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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평론/컬럼-현대의 예술가2012/ 이선영

sosoart 2012. 11. 12. 12:00

이선영

현대의 예술가2012

이선영

I 부. 예술가의 전사(前史)

사회는 점점 더 기호화, 심미화 되어가고 있지만 그 무대의 진정한 주인공은 예술가는 아니다. 새로이 변화된 현실은 예술가에게 거대한 가능성의 무대일 뿐 다가온 현실은 아닌 것이다. 오히려 이세계의 주인공은 유사 예술(가)이다. 이러한 유사예술가들은 고립된 (순수)예술가들보다 더 많은 자본과 사회적 기대, 맥락을 활용하며,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위기의 시대는 다시금 역사를 뒤돌아보게 한다. 이 강연은 대안적 예술가상을 도출하기 위한 기초 작업으로서 선조 예술가들에 대한 간단한 요약에 해당한다.

실로 예술사는 대안의 역사이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필자는 예술가들의 행적을 통해 르네상스 이후 각 사조별로 예술가들이 자기 자신에게 할당했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었다. 고전주의자는 보편적 이성을, 리얼리스트는 총체성을, 낭만주의자는 절대적 자아를, 세기말 유미주의자는 종교로서의 예술을, 모더니스트에게는 형식을, 아방가르드에게는 진보를, 포스트 모더니스트에게는 해체에의 충동을, 미지의 예술가 상에는 타자성을 부각시킬 수 있었다.물론 이러한 범주는 현실 속에서는 상호 중첩되는 것이며, 엄격하게 분리시킬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각 예술가 상은 일종의 이상형(ideal-type)이라고 볼 수 있다.

1. 아카데미스트들의 보편적 이성

니콜라우스 페브스너에 의하면, 1500년경 이탈리아의 학자와 예술가들은 회화를 학예(artes liberales)에 포함 시키고자 했다. 이는 회화를 중세적 질서의 산물인 공예와 분리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이로서 회화는 수공적인 기술이 아니라 과학이 되었으며, 미술가들도 궁정시인과 학자들에 버금가는 대접을 요구하였다. 17세기의 아카데미에서는 절대율이 추구되었다. 이것은 수학적으로 명확하게 실증 가능한 규칙으로 이성에 대한 확고한 신뢰를 의미하였다. 예술가들은 기하학자의 방법으로 사물을 조사하고 판단할 것을 요구받았다. 예술철학자 김혜숙은 [예술과 사상]에서 고전주의의 철학적 바탕은 합리론에 있다고 말한다. 데카르트 등 위대한 대륙의 합리론자들은 수학을 자신들의 철학의 모델로 삼았다. 데카르트가 자신의 철학적 방법을 위해 택한 기준은 명석함과 판별성이며, 우연보다는 규칙성과 이성의 우월성을 강조하였다. 데카르트의 정신에 가장 근접한 시학은 부알로였는데, 그는 예술에서 본질적인 것을 이성, 양식, 가지성이라고 규정하였다. 뤽 페리도 [미학적 인간]에서 17세기 고전주의 예술에 주어진 목표는 데카르트와 더불어 합리적으로, 그리고 조화롭게 질서 잡혀 있다고 여겨진 자연의 본질을 나타내는 것이었다고 지적한다.

고전주의자들이 보기에 ‘자연을 모방한다’는 것은 감각적으로 나타난 자연의 다양한 겉모습 저 너머에 있는 동일한 것, 영원한 것, 변하지 않는 것을 모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고전주의 예술 이론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은 ‘본질적’, ‘근본적’, ‘표준적’, ‘이상적’ 등이다. 신고전주의의 목표는 대상의 진정한 실재를 이해하는 것을 요구한다. 개체들은 있는 그대로는 불완전한 상태이며, 예술가는 그 불완전성을 이상적인 모방을 통해 완전하게 만든다. 재현은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이상화이며, 사실이 아니라 전형의 모방인 것이다.(김혜숙,[예술과 사상]에서 인용) 계몽주의 시대인 18세기가 되면 ‘아는 것이 힘이다’는 원리가 아카데미에서 널리 관철되었다. 아카데미의 역사를 볼 때 근대의 여명기인 르네상스 이후 각 시대의 아카데미들이 추구했던 보편성이란 16세기에는 고대, 17세기에는 수학적 이성, 18세기에는 계몽, 19세기에는 민족국가 등으로 단순화 시킬 수 있다. 그러나 격동의 19세기가 되면 아카데미에 대항하여 새로운 가치들이 또 다른 ‘보편성’으로 주장된다.

2. 낭만주의의 절대자아

레나토 포지올리에 의하면 낭만주의자들에게 현실은 한계를 가진 것으로 보였고 그 반면 자아는 무한한 것으로 우상화 되었다. 사회의 주변인인 예술가들의 운명과 맞물려 이 때 발생한 전통은 가장 강력한 예술가적 자아로 자리 잡았다. 격동의 시대인 19세기에 모든 이상과 개념이 용광로에 들어갔을 때 개인의 자아가 유일하고도 확고한 닻이 되었다. 칸트 이후의 독일 관념론자들은 자아에 대한 의식을 발전시킨다; ‘존재하는 것은 일체 자아이다’(피히테) 피히테는 경험주의와 실증주의를 거부하고 인간 외부에 있는 물체의 의식은 인간자신의 표상력의 소산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비타협적인 주관주의를 보여준다. 그에게 일체의 외계, 환경, 대상은 자아와 대립되는 것으로 자아와 독립해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피히테에게 자아란 일종의 절대성을 띄는 것으로서 여기에서 인간의 자기의식은 철학의 원칙으로까지 고양--즉, 나는 나다라는 식의 논리--된다. 창조적 자아의 절대성을 확신하는 피히테주의는 특히 독일 낭만파에게 공감을 얻었다. 낭만주의자들은 무한이며 자유 그 자체, 어떤 법칙으로도 속박되지 않는 예술을 동경하였다.

