심오함이 삭제되어 있다. 의미가 모두 비워져 있는 그곳에는 건조함과 불모성의 매혹이 있다. 사막은 자의적이며 비인간적이고, 사람들은 그 기호들을 해독하지 않고 사막을 건넌다. 그런 의미에서 보드리야르는 미국이 꿈도 아니고 실재도 아니라고 본다. 그것은 하나의 극실재(hyperreality)이다.

그곳의 모든 것은 현실적이며 실용적이지만 모두 꿈의 재료이기도 하다. 그들 스스로가 가장 발달된 상태에 있는 시뮬레이션이다. 사막으로서의 도시는 천천히 이루어지는 몇 세기가 걸리는 어떤 진실 원리의 축적을 본적이 없기 때문에 영구적인 시뮬레이션 속에, 기호들의 영구적 현전 속에 산다. 총체적 시뮬라크럼 속에서 여행자는 모든 것이 발견되어야 하고 모든 것이 말소되어야 하는 스펙터클한 형태의 기억상실을 경험한다. 정미정의 작품에서 막연하게 열려있는 공간인 사막은 이 같은 도시와 중첩된다. 그것은 원초적이면서도 현대적이다. 기억과 의미를 불러일으킬 어떤 지표도 없이 막막하게 펼쳐지는 이 장소는 시간의 축적이 모래알처럼 사라진 곳이다. 다만 좋은지 나쁜지 알 수 없는 강렬한 현재가 영원히 펼쳐져 있다. 유목적 주체를 상징하는 돌연변이체는 주위 환경으로부터 고립된다. 그것은 오아시스의 신기루처럼 가상적 풍요의 이미지로 그렇게 사막 한가운데에 서 있다.

출전; 대전 창작센터 공동워크숍

 

출처: 김달진 미술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