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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정보-김병철 : 배고픈 사람들

sosoart 2012. 11. 19. 16:25

 

김병철 : 배고픈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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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쓰는 넋두리.


거의 매일 어두운 비닐하우스 작업실에서 매캐한 먼지와 줄담배를 피우고, 머리를 짓누르는 삶의 무게를 느끼며 사는 것이 이제는 너무 외롭다.
하루 종일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작품과 시름할 때는, 문득 내 자신이 이제는 미쳐가고 있구나하는 자괴감마저 든다.
작품을 하는 것이 대단하고 위대한 행위도 아니건만, 매일매일 습관적으로 집착하는 나의 일상에 때론 몸서리가 쳐진다.

하루 종일 혼자 있는 것이 외로워서 켜둔 라디오에서는 대선을 앞 둔 정치가들의 실랑이와 변명이 매일 쏟아져 나오고, 경제가 아직도 하수구에 처박힌 종이배처럼 갈 곳을 몰라 휘청이고 있다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씨발, X 같은세상’이라는 말이 튀어나오기도 한다.

또,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전 세계를 뒤흔들며 빌보드 차트1위가 눈앞이라는 뉴스앵커의 흥분된소리에, 비닐하우스 구석자리에 널브러져있는 나의 조각들은 너무나 초라하고 참담해 보이기까지 한다. 음악에 저리도 열광하는 대중을 보며, 우리 조각은 저렇게 대중과 호흡하고 즐길 수 없는지, 미술은 정말 소수만을 위한 몸부림은 아닌지 곱씹어보기도 한다. 과연 미술은 우리 문화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고전주의에서 예술가들이 귀족을 위한 유희의 작업이었다면, 21세기에서도 우리는 먹고살다가 이제는 좀 더 다른 색다른 놀이를 찾는, 그러다 다른 평범한 놀이가 아니라 다른이로부터 고상하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 부유층들의 장단에 맞추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루하루 먹고 살기도 힘든데, 나는 이 초라한 비닐하우스 안에서, 오늘도 혼자 고상한 예술가임네 하며, 혼자 담배를 피우고 있는 스스로에게 ‘너 지금 무슨 짓거리를 하고 있니?’라는 질문을 던져본다.

대중과 현실의 벽은 높기만 하고 대중의 마음을 공유할 수 없다면, 이제 그만, 정말 이제그만 손에 쥐고 있는 작업도구를 내려놓고 싶다. 아침이 되면 눈을 뜨고 또 하루를 살아가듯 오늘도 작업실 문을 들어서는 나의 모습을 발견하며.


2012.10.25



배고픈 사람들



이돈수


김병철의 조각에는 사람이 있다. 저마다 이름표를 하나씩 받아 들고 홀로 서 있거나, 군상을 이루며 뒤엉켜 있다. 가을 이 맘 때면 그들은 전시장으로 나들이를 한다. 작가는 그들을 데리고 이제 아홉 번째 외출을 힘든 발걸음으로 준비하고 있다. 외롭고 지친 작가의 모습 앞에 가을 하늘은 청명하고, 나뭇잎은 하염없이 예뻤다. 그냥 돌아가는 세상에서 그냥 돌면서 살면 그 만인 것을, 궤도를 벗어난 작가는 저만치 떨어져 물끄러미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또 그 속에 갇혀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을 새기고 있다.


첫 개인전 때부터, 그의 작품을 앞에 두고 평 아닌 평을 몇 차례 써왔다. 작가에게 있어서는 다양한 비평가의 평을 받고 다양한 시각을 제공받는 것이 최선일 테지만, 미안하게도 그 몇 번의 기회를 빼앗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 관해 몇 편의 글을 쓰면서 행복했었다. 글을 쓸 때에는 흩어져 있던 내 시선이 작품과 맞닿아, 작품이 뿜어내는 무수한 이야기를 듣으면서 진지한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 대화는 몇 일 아니 몇 주가 지속된다. 그리고 나는 어떻게 그와 나눈 대화를 정리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안고 펜을 든다. 어떤 이는 미학과 철학 책에 나오는 이름들을 언급하고, 또 어떤 이는 유명 작가와 작품의 조형 정신을 공유한다며 다양한 이름을 나열하면서 글을 쓴다. 대부분 글쓴이의 생각을 중심으로 그들의 체계 안에서 작품을 해석해 버리고 나면, 오랜 시간 단장하고 전시장으로 나들이한 작품은 이미 죽어가고 있음을 느낄 때가 많았다. 전시장의 작품은 그들이 살아 움직이기 위해 작가의 품을 떠나 작업실에서 나왔는데, 어떻게 내 글이 그들을 살릴 수 있을까? 라는 고민은 글을 쓰기 시작 하면서부터 나를 괴롭힌다. 그래서 내 사고의 틀 속에 끼워 맞추어 해석하고 재단하지 않고, 열린 마음으로 작품과 대화한 내용을 이야기 하기로 한다.