낭만주의자들에게 작품은 절대적이고 무한한 정신이 순수하게 계시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낭만주의자들은 자연의 객관적 토대를 이루는 절대 정신을 강조한다. ‘자연의 산출력과 주관의 산출력은 근본적으로 동일한 창조적 정신’(셸링)이 된다. 자연은 대상의 실재적 세계를, 예술은 관념적 세계를 창조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선험철학의 영향으로 낭만적 예술가는 천재이자 예언자가 되었다. 김혜숙은 [예술과 사상]에서 낭만주의자에게 예술가의 본성이 아예 마술사가 됨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노발리스는 자아를 불가사의한 마법의 나라로 보았다. ‘상상력, 오성, 이성들 배후에 놓인 것은 본래적으로 창조적인 것, 즉 천재성이다’(노발리스) 칸트 이후의 관념론에서 의식의 활동성과 자발성이 크게 강조되어 자연 자체의 궁극적 근거로 작용 하지만, 그것이 자연자체를 변경시키거나 지양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노발리스의 마술적 관념론에 와서는 심미적 의식, 자유는 자연법칙을 지양함으로서 자연을 변경할 수 있다. 낭만주의 전통에서는 예술과 예술가가 격상되며, 과학이나 과학자보다도 한 단계 높은 진리를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낭만주의 미학의 주요 범주인 숭고 역시 포착할 수 없는 것을 포착하는 신비한 과정이다. 그들은 또한 루소처럼 인간의 유아적이며 원초적인 상태를 중시하였다. 이러한 비합리적 주체로서 예술가는 무한히 승격된다. 예술가는 과거의 옹호자가 아니라, ‘미래의 전령사이자 선구자이며, 예언자로서 알려지지 않은 세계의 입법자’(셸리)이다. 더 나아가 예술가는 인류의 정상에 살고 군주와 동등한 위치의 사람(쉴러)이 된다. 낭만주의 예술가야말로 ‘자연계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을 지닌 예언자’(에드먼드 윌슨)인 셈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격상된 예술가의 위치는 그들의 실제 현실이 그랬다기 보다는 적대적 현실에 대한 반응이자 위기의식의 산물이었다고 볼 수 있다. 낭만주의의 대표적인 사상가들은 세계가 무한정 진보한다는 계몽주의적 신념을 잃었거나 가져보지 못했다. 현실 참여에 대한 비전도 동시대 합리주의자들과는 차이가 있었다. 이들에게 참여란 예술적 상상력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셸리는 예술이 이러저러한 사상을 대중화 시킬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상상력을 자극시켜준다는 이유 때문에 사회적인 역할을 수행한다고 보았다.

또한 낭만주의자들이 강조하는 개성은 합리주의에서의 개인주의와는 다른 것이다. 후자가 개인이나 단체의 동등성과 대체성을 강조하는 반면에 낭만주의자들은 자신만의 독특성, 즉 개성을 강조한다. 보편적이고 불변의 원리를 지닌 합리적인 이성과는 달리 낭만주의적인 세계정신은 영원히 변화하는 종잡을 수 없는 것이다. 낭만주의자들은 세계를 끊임없이 흐르는 것으로 인식하고 그 세계 속에서 인간의 감정은 영원히 변한다고 본다. 각각의 순수한 기분들을 향유할 수 있지만, 동시에 여기에서 야기되는 불안감도 있다. 소모적 삶과 자기도취의 양극단을 오가는 예술가상은 후기 낭만주의자이자 모더니스트인 보들레르가 잘 묘사한 바 있다; ‘예술가는 자기 자신에게서 비롯된다. 그는 스스로만을 위해 안정되게 서있다. 그는 아이 없이 죽는다. 그는 자기 자신만의 왕, 목자, 신이다’ 보들레르는 자기의 신체, 행동, 감정, 그의 존재 자체를 예술작품으로 만들려고 분투하는 댄디였다. 그러나 댄디는 동시에 저주받은 예술가이기도 하였다. 예술가는 세상에 대해 부적격자이며 가난과 방탕 속에 자신의 천재성을 실현하는 자 이다. 그는 ‘낭만적인 병’을 앓고 있어서 끊임없는 영혼의 갈망과 불만족, 권태와 우울에 빠져 있다. 그는 현실도피주의자인 것이다.

사회의 아웃사이더로서의 낭만적 예술가는 슬로터디이크가 묘사하였듯이 백수건달이기도 한 것이다. 낭만주의자는 산업화의 전야에 떠돌아다니던 유쾌한 방랑자였다. 낭만주의자들이 백수건달이라는 것은 그들이 생산관계로부터 도망쳤기 때문이며, 임금노동을 하지 않고 잉여가치를 모으려 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회의 탈영병으로서, 환상적인 방식으로 소모적인 일상의 의무를 면제받으려고 하였기에 의심스러운 주변인이자 행운에 싸인 인물이라는 혼합된 인상을 주었다. 낭만주의 예술가들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근대사회에서 예술(과 예술가)은 해방과 소외의 동일한 과정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미술가의 완전한 해방은 자유로운 개성을 존중하는 새로운 경향과 미술가들의 무산계급화를 동시에 야기했다. 바야흐로 성공하지 못한 화가들이라는 무산계급이 발생한 것이다. 이로써 보헤미안적 생활의 예술가적인 자부심과 경제적 불안정이 공존하게 된다. 실로 그들의 운명은 노동자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낭만주의자들은 노동자와 자신의 운명을 동일시하지는 않았다. 그들의 개인주의는 자본주의의 역기능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없었던 개인주의였다.

