同樂茶軒-문화와 예술/詩가 있는 뜨락

[김용택의 시 이야기] 내가 살던 집터에서 마지막 기념 촬영

sosoart 2013. 8. 17. 14:41

[김용택의 시 이야기] 내가 살던 집터에서 마지막 기념 촬영 김용택의 시 이야기 등록일2013.08.13
내가 살던 집터에서 마지막 기념 촬영
마을 길이 넓혀지고 동시에 산업화가 시작되면서 마을은 급격한 변화를 맞이했다. 마을을 떠나는 사람들이 생긴 것이다. 집들이 사라지기 시작한 지가 오래 걸린 것 같았지만 내 눈에는 순식간이었다. 텅텅 비어가는 마을과 묵어가는 논과 밭들이 이제 산이 되어버렸다. 나는 사회경제적으로 마을 공동체가 온존되어 있을 때 태어나 마을이 서서 붕괴해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본 사람이 되었다. 구체적이고 실질적이고 그리고 눈물겨운 일들이었다.
논두렁콩이 잘되었다./구멍이 숭숭 뚫린 런닝구, 어머니의 살은 콩알처럼 햇볕에 탄다./콩은 베지 않고 꺾는다./뿌리째 뽑히기도 해서 흙을 탈탈 털며 휴대폰을 받는다./응, 응, 응, 그래 잘 있다. 너는? 올해는 콩들이 다닥다닥 붙었구나./그래, 한 달이 크면 한 달이 작기 마련이다./올라 갈 때가 있으면 내려 갈 때가 있지./말은 그렇게 하지만, 어머니, 그건 이제 야생 감나무에게도 해당되지 않는 옛말입니다./나는 다달이 작아지고, 넘을 고개는 오를수록 까마득하게 가파르기만 합니다./내년이 있어서, 농사꾼들은 그래도 그 말을 믿고 산단다./퇴근 할 때 붓꽃을 꺾어 들고 강 길을 걸었다./아내는 강 건너 밭둑에서 나물을 뜯고/아이들은 보리밭 매는 할머니 곁에서/강 건너온 흰 나비를 ?으며 놀았다./할 말이 많은 날 아내는 오래 고개를 들지 않았다./저문 산을 머리에 이고 징검다리를 건너면/강물에 어른거리는/햇볕에 이마가 따갑다는 것을/아내도 알게 되었다. 바짝 메마른 입술,/하얀 수건을 쓰고 아내가 마당에 앉아 콩을 털 때쯤이면/마른 감잎들이 마당 구석으로 끌려갔다. 아이들은 달아나는 콩을 줍고/어머니는 강 건너 밭에서 콩을 가져왔다./뒤틀린 마른 콩깍지 끝에서 불꽃이 일고 콩깍지가 터지면서 다시 뒤틀리고/한쪽 얼굴이 까맣게 탄 콩이 튀어 부엌바닥으로 떨어졌다./강변에서는 찔레꽃 붉은 열매가 익는다. 콩이 많이 열기도 했구나./올해도 빈 콩깍지같이 빈 집 몇 채가 저절로 폭삭 내려앉으며,/뿌옇게 먼지를 일으키고 마을에서 사라졌다. 집이 사라지니,/저쪽 들길이 문득 나타나 텅 비었다./허망하다./벌레 먹은 콩잎, 그 구멍으로 햇살이 새어 들고,/구멍이 숭숭 뚫린 런닝구 사이로 어머니의 살은 붉게 탄다./우리 집 바로 뒤 당숙모네 집은 이제 영원히 사라졌다. - ‘내가 살던 집터에서 마지막 기념 촬영’ 전문, 김용택 지음



 

