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을 길이 넓혀지고 동시에 산업화가 시작되면서 마을은 급격한 변화를 맞이했다. 마을을 떠나는 사람들이 생긴 것이다. 집들이 사라지기 시작한 지가 오래 걸린 것 같았지만 내 눈에는 순식간이었다. 텅텅 비어가는 마을과 묵어가는 논과 밭들이 이제 산이 되어버렸다. 나는 사회경제적으로 마을 공동체가 온존되어 있을 때 태어나 마을이 서서 붕괴해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본 사람이 되었다. 구체적이고 실질적이고 그리고 눈물겨운 일들이었다.
나는 1948년생이다. 전북 임실군 덕치면 장산리라는 이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지 2년 만에 6·25 전쟁이 일어났다. 나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강 건너편 밭머리 굴속으로 피난을 갔다. 그리고 어느 날 마을이 모두 소각되었다. 한 채의 집도 안 남고 마을이 소각되고 마을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져 피난을 갔다. 우리는 순창으로 피난을 갔다. 전쟁이 끝나자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 마을로 돌아와 새로 집을 짓기 시작했다. 전쟁 통에 부모, 형제를 잃은 분들도 있었다. 이념적으로 갈라진 전쟁이어서 양쪽으로 갈라진 마음들의 상처는 컸겠지만 다시 마을로 돌아온 사람들은 새로 집을 짓고 농기구를 가다듬고 땅을 일구어가며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전쟁이 끝나지만 마을은 산에 남을 사람들과 그들을 잡으려는 사람들 사이에 긴장감이 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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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을에서 최초로 마을을 떠난 사람은 종덕이 형님이었다. 어느 여름날 마을 사람들이 모두 마을 정자나무 밑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맑고 따가운 여름 햇살 속에 종덕이 형님이 웬 신사복을 입은 사람을 따라 정자나무 밑으로 들어섰다. 형님이 취직되어 도시로 간다는 것이다. 취직을 하면 월급을 받는다는 것이다. ‘취직’과 ‘월급’이라는 이 생소한 낱말이 주는 설렘과 낯섦과 불안과 기대가 교차하는 마을 사람들의 얼굴은 애매했다. 처음 듣는 불확실한 이 말이 풍기는 마을의 분위기는 묘했다. 그 사건이 이농의 시작이 될 줄은 그 누구도 그때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 일이 있은 후 어느 날 마을에서 두 명의 형들이 사라졌다. 콩을 퍼서 서울로 달아난 것이다. 마을이 발칵 뒤집혔다. 그 형들은 콩을 판값이 떨어지자 다시 마을로 돌아와 지게를 짊어지고 산을 오르긴 했지만 마음은 이미 콩밭을 떠났는지 거듭 사고를 쳤다. 이제 그것이 일상이 되었다. 형들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마을이 텅텅 비어갔다. 젊은이들이 사라지더니 이제 본격적으로 이사를 하기 시작했다. 빈집들이 생겨났다. 집들이 뜯겨 어디론가 사라졌다. 마을이 텅텅 비어가기 시작하더니 작년에 우리 동네는 열 가구 정도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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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뒤에 당숙모네 집이 한 채 다 쓰러질 듯이 서 있었다. 어느 가을날 그 집에 폭삭 내려앉아 버렸다. 뒷집에 텅 비어버렸다. 갑자기 공황이 찾아 왔다. 무서웠다. 텅 비어버린 그 공간이 가져 다 준 그 허탈감은 나를 공포에 떨게 했다. 그리고 나는 이 시를 썼다. 텅 빈 마음속에 당숙모 가족들의 얼굴이 밥 먹고 놀고 울고 웃던 일상이 잠시 영상으로 떠올랐다가 먼지와 함께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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