3. 세기말 유미주의의 예술신학

19세기 초 이래 서구의 사상을 지배해왔던 역사주의 및 그것의 통속적 형태인 진보의 믿음에 대한 붕괴가 위기의식을 불러 일으켰고, 이에 대한 반응이 바로 유미주의였다. 유미주의는 아름다움, 특히 예술을 삶의 보편적인 기준으로 삼는 태도를 말한다. 유미주의자들에게 삶이란 예술을 위한 소재에 불과하며, 예술가는 신기한 감각적 체험을 찾는 일에 스스로를 바쳤다. 그들은 중산층의 물질주의와 속물적 취향을 거부하면서 낭만주의자들처럼 상상적 삶을 중시하였다. 그러나 낭만주의자들 보다는 더 관념적이고 신비주의적인 면모를 띄었다. 에드먼드 윌슨은 상징주의 예술가들을 다룬 저서 [악셀의 성]에서 낭만주의자들은 그의 개인주의 가운데 사회에 대항하거나 무시하곤 했지만, 상징주의자들은 낭만주의자들 보다 사회에 더 무관심함을 강조하였다. 즉 상징주의는 낭만주의자처럼 자기의 개인적 의지를 주장하지는 않는다. 낭만주의자들은 예술작품을 대체로 자기 정서의 표현이나 표출로 보지만, 상징주의자들은 더욱 비교(秘敎)적인 동시에 더욱 과학적이다; ‘시란 정서의 방출이 아니라, 정서로부터의 도피이며 개성의 표현이 아니라 개성으로부터의 도피이다. 그러나 개성과 정서를 지닌 사람만이 그것으로부터의 도피의 소망이 무엇인지를 안다’(T.S.엘리엇)

따라서 예술가는 감상주의자가 아니다. E.윌슨에 따르면 감상주의는 ‘돈과 지위와 결혼식의 종소리를 신봉하는 실용적 인간들’에나 해당된다. 윌슨은 예이츠를 인용한다; (예술가는)‘렘브란트 같은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으로...유리창에서 그의 숨결을 닦아내고 다양한 장면을 보고 기꺼이 웃는 사람이다’ 상징주의자들은 정신적인 가열성에도 불구하고 그 이면에는 삶과 동떨어져 있는 진정한 평정과 초연함이 있다. 그들이 즐겨 머물고자 하는 곳은 요정의 나라나 연금술적인 사원의 세계이다. 그곳이 그들의 이상적인 거처인 것이다. 예컨대 위스망스의 소설의 주인공은 자기를 세계로부터 완전히 절연하고 세련되고 괴이한 감각을 촉진시켜줄 존재로 스스로 변모하는 실경질환의 귀족이다. 그는 보통 낮에 자고 밤에 일어난다. 세기말 상징주의자들은 일상생활에서 벗어나 오직 상상력 속에서만 살고자 했다. 말라르메는 ‘세상과 그 자신 사이를 연기로 가리기 위해’ 노상 담배를 피워댔다고 한다. 윌슨에 의하면 세기말 예술가들이 당대 생활의 일반성에서 움츠러든 이유는 산업혁명과 중산층의 대두에 의해 조성된 공리주의적 사회에서 발붙일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낭만주의 세대만 해도 부르주아는 이미 적이긴 했어도 그 투쟁에서 상당한 만족을 누렸다. 그러나 세기말에는 부르주아의 세계가 너무 강력해 지는 바람에 예술가가 거기에 대항하는 것이 무모할 정도였다. 윌슨은 상징주의자들이 자연주의의 기록화와 합리주의의 논리에 맞서는 암시의 가치를 옹호하였다고 말한다. 애드가 앨런 포가 암시하듯이, 음악의 애매함에 접근하는 것이 상징주의의 주요 목표가 된다. 외부세계를 파악하고 통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신념을 상징주의자들의 전 작품에 스며있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그것을 인식하는 사람과 환경과 순간적 분위기에 따라서 상대적이다. 모든 위대한 예술은 상징에서 탄생하기에 관찰과 통계는 무의미하다. 우리가 보통 사용하는 상징주의는 관습적인 것이다. 그러나 상징파의 상징들은 예술가 자신의 특수한 관념들을 대변하기 위해 임의로 선택 된다.상징주의자에게 오로지 그의 개성과 감정만을 표현할 수 있는 특수한 언어를 찾아내는 것이 임무였다; ‘예술은 하나의 게임으로서, 즉 언어요소들의 자유로운 결합을 통해 얻어진 상징적인 표현과 상상력의 가치들의 영역에서 행해지는 일련의 특수화 된 실험으로 존속할 것이다’(발레리)

상징주의자 말라르메가 창안한 예술은 대수와 유사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언어를 가능하게 하는 형식들을 강조하고 보존하고 개발하려는 의도를 가졌기 때문이다. 발레리는 시와 수학 사이의 유사성을 지적한다. 그러나 윌슨은 상징주의자들의 엄밀한 채 하는 태도는 상당수의 잘못된 가설을 위장하고, 과학적인 분석보다는 오히려 미학적인 신비주의를 증대시키는데 이용되곤 하였다고 평가한다. 상징주의는 결국 현학주의와 무익한 미학주의로 이끌려 갔다는 것이다. ‘예술을 위한 예술’로서 세기말 예술계를 지배했던 오스카 와일드에게 있어서는 삶이 예술을 모사하는 것이지 결코 예술이 삶을 모사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예술에 의해 세계가 정화되고 순간적으로나마 완벽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면 이세계에 곧 싫증을 느끼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와일드의 ‘예술을 위한 예술’은 당대의 사실주의, 공리적 도덕주의 및 예술을 자기표현으로 보는 견해에 반대하였다. 또한 모든 예술은 완벽하게 쓸모없고, 예술은 그 자체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그에게 예술은 감정, 시대정신, 진리, 영혼의 표현은 아니었으며, 오직 예술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는 곧 순수예술의 이념을 예시하는 것이었다.