내가 사는 마을은 모두 서른다섯 가옥이었다. 제일 윗집 한수 형님네 집에서 제일 끝 집 윤환이네 집까지 2백 미터도 안 된다. 작은 뒷산에 기대 마을은 길었다. 마을이 자리를 잡기에는 이런저런 입지가 만만치 않다. 마을이 자리를 잡으려면 우선 햇볕이 좋아야 하고 물이 좋아야 하고 논과 밭을 만들 땅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 동네는 이 조건 중 딱 한 가지, 마을 앞에 길게 강물이 흐르는 것 말고는 마을이 생기기엔 마땅한 지형이 아니다. 옛날 임진왜란 때 피난처였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임진왜란 때 문 씨와 양 씨가 피난을 왔다가 머물러 살게 되고 그 후에 김 씨가 다시 이사를 와서 살았단다. 마을이 생긴지 5백 년이 되었지만 이제 내가 사는 마을은 고작 열 가구 정도가 산다.
나는 1948년생이다. 전북 임실군 덕치면 장산리라는 이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지 2년 만에 6·25 전쟁이 일어났다. 나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강 건너편 밭머리 굴속으로 피난을 갔다. 그리고 어느 날 마을이 모두 소각되었다. 한 채의 집도 안 남고 마을이 소각되고 마을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져 피난을 갔다. 우리는 순창으로 피난을 갔다. 전쟁이 끝나자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 마을로 돌아와 새로 집을 짓기 시작했다. 전쟁 통에 부모, 형제를 잃은 분들도 있었다. 이념적으로 갈라진 전쟁이어서 양쪽으로 갈라진 마음들의 상처는 컸겠지만 다시 마을로 돌아온 사람들은 새로 집을 짓고 농기구를 가다듬고 땅을 일구어가며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전쟁이 끝나지만 마을은 산에 남을 사람들과 그들을 잡으려는 사람들 사이에 긴장감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사람들은 결혼도 하고 아들딸들을 낳아 기르며 마을을 늘려갔다. 다른 동네에서 이사를 온 집도 있었다. 모두 가난했다. 가난이 전부였다. 그렇게 그들은 농경사회의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4·19 혁명은 그들에게까지 너무 먼일이었다. 마을에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은 5·16 군사쿠데타와 새마을 사업이었다. 그 바람은 거세었다. 초가지붕이 뜯기고 슬레이트와 기와지붕이 올라갔다. 마을 길이 넓혀지고 동시에 산업화가 시작되면서 마을은 급격한 변화를 맞이했다. 마을을 떠나는 사람들이 생긴 것이다.
우리 마을에서 최초로 마을을 떠난 사람은 종덕이 형님이었다. 어느 여름날 마을 사람들이 모두 마을 정자나무 밑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맑고 따가운 여름 햇살 속에 종덕이 형님이 웬 신사복을 입은 사람을 따라 정자나무 밑으로 들어섰다. 형님이 취직되어 도시로 간다는 것이다. 취직을 하면 월급을 받는다는 것이다. ‘취직’과 ‘월급’이라는 이 생소한 낱말이 주는 설렘과 낯섦과 불안과 기대가 교차하는 마을 사람들의 얼굴은 애매했다. 처음 듣는 불확실한 이 말이 풍기는 마을의 분위기는 묘했다. 그 사건이 이농의 시작이 될 줄은 그 누구도 그때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 일이 있은 후 어느 날 마을에서 두 명의 형들이 사라졌다. 콩을 퍼서 서울로 달아난 것이다. 마을이 발칵 뒤집혔다. 그 형들은 콩을 판값이 떨어지자 다시 마을로 돌아와 지게를 짊어지고 산을 오르긴 했지만 마음은 이미 콩밭을 떠났는지 거듭 사고를 쳤다. 이제 그것이 일상이 되었다. 형들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마을이 텅텅 비어갔다. 젊은이들이 사라지더니 이제 본격적으로 이사를 하기 시작했다. 빈집들이 생겨났다. 집들이 뜯겨 어디론가 사라졌다. 마을이 텅텅 비어가기 시작하더니 작년에 우리 동네는 열 가구 정도만 남았다.



 

집들이 사라지기 시작한 지가 오래 걸린 것 같았지만 내 눈에는 순식간이었다. 텅텅 비어가는 마을과 묵어가는 논과 밭들이 이제 산이 되어버렸다. 나는 사회경제적으로 마을 공동체가 온존되어 있을 때 태어나 마을이 서서 붕괴해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본 사람이 되었다. 구체적이고 실질적이고 그리고 눈물겨운 일들이었다.

우리 집 뒤에 당숙모네 집이 한 채 다 쓰러질 듯이 서 있었다. 어느 가을날 그 집에 폭삭 내려앉아 버렸다. 뒷집에 텅 비어버렸다. 갑자기 공황이 찾아 왔다. 무서웠다. 텅 비어버린 그 공간이 가져 다 준 그 허탈감은 나를 공포에 떨게 했다. 그리고 나는 이 시를 썼다. 텅 빈 마음속에 당숙모 가족들의 얼굴이 밥 먹고 놀고 울고 웃던 일상이 잠시 영상으로 떠올랐다가 먼지와 함께 사라졌다.
 
 
출처: KB레인보우인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