이번 전시의 제목은 “배고픈 사람들”이다. 제목을 받아 들었을 때 머리 속에 스쳐 지나가는 내 삶 속 경험의 조각이 있다. 하나의 조각은 인디 시인 가수 백조와 조씨의 “거지폴카”이다. 그 가사는 이러하다. “우리는 외롭고 불쌍한 사람들 언제나 괴롭고 배고픈 사람들 애초에 채우지도 못할 배를 갖고 태어난 미련한 사람들 거지새끼들 욕망이 커져가는 속도를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으니 우리는 언제나 굶주려있다네 더러운 거지새끼들”. 들리는 데로 썼기 때문에 문장부호는 생략했지만, 충분히 뜻은 통한다. 그들의 재미있는 다른 노래와 마찬가지로 인간들에 대한 이야기다. 또 다른 조각은 동물들과 관계된 두 이야기다. 한번은 깊은 산중에 위치한 한 외국 작가의 집을 방문한적이 있었다. 그의 집 거실에는 각각의 공간을 차지하고 자유롭게 노니는 예닐곱 마리의 고양이들과 그 수에 해당하는 닭들이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들은 너무나 평온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의아한 마음에 그들이 서로 싸우지 않느냐고 물어보았다. 대답은 항상 이런 모습이라고 했다. 동물들도 배고픔의 욕망이 채워지면 DNA에 내재된 본성까지도 바뀔 수 있다는 점에 놀랐다. 또 하나는 후배 집에서 키우는 140 킬로의 돼지 이야기다. 미니돼지로 분양 받았는데 키우다 보니 일반적인 형상의 거대한 돼지가 되었고, 키운 정 때문에 이렇게 살고 있단다. 그의 돼지와 함께 사는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재미나다. 인간이 먹는 음식을 먹는 그 돼지는 인간의 기호에도 가장 맛있다고 생각하는 부분만 먹고 나머지는 먹지 않는단다. 그가 규정한 공간적 영역과 음식? (사료)만 존중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한다. 집을 비운 사나흘 동안에도 배변은 집에서 하지 않고, 후배가 오기를 기다리며 참고 밖에서 처리한다고 한다. 욕망이 채워진 동물의 절제된 모습은 아름답게까지 보였다. 자연 속의 그들의 모습도 그러할 것이라고 추정해본다면, 인간이란 도대체 무엇인가를 되물어 볼 수 밖에 없다.

김병철의 조각은 노래가사와 같이 욕망의 한계를 모르는 추한 인간들의 모습에서 시작한다. 그의 작품은 욕망으로 성형되지 않은 우리의 본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는 욕망의 이름으로 가꾸어진 모습으로 우리 본래의 모습을 부정하고 부정해보지만, 작가가 보기엔 우리의 모습은 왜곡되어 뒤틀려있다. 그 것과 마주한 우리는 생경하고 다소 촌스러워 보이는 색채와 거침없이 드러내는 또 다른 욕망의 상징인 남자의 성기의 모습에 거부감을 감추지 못한다. 비록 예술이라는 이름 아래 미메시스(Mimesis)한 인간의 모습이지만, 일반인의 눈으로 즐기기엔 좋지 않고 불편한 모습이다. 이것만 없애면, 저것만 없애면 예술가로 성공할 수 있을 거야 라는 말을 많은 동료 작가들은 던진다. 작가는 그도 인간인지라 많은 고민을 하지만, 그와 나는 변하지 않는 결론 “갈 때까지 가보자”에 도달한다.

해부학강의를 오래한 그가, 또한 학생들 사이에서 해부학 전공 선생님으로 착각을 할 정도로 해부학에 조예가 깊은 그가, 대중이 지향하는 외형적 아름다움을 모르는 바는 아닐것이다. 한국사회에는 외모의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을 만족시켜주는 직업 군이 많이 있는데, 그 중 상상력과 창의성 그리고 조형의식이 가장 없는 직업 군의 사람은 성형외과 의사이다. 우스개 소리로 만약 성형외과의사와 조각가가 합작하여 판에 박힌 성형이 아닌 예술이라는 단어가 포함된 성형 장르를 개척해 낸다면, 작가의 삶은 지금처럼 고단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어찌하랴 작가는 욕망의 이름으로 장식되고 훈장처럼 덧씌워진 모든 요소, 비교적 팔기 좋은 작품의 요소를 우리에게서 제거하여 작품화하는 것을 천직으로 삶고 있는 것을.