유미주의자들은 예술이 삶의 진부함으로부터 도피책을 제공해 준다고 본다. 그러나 만약 이 세상을 공허하고 무의미하다고 본다면 예술 역시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실제로 1890년대의 유미주의자들은 삶과 예술에 있어 고의적인 매너리즘과 인위성을 숭배하여 신기한 것과 이색적인 것 변태적인 것과 퇴폐적인 풍조에 빠지게 된다. 그들은 ‘썩어가는 것에서 솟아나는 아름다움’에 탐닉하였다. 유미주의자들은 휴머니즘적 사실주의의 거만한 세속성에 항의하는 가운데 ‘신 없는 예술신학’을 이룩한다. 그들이 과학과 도덕에 대립하여 삶에 대한 예술적 접근의 절대적 우월성을 주장하는 것은 예술을 현실의 삶과 분리시킴으로서 세속화된 구원의 도구로 승격시키는 것이다. 그러는 와중에 유미주의자들은 마치 귀의한 성직자들처럼 삶과 예술에 대한 종합적 태도를 가질 수 있었으며,초연한 자세로 삶을 관조할 수 있었다; ‘우리의 예술은 종교의 대용이며 우리의 종교 역시 그러하다’(엘리엇)

4. 모더니즘의 형식주의

예술을 위한 예술의 유사 종교적인 분위기에서 보다 객관적, 분석적으로 예술의 자율성이 확립해 간 것은 모더니스트들에 의해서였다. 그들은 유사 과학적인 감수성을 가지고 예술의 자기지시적인 형식을 중요시한다. 모더니스트는 초월적 자아 내지, 자아와 세계 사이의 동일성이라는 낭만적 주장을 거부한다. 단지 작품은 단지 하나의 인공물일 뿐이다. 작품은 사실주의의 모방론은 물론 예술을 신비적인 대상으로 보는 상징주의 혹은 유미주의를 모두 거부한다. 그들은 자본주의 문화가 통합력을 잃었기에 예술가는 단 하나의 가능한 조건, 즉 허구의 조건 속에서 문화의 재통합을 시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식한다. 모더니즘을 통해 대상의 세계로부터 대상을 지각하는 마음의 탐구로의 이 전,즉 사건과 사물, 다른 인간들이 일으키는 반향의 탐구로 시선이 근본적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막스 베버에 의하면 합리주의와 주지주의화, 특히 세계의 탈주술화를 특징으로 하는 근대의 운명은 바로 궁극적이며 숭고한 가치들이 공공의 무대에서 물러나서 신비적이고 초월적인 왕국으로 들어가서 개인화 되었다는데 있다.

베버는 근대화가 예술의 기념비성을 쇠퇴시켰다고 지적한다. 이제 예술은 자기 자신만을 탐구할 뿐이다. 예술은 예술을 모방하는 경향이 짙어진다. 모더니즘 예술은 주체와 역사의 개념에 대해서도 회의적이었다. 그들은 예술의 몰인격성을 강조하면서 예술은 정서의 유출이 아니라 정서로 부터의 도피이고, 개성의 표현이 아니라 개성으로부터의 도피로 간주하였고 역사는 깨어나야 할 악몽이라고 보았다. 보들레르는 ‘무한한 진보는 인류에게 보다 잔인한 고문이다. 완강하게 스스로를 부정하며 전진하는 그것은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자살의 한 형식이며 스스로를 찌르는 전갈을 닮은 것은 아닌지’ 자문하였다. 예술의 자율성, 그리고 그 자율성을 형식화하는 것은 실증주의적 학문에서의 자율성과 통하는 바가 있다. 자율성은 자기 지시적이고 자기 참조적이다. 형식에 대한 모더니스트들의 유사 과학적 분석에도 불구하고 기호--기호화는 화폐가 세상을 통일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보편화되었다--를 물신화하여 예술을 수수께끼의 대상으로 만든다.

역사적으로 볼 때 미적인 것의 자율성은 봉건적 속박으로부터 예술가가 해방 되면서, 즉 익명의 시장을 위해 생산 활동을 하는 독립예술가의 탄생과 결부된다. 모더니스트들은 형식의 자율성을 강조함으로서, 예술에 대한 기존의 낡은 틀을 깨뜨렸지만 비정치성으로 인해 많은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모더니즘에 대한 강력한 비판자는 게오르그 루카치였다. 그는 모더니즘에서 그릇된 객관주의와 주관주의가 항상 제휴를 맺고 출현하며 양자가 부단히 상호전화 한다고 본다. 루카치는 이들에게서 변증법에 적대적인 현실긍정이 주도하는 것을 보았으며, 이들이 과거와 미래를 부정하고, ‘지금 여기’의 기분을 흉내 내면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일탈하는 임의적인 예술을 추구했다고 본다. 루카치는 모더니즘 예술의 파편성을 단죄하면서 이러한 경향을 몰락기 부르주아 철학의 일반적인 특징이라고 지적한다. 이들은 현실반영에 있어 개별성을 극복하려 하지도 않고 할 수도 없기 때문에 반예술적이며 형식을 해체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5. 리얼리스트의 총체성

역사와 주체의 시대였던 19세기에는 사실주의와 낭만주의가 시대정신을 대변하고 있었다. 게오르그 루카치는 리얼리즘의 강력한 옹호자이자 대변자로 평가되고 있다. 루카치는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상황이 지니고 있는 개별적 특징을 고려한 역사 발전의 가장 보편적인 법칙의 발견 및 그 적용’을 예술가의 사명으로 보았다. 작품에 있어 최후의 결정적 판단기준은 현실반영의 적절함과 풍부함, 질서에 있다고 그는 생각한다. 여기에는 작품 전체와 현실 전체의 비교가 있다. 그 현실은 총체적이고 과학적으로 파악될 수 있으며,그 산물은 보편적이고 진보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루카치는 이러한 논리를 통해서 고전주의 및 사실주의적 질서를 확신하고 옹호하였다. 루카치는 유기적(그의 용어로는 사실주의적) 예술작품을 미학적 규범으로 고집하면서 비유기적인 작품을 퇴폐적이라고 규정하였다.

그와 논쟁하였던 아도르노는 비유기적인 작품이 기존질서와 거짓된 화해를 반대하는 진정한 저항으로 보지만 루카치는 (비유기적인)모더니스트의 저항이 추상적 비역사적이어서 자본주의를 극복하려는 현실적 저항이 되지 않는다고 본다. 루카치는 미학적 모더니즘을 부르주아적이라고 보면서, 진정한 아방가르드의 조류를 동시대 리얼리스트의 작업에서 찾아 야한다고 역설하였다. 마르크스주의자로서 루카치는 헤겔의 변증법을 그의 미학 이론의 근간으로 삼았다. 헤겔은 독창성이 예술가 개인을 노출시키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어떤 것을 창출해 내는 노력, 이성적인 소재를 포착하는데 있다고 보았다. 개별성으로부터 보편성으로의 운동 그리고 그 반대의 변증법적 운동은 항상 특수성을 매개로 한다. 감각적 개별성과 사상적 보편성을 유기적으로 통일하는 미적 특질로서의 특수성은 (모더니즘적인) 파편성을 극복하고 객관적 현실을 정확하고 깊이 있게 재현한다는 것이다.

김혜숙은 [예술과 사상]에서 ‘진보적’ 예술의 헤겔적 토대를 설명한 바 있다. 뤽 페리에 의하면 헤겔은 철학사를 예술사로부터 유추하여 하나의 동일한 이면이 다양한 형태 속에 나타난 것으로 기술하였다. 헤겔은 가장 높은 철학적 관점, 즉 동일성의 철학의 관점에 위치함으로서 비판은 다양성을 제거한다. 모든 체계가 근본적으로는 동일한 이념을 표현한다. 그로서 헤겔 미학은 고전주의의 중심 주제를 다시 취한다. 고전주의는 이성의 진리를 감성 속에 표상함을 강조한다. 감각적 요소는 진리가 유쾌한 방식으로 지각될 수 있도록 해주는 매개체(그러나 본질적으로는 부정확한)인 것이다. 헤겔은 ‘예술은 진리의 표현을 목적으로 한다’고 말했다. ‘예술의 내용은 이념이며, 그 형식은 이념에 대한 감성적이고 도식적인 구조이다’(헤겔) 헤겔은 다양성을 통일성에로 환원하고, 특수성을 보편성에로 편입시킨다. 변증법을 통해 헤겔은 역사를 최상의 위치에 올려놓고 그러한 세계관에 바탕 하여, ‘예술의 죽음’을 언명한다. 헤겔적인 논리의 운동에 의해 ‘예술’은 종언을 구하고,‘당파적인’ 예술(‘진리의 전달자’)만 남겨질 소지가 커진다. 속류 좌파적 전통에서 예술은 합리적이며 이성적인 의사전달의 수단, 교육과 선전의 도구로 환원되기도 하였다.

6. 아방가르드의 진보성

옥타비오 파스의 한탄처럼 20세기는 21세기에 가능한 한 빨리 도달하려는 것이 목표인 것처럼 보였다. 현대의 비판적 열정의 유일한 원칙은 모든 원칙의 부정, 즉 영원한 변화에 있다. 아방가르드는 시대를 앞서 새로운 표현 형식들을 정복하는 존재로 간주되었다. 진보와 새로움을 향한 전진과 투쟁에는 근대적인 역사의식이 깔려있었다. 일직선적이고 끊임없이 앞을 향해 흐르고 있는 역사적 시간의 틀은 합리주의의 보편적이고 시간을 초월한 진보 개념이 투사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간/역사관에는 근대의 자연과학과 자본주의, 그리고 상승하는 부르주아 계급의 낙관주의가 존재하였다, 부르주아 계급은 생산방식을 부단히 개선하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다. 근대의 자아 발전에 대한 인간주의적 이상은 부르주아의 경제 발전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모든 이에게 자아발전을 촉진시키고 심지어는 강요까지 하지만, 제한적이고 왜곡된 방법으로만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아방가르드의 주요 관심사는 전통과의 결별, 그리고 문화의 세계를 계속 혁신시킴으로서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이다. 뤽 페리는 [미학적 인간]에서 ‘새로운 것의 전통’의 이데올로기가 담고 있는 광적으로 자기중심적인 면모가 존재한다고 지적한다. 개인의 자신의 자율성과 자유의 이름 아래 전승된 전통들의 타율성과 작별해야만 한다는 근대적 이데올로기로 개인주의를 이해한다면, 아방가르드는 개인주의의 표현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근대의 아방가르드는 자유로운 발전의 욕구를 지닌 파우스트적인 인간상을 지녔다. 이러한 인간상의 선구적인 예시는 밀의 「자유론」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현대생활과 정신의 인격의 균형이 아니라 대담성, 모든 방향으로 자유로운 확장을 요구한다’고 하였다. 자기발전을 위한 추구는 파괴자와 창조자의 합성 인으로서 끊임없는 전진과 개발 역사창조적인 인간상을 제시하였다. 끊임없는 자기 확장을 통해서 현재의 자신이 된 그 인간은 자신이 튕겨 나왔던 구세계와 영웅적으로 투쟁했던 것이다.

옥타비오 파스에 의하면 19세기의 많은 예술가들은 펜이나 붓, 지휘봉 등의 수단으로 왕권이나 교권, 무력이 이룰 수 있었던 힘에 필적하는 지적인 힘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아방가르드는 호전성, 비타협주의, 용감한 선구적 탐험, 미래를 향한 투쟁에 있어서 자기 의식적이고 영웅적인 신화를 가진다. 이들은 현존하는 사회구조를 모두 날려 버리고, 새롭고 보다 나은 세계를 가능하게 하는 전복적인 힘의 이미지를 가지려 하였다. 예술가에게 이러한 특별한 지배권을 부여해주는 새로운 세계는 일찍이 공상적 사회주의자 생시몽이 정식화 한 바 있다.생시몽에게 예술가는 상상력의 인간이고 미래를 예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미래를 창조할 수도 있는 존재였다. 따라서 예술가는 사회발전을 위한 운동의 최전선에 서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이때 무정부주의적 공리--즉 ‘파괴하는 것은 창조하는 것이다’--는 아방가르드의 기치가 되었다. 그러나 역사적 아방가르드를 돌이켜 볼 때, 그들의 몸짓은 매번 예술의 상습적인 조건이 되어버렸고, 그들의 파괴와 새로움의 수사학은 어떤 영웅적 호소의 흔적도 잃어버렸다. 레나토 포지올리에 의하면 ‘새로운 것의 전통’ 속에 놓인 우리 시대의 예술은 현대성으로 인해 살아가고, 현대성으로 인해 사라져 버리게 된다. 현대적인 것은 재빨리 고갈되기 마련인 것이다.