이번 전시회에 처음으로 선보이는 작품 형식은 <만인만상>, <먹이 사슬>, <세상살이>, <소년의 꿈>, <공포>라는 제목의 유화물감으로 채색된 군상을 부조한 작품이다. <세상살이>를 제외한 네 작품에는 경계가 지워진 틀 안에 서로를 물어 뜯는 욕망에 굶주린 배고픈 사람들의 형상을 담아내고 있다. 먹어도 먹어도 끝날 줄 모르는 허기는 우리를 <공포>스럽게 까지 한다. 자본주의와 기술과 과학의 발전을 바탕으로 하는 맹목적인 진보에 대한 환상에 사로 잡혀 도시화되고 세속화된 세상에 노예화된 인간의 군상,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고 먹히는 <먹이 사슬> 속에서 꼼짝 달싹 못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또한 정치적, 역사적, 문화적 틀 안에서 기억을 공유하는 공동체 속에서 일어나는 삶의 양상을 표현하고 있다. 그 속에 당신과 대립하는 내가 있고, 또 당신들과 대립하는 우리가 있다. 배고픈 나와 우리가 있고 또 더 배고픈 너와 당신들이 있다. 모두는 한계 지워진 틀 속에 갇혀 벗어나려는 혁명적인 의지도 없이 당신과 나, 당신들과 우리 사이의 적대적 관계의 존재를 형상화했다. 그 속에서 <소년은 꿈>을 꾸고, <다람쥐 챗바퀴> 돌 듯 열심히 살아가는 도시인이 보이고, 많이 먹어도 배고픈 승자는 그들 만의 법칙, <승자의 법칙>을 보여주고, 그 법칙의 잔인함에 <악몽>을 꾼다.

<세상살이>에는 먹고 먹히는 장면을 형상화하지는 않았지만, 그 속에 빼곡히 들어찬 초췌하고 왜곡된 인간의 형상들은 그리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그림 중간에 위치한 발가벗은 붉은 형상은 정면성(frontality)이 강조되어 마치 동서양의 종교화에서 볼 수 있는 절대자처럼 보인다. 그는 얼굴만 형상화한 군중 위에 온몸을 드러내며 교조적인 상징의 대상으로 형상화되어 나타난다. 군중은 그 아래에서 길들여지고 자유를 구속당한 인간의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는 듯하다. 우리 사회에서 붉은 악동은 정치, 종교, 경제 등의 다양한 분야에 존재하면서 우리 사회를 극단으로 몰아가 갈등의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 붉은 악동에 사로잡혀 있는 군중의 모습은 서로가 서로를 잡아 먹고 또 먹히는 형상을 표현한 작품보다 더 비극적으로 다가온다.

앞에서 본 네 작품이 비정상적인 현실과 욕망의 깊이를 모르는 인간들 사이에서 발원하는 ‘너와 나’, ‘당신들과 우리’의 적대적 관계 속에서의 어울림이라면, <세상살이>는 앞의 네 작품과 달리, 군중과 그 군중을 억압하는 타자 사이의 적대적 관계를 설정하고 있다. 먹고 먹히는 장면을 묘사한 부조는 칼 슈미트(Schmitt Carl)의 『정치적인 것의 개념』에서 나타나는 너와 나 사이의 사적인 적(inimicus)이라면, 붉은 악동이 등장하는 <세상살이>는 모두의 지탄의 대상이 되는 공적인 적(hostis)으로 우리사회 내 집단과 집단의 반목과 적대화를 표현한다. 작가는 개인과 집단의 적을 통해 우리사회에 내재된 사회적 긴장상태와 그 속에 살아가는 우리들의 불안전한 마을을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세상에서 작가는 그의 작품의 입을 빌어 조용히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 있다. 마치 세기말(fin de siècle) 프랑스의 후기인상주의 화가 고갱이 1897년 그의 작품을 통해 물었던 것과 같은 질문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 ( Doù Venons Nous? Que Sommes Nous? Où Allons Nous?)>를 21세기 욕망으로 가득 찬 배고픈 사람들이,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출처: 김달진 미술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