롤랑 바르트가 말하듯이, 전위의 모순은 더 이상 원래의 보편주의를 주장할 수 없게 된 부르주아의 모순과 함께 하는 것이다. 그들(전위와 부르주아)의 ‘보편적 진보’는 허위가 되었고, 부르주아적 질서를 넘어설 수 없었던 아방가르드는 역사화, 제도화 되었고 결국은 상품화되어 부르주아에게 각광받기 까지 했다는 것이다. 페터 뷔르거에 의하면 좌초된 혁명의 결과로 인해 인간 본질에 대한 부르주아적 이데올로기를 비롯하여(바르트는 ‘인간 본질주의적 신화’에 대해 말한다) 통일적이고 고전적인 작품생산 역시 붕괴된다. 좌파적 성향의 아방가르드 집단에서도 그들의 조직에 대한 위계, 규율, 순응, 그리고 호전적 성격은 근대적 기획의 모순들과 함께 시대착오적인 것이 되어갔다. 레이먼드 윌리엄스가 지적했듯이 부르주아 전통에서 개인적이란 말이 사적(私的)이란 말로 왜곡되어 왔듯이 사회적이란 말은 집단적이라는 의미로 왜곡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아방가르드는 현실적으로 싸워야할 어떤 적도 가지고 있지 않다. 시대의 변화가 오기 전에 아방가르드는 자체의 논리에 의해 자기 파괴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었는데, 다다의 허무주의에서 볼 수 있듯이 그들은 자기 자신조차도 부정하려는 뿌리박힌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7. 포스트 모더니즘의 해체성

이태리의 철학자 자니 바티모는 철학적으로 볼 때 모더니티의 종말이 형이상학이나 ‘강한 사상’을 약화시켰다고 본다. 그에게 있어 강한 근대적 혁명론은 폭력적인 균질화나 보편화를 포함하고 있다. 포스트 모더니스트는 근대적인 자유의 영웅으로서의 인간성, 모든 유형의 보편성의 추구를 거부하고 언어게임의 이질성이나 특별한 경험과 더불어 살아가려고 한다. 새로운 시대의 과학도 무질서와 혼동, 우연의 역할을 재평가한다. 리오타르는 테러를 행사하는 기술과학 체제에 결절, 불안정, 역설 또는 소규모 파국을 일으키는 불연속의 전략, 즉 배리(背理)를 부각시킨다. 그는 그러한 틈의 전략을 이용하여 체제를 해체시키고자 하며, 따라서 고도로 이질적이고 국지적인 이야기를 중요시한다. 미셀 푸코도 근대의 동질적인 유토피아가 아니라 초이질성이 추구되는 헤테로피아를 제시하는데 그곳은 통사법이 붕괴되어 공통의 문법이 없으며,(말과 사물이 분리되어)명명이 불가능하고, 말을 단지 말로서(허구를 허구로서) 머물게 하는 곳이다. 포스트 모던적 예술은 세계의 전체성에 대한 신앙이 없어지고 대신에 통합적인 허구, 즉 잡다하고 불완전해 보이는 그리고 확실한 가치를 가지지 않는 현상들로 가득 차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근대의 직선적 시간(역사)관이 아니라 순환성이나 영원회귀를 강조하기 위해 자기참조, 동어반복, 패러디, 시대착오, 건망증, 혼돈 등을 도입한다. 이들은 리얼리즘의 가상을 무너뜨리는 정도가 아니라, 리얼리티 자체가 허구의 합성물이라고 본다. 포스트 모던적 작품에는 비일관성과 불확실성, 머뭇거림, 다성성, 절충주의, 파편성 등 통일성에 대한 의문으로 가득 차 있다. 포스트 모더니스트에게 진보성이란 진부성이 되어버렸고, 근대의 독창성과 새로움의 추구는 공허한 것이었다. 이것은 근대성의 근간이 되었던 주체 개념이 변화된 것과도 관련이 있다. 자유롭고 능동적이며 자기 동일적 주체라는 휴머니즘은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적절치 못한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허버트 마르쿠제는 근대의 상징인 프로메테우스를 대신하는 새로운 주체로 오르페우스, 나르시소스, 디오니소스를 지명한다. 이들은 프로메테우스적인 비전이 파악하지 못한 평화로움과 피동성의 기쁨, 감각적 나태, 신화적인 환희, 자연에 대한 정복이 아니라 일치된 상태를 추구한다. 이것은 그가 대변했던 60년대의 히피문화에서 꽃피운 바 있다. 그 이후 정보화 사회의 전자매체가 야기하는 무한한 자기반사적인 상황은 나르시시즘적인 경향을 더욱 부추켰다.

테리 이글턴은 포스트 모더니즘 문화가 보여주고 있는 동시대의 주체는 자본주의 초기 국면에 등장했던 분투형의 행위자와는 달리, 분산되고 탈중심화 된 그리고 윤리적 본질이나 심리적 내면성이 제거된 여러 가지 성적 집착들의 집합체에 불과하다고 본다. 근대적 주체와 더불어 휴머니즘적인 의식철학, 인문학 등은 위기에 빠졌고, 후기 자본주의의 강력한 대중문화와 더불어 파편화된 정신과 신체가 난무한다. 피들러도 새로운 시대는 묵시론적이고 비합리적이며 낭만적, 감상적이며, 논리혐오증과 에언자적 무책임성에 바쳐진 시대이며, 자의식은 불신되고 분산된 정신분열증적인 주체가 번성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테리 이글턴이 지적하듯이 후기 자본주의의 잘못된 점은 이런저런 욕망이 있다는데 있지 않고, 그 욕망이 충분히 자유롭게 유통되지 못하다는 사실에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무정부주의와 정신분열증적인 자아를 모더니즘으로 부터 물려받았으나 모더니즘이 가졌던 현실과의 비판적 거리는 제거되었다. 포스트 모던적 주체의 끝 모를 자의성과 비대해진 주관성은 ‘퇴보하여 해체상태에 있는 모든 시대는 주관적이다’라는 괴테의 말을 떠오르게 한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에는 무분별한 해체 뿐 아니라 타자성의 재구축이라는 또 다른 얼굴이 있다.

II 부. 타자로서의 작가

미술은 자율성을 쟁취하자마자 사회로부터 소외되기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는 미술사의 주요 줄거리를 이룬다. 그러나 예술이 사회로부터 소외되었다든가 해방구로서의 역할을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또 다른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예술은 한정된 현실원리를 전복하고자 하는 욕망을 원동력으로 가지는 영역이기도 하다. 그것은 타자와 소수의 영역이며, 극도의 이질적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 물론 소수라는 말은 엘리트적인 뉘앙스와, 자본/ 노동의 구도에서 비롯되는 비민주성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 소수란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들이면 누구나 가담하고 있는 보편적인 게임논리의 승리자로서 물질적 부의 소유하고 있는 소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현대미술의 무대이자 배경이 되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는 겉으로는 다채로운 것을 표방하는 것 같지만, 그 근저에는 거대한 전체주의가 흐르고 있다.

소위 말하는 ‘문화의 시대’가 왔다고 해도, 진정 예술가의 시대는 아니며, 이전의 궁핍했던 시대보다 예술가들은 사회와 더 큰 괴리감을 가지고 있다. 예술이라는 말이 자본주의와 더불어 역사적으로 생겨났으니, 자본주의의 쇠퇴와 함께 사라질 것인가? 아니면 낡은 이론가들이 주장하듯이 예술이여 영원할 것인가? 예술이 가지는 많은 미덕 중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은 그것의 이질성이다. 질 들뢰즈에 의하면 예술작품에 의해 드러나는 본질은 하나의 차이, 즉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차이이다. 존재를 구성하고 우리가 그 존재에 대해 사유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바로 차이라는 것이다. 이질성은 소위 말하는 다원주의를 구성하는 한 색깔이 아니다. 그것은 억압적인 현실의 질서를 교란시키고, 때로는 또 다른 비전을 제시해 줄 수 있는 적극적인 의미를 지닌다. 예술은 단지 제도 속의 알리바이가 아니라, ‘세상에 대한 특정한 태도’인 것이다.

뤽 페리는 [미학적 인간]에서 지난 시대의 ‘화해의 철학’(헤겔 같은)과 니이체의 ‘이질성의 철학’을 대비시킨다. 의식은 오직 ‘서로 소통하려는 요구의 압력 하에서 발전된 것’(니이체)일 뿐이다. 그 결과 인간은 오로지 소통 가능한 것, 타인과 나눌 수 있는 것, 즉 공통적인 것만 의식하게 된다. 소크라테스에 의하면 오류는 다양한 반면, 진리는 스스로 유일한 것이고자 한다. 진리는 모든 시대 모든 곳에서 모든 사람에게 유효하다고 자처한다. 바로 이런 점에서 진리는 ‘민주적’이고 ‘서민적’이며 또한 니이체가 부여하는 의미에서 ‘반동적’인 것이다. 니이체는 ‘플라톤 이래의 모든 철학’을 특징 지어온 동일성의 범주에 대항하여 ‘차이’의 철학을 실행하고자 한다. 니이체에 의하면 참된 것이란 이제 동일성, 투명성, 조화가 아니라 생의 활력의 다양성인 순수한 차이가 되었다. 니이체는 근대적 개인주의의 확고한 중심을 부정하고 인간은 매순간 서로 결합되고 투쟁하는 힘들의 다양한 여러 중심에 지배된다고 본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기 보다는 힘의 중심들 간의 통제 불가능한 갈등의 산물인 것이다. 즉 주체의 자율성이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뤽 페리는 니이체의 주체란 더 이상 의식으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분열된 것이며, 코기토의 시대, 즉 의식 아래서 자기 자신 속에 갇힌 ‘나는 생각한다’의 시대는 끝났다고 강조한다. 자아가 더 이상 자신의 의식의 투명성 속에서 자기 자신에게 동일한 형이상학적 주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분열된 주체, 여러 능력들 가운데 있는 해석능력, 하나의 순수한 관점을 의미하는 것이다. ‘실제 삶 속에는 다만 강한 의지와 약한 의지가 있을 뿐이다’(니이체) 뤽 페리에 의하면 니이체주의에서 예술은 새로운 상대성의 개념, 주체도 객체도 없는 새로운 개인주의가 가장 본래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탁월한 장소로 간주된다. ‘객관성과 주관성이라는 용어는 존재하지 않으며 해석하는 주체도 해석해야할 대상도 없이 오직 해석만이 있을’(니이체) 때, 예술이 차지해야할 높은 위치가 정당화 된다. 여기에서 예술은 단순한 하나의 해석으로서, 순수한 평가로서 제시되고 가상으로 작용하며 환상을 만들어 낸다.

그리하여 예술은 지적 활동을 위시한 다른 모든 활동보다 더욱 참된 것으로 나타난다. ‘가상, 환상, 속임수, 생성, 변신에의 의지는 진리, 실재, 존재에의 의지보다 더 심원하고 더 형이상학적이다’, ‘생이 가능한 것은 오직 예술 속에서이다’(니이체) 19세기의 유럽문명을 바라보며 니이체는 절대 신의 죽음 및 허무주의의 출현을 예시했다. 그는 위대한 변증론자인 소크라테스의 정신에 대하여 환멸 했다. 대신에 그는 강력한 유미주의 정신을 가지고 모든 체계 제조자들을 불신했으며 예술가로서 무지와 망각을 배워야 한다고 역설했다. 니이체의 건망증에 걸린 건강한 동물처럼 망각은 새로운 시대의 가치가 되었다. 포스트 모던적 역사의식도 자신에 대한 과거 또는 미래의 대안을 망각하도록 하기 위해 역사를 지워버리거나 여러 가지 스타일로 공간화 시킨다. 무겁기만 한 역사는 ‘능동적 망각’(니이체)으로 대체되어‘지금 여기’의 영원한 현재가 찬양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예술적 정치적으로 하나의 이완을 나타내며, 의미의 불확정성을 강조한다. 여기엔 모던적인 새로움과 독창성의 감각이 소멸되고 무한한 회귀, 반복성이 두드러진다. 이곳은 미궁과 허구의 세계이며 억압된 것들이 복귀하는 초이질적 세계인 것이다.

그것은 또한 텍스트로서의 세계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 후기구조주의자들은 텍스트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이러한 사상의 선구자 또한 니이체라고 할 수 있는데, 가상과 실재가 가상으로 통일되는 니이체의 세계관에 의하면, 최고의 미적 가상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술이 삶의 중심에 놓인다. 그는 미에 우월성을 부여하면서 적극적이고 강력한 유미주의를 선포한다. 미적인 것의 창조성을 인간의 삶의 중심부에 놓으면 예술, 언어 혹은 담론은 그 자체의 현실을 창조하게 된다. 바르트는 [글쓰기의 영도]에서 ‘언어가 없는 생각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작가는 언어의 기호들이 자의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자의적인 언어기호들을 정립시키는 것, 즉 상징들을 생산하는 자이다. 그러나 바르트적 관점에서 그러한 기호의 생산이란 그자체로 자명한 과정이 아니다; ‘처음부터 보편적인 의미에 대한 어떠한 의지도 없었으며 단지 그자체로 암흑이었던, 지속되는 작업의 파편들만이 있었다’(바르트) 주체는 텍스트 속에서 ‘타버리게’ 되며 동시에 자신을 파편화 된 것으로 간직하게 된다.

페터 뷔르거는 [지배자의 사유]에서 바르트는 비평가가 되면서 그에게 우연히 부과된 증인의 역할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 들였다고 지적한다. 바르트는 자신이 오로지 일상사에 관여하지 않음으로서 중요시되는 사건의 증인으로 존재한다. 증인은 자신이 본 것에 대해 보고할 수 있지만 그것은 체험자의 시각으로부터 표현할 수는 없다. 결코 표현은 없으며 오직 그것에 대한 동경만이 있을 뿐이다. 사회는 작가를 인정하는 동시에 그와 거리를 둔다. 그는 바로 자신의 배제된 존재를 통해 사회에 통합된 사람이다. ‘예술은 실패한 참여이다’(바르트) ‘차이’를 추구하는 포스트 모던적 세계에서는 미적 영역이 중요해 진다. 특히 예술은 세계에 도전하는 다름, 즉 광기를 제공하고 원초적인 야생성을 회복하기에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광기에 의해 텍스트는 ‘빈 공간, 침묵의 순간, 대답 없는 물음, 화해 없는 불화’(미셸 푸코)를 열어 보인다. 예술가는 의미체계를 수단으로 의미를 전달하기 보다는 무의미와 침묵, 애매함, 다의적 세계를 보여준다. 이는 근대의 동일성의 원리를 벗어나 초이질적인 것, 타자적인 것을 구성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지만,볼 수도 없고, 보여줄 수도 없는 어떤 것이 있음을 보여주는 일이다’(리오타르)

뤽 페리는 포스트모던이란 단적으로 표상에 대한 철학적 거부를 의미한다고 요약한 바 있다. ‘차이의 철학’은 유별남과 신기함을 예리하게 지각할 수 있는 침착한 인식상태를 유지하기 때문에 예술을 중요시 했던 월터 페이터의 유미주의를 연상시킨다. 19세기 말 유미주의와의 차이는 물적 토대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새로운 유미주의는 정보혁명이라는 보다 전면적인 기호의 세계를 토대로 하고 있다. 이같이 예술은 동질적인 세계에다 도전적인 다름을 제기한다는 점에서 전복적이다. 이리하여 우리는 오랜 우회 끝에 다시 예술로 다시 돌아왔다. 새로운 유미주의는 세계를(모든 것을) 텍스트로 보고 또 그 텍스트를 해체하고자 하는 점에서 전복적 또는 파국적이다. 이는 근대적 계몽의 합리성만큼이나 전제적이고 허무주의적이며 반민주적인 색채를 띈다. 마샬 버만은 1970-80년대의 파리의 후기 구조주의자들은 실재 세계에 대해서는 말하는 것조차 의미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어떤 행동이나 위험에도 가담하지 않고 자신의 책상 위에서 초급진적으로 될 수 있었다고 하면서, 이를 ‘눈물 없는 허무주의’라고 비판한 바 있다.

19세기나 20세기 전반의 아방가르드는 오늘날의 문화적 환경(모든 것을 포용하여 무용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에서 부적절한 공격부대로 비추어진다. 그 대신 학문, 기술, 예술의 실험적 ‘전위’가 탄생하고 있다. 이들은 칼리니스쿠가 지적하듯이 미래파적인 기관총으로 시끄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전자 시대에 걸맞게 더 평화롭고 정교한 탐지장치를 사용하는 고도의 전문화된 ‘후위’로 나타난다. 투사는 이제 보편적인 것과 진보를 외치는 영웅이 아니라, 보다 특수한 전문가--그러나 근대적인 의미의 분업화, 파편화된 전문가가 아니다--로 나타난다. 이것은 격동의 20세기를 헤쳐 오면서 어떤 이데올로기도 더 이상 총체적 현실에 대한 확신할 만한 근거를 대주지 못함이 드러났기 때문에 더욱 호소력이 있다. 새로운 ‘전위’는 어떠한 유토피아적인 비전 없이, 어떠한 깃발도 없이 조용히 ‘투쟁하는’ 예술가이며, 타자 중의 타자로서 자신의 타자성을 최대한 발현시킴으로서, 해체의 폐허 속에서 새로운 가치를 일구어 내는 실천가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의 무대는 후기 자본주의의 기호화 심미화 된 사회 환경(또는 텍스트로서의 세계)이다. 그는 이 새로운 세계 속에서 주변성과 결절, 간극의 지점을 탐사하며 불확실성과 혼돈을 감식하는 자일 것이다.


출전; 클래이아크미술관 작가와의 대화 강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