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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가 있는 마을미술, 그 숨겨진 이야기를 찾아서/ 고충환

sosoart 2014. 2. 14. 10:51

 

고충환

테마가 있는 마을미술, 그 숨겨진 이야기를 찾아서



현대인은 온통 상실의 시대를 살고 있다. 이런저런 존재론적 상실은 차치하고라도, 도시공학적으로 고향을 상실하고 골목길을 상실하고 공동체를 상실했다. 여기서 고향은 지정학적 장소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실제로도 대개는 고향을 등진 삶을 살지만, 여기서 고향의 상실은 존재론적 상실이며 상실감의 유비적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골목길은 어떤가. 그 폭이 너무 좁아 지나치는 사람과 스치지 않고선 지나갈 요량이 없다. 담장이 야트막한 경우라면 그 집의 세간이며 살림살이가 내 집처럼 훤히 들여다보인다. 재개발 붐이 일면서 그런 골목길이 사라졌다. 골목길이 사라지면서 구멍가게며 사진관, 이발소며 만화방이 덩달아 사라졌다. 그리고 골목길이 품고 있던 공동체도 사라졌다. 아님, 사라지고 있다. 

조르주 바타이유는 자본주의의 해악을 경제제일주의에서 찾는다. 경제제일주의는 효율성극대화의 법칙과 맞물린다. 따라서 경제성이 없는 것, 효율성이 떨어지는 것은 삶의 장으로부터 사라진다. 엄밀하게는 도태된다. 그러나 알고 보면 이렇게 사라지고 도태된 것들이 삶의 의미를 일깨워주는 경우가 많고, 아예 그것 때문에 사는 이유인 경우가 많다. 바타이유 자신이 이런 잉여에 의미부여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리고 말할 것도 없이 예술 역시 이런 잉여에 해당한다. 예술이 존재하는 이유는 바로 경제성의 논리와 효율성의 논리에 반하는 잉여를 적극적인 삶의 계기며 동력으로 전유하는 것, 곧 바로 바타이유가 에로스라고 부르는 것을 실천하는 것에 있다.    

그리고 여하튼 그렇게 상실된 것들 중에는 마을도 있다. 어쩌면 마을미술프로젝트는 사실상 그 의미가 축소되거나 왜곡된 마을의 진정한 의미를 되찾고, 마을과 함께 덩달아 상실된 공동체문화를 복원하는 일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을 것이다. 이런 마을미술프로젝트가 성공하려면 개별주체를 하나의 공동체로 묶어주는 구실을 찾아야 하는데, 그 구실이 다름 아닌 테마 곧 이야기다. 이야기는 인위적으로 만든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일종의 발견 내지 발굴과 관련이 깊은데, 개별주체의 정체성을 형성시켜준, 그리고 그렇게 개별주체의 인격의 일부인, 어떤 존재론적 원형 같은 것이며, 그 원형을 자각하는 순간 내지 계기 같은 것이다. 하나의 마을로 치자면 전설과 설화, 민화와 민담 같은 것이다. 때론 그 이야기가 숨어 있을 수도 있겠기에 발견이고 발굴이다. 

다시, 마을미술프로젝트가 성공하기 위해선 이런 개별주체를 하나의 공동체로 묶어주는 이야기, 하나의 마을을 다른 마을과 차별시켜주는 그 마을만의 원형적인 이야기를 발견하고 발굴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발굴된 이야기에 대한 겉뜻과 속뜻을 헤아리는 일이 요구된다. 필요하다면 인문학적 이해며 해석의 과정이 요청될 수도 있겠다. 이처럼 이야기를 발굴하고, 그렇게 캐내진 이야기의 뜻과 의미를 이해하고 해석한 연후에라야 그 이야기에 대한 조형적인 개입이 성공할 수가 있다. 이야기 자체도 해석(아님 이해?)해야 하고, 그 이야기를 조형으로 옮기는 일에도 해석(아님 번역?)이 필요하다. 이런 이중적 해석의 과정이 제대로 수행될 때 마을미술프로젝트는 비로소 그 성공을 기약할 수가 있게 된다. 


마을미술프로젝트가 2009년에 시작돼 2013년 현재 만 5년이 되었다. 그동안 이런저런 테마들이 제안되었고, 그 중 주목할 만한 아님 주제의식이 뚜렷한 편인 테마들을 한자리에 모아보았다. 먼저, 마을과 관련한 유명 인사를 테마로 제시한 경우로서 한국전쟁 이후 미군이 국내에 주둔하면서 생긴 사생아와 전쟁고아들을 돌본 펄벅 여사를 기리기 위해 설립한 펄벅기념관(경기도 부천시), <목마와 숙녀>로 유명한 박인환 시인의 문학 혼을 기리기 위해 설립한 박인환문학관(강원도 인제군), 무려 17년간 오직 단 하나의 소설 <혼불>을 집필하는데 진력한 최명희의 예술혼을 기리기 위해 설립한 혼불문학관(전라북도 남원시), 그리고 가야금으로 유명한 지역 출신의 악성 우륵의 음악 혼을 기념하는 경우(경상남도 거창군 생초리)를 그 예로 들 수가 있겠다. 

다음으론 한국의 근대사와 관련한 경우로서 1970,80년대 산업현장의 최전선을 지키며 경제발전을 견인해오다가 최근 산업구조가 재편되면서 사양길에 접어든 탄광촌마을(강원도 태백시 동점동), 한국 최초의 국제항으로 개항해 일본이 쌀을 수탈해가는 현장을 지켜봐야 했던 아픈 기억과 함께 최근에는 새만금으로 새로운 미래를 꿈꾸는 군산항(전라북도 군산시), 비록 지금은 불법으로 묶여 있지만 한때 동네 개도 만 원짜리 한 장 정도는 입에 물고 다닐 정도로 포경업이 성행했다는 고래마을(울산광역시 남구 장생포)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리고 지역의 생태환경이며 자연과 같은 천연조건을 관광 아이템으로 내세운 경우로서 수년전부터 00길 걷기 운동 붐을 불러일으킨 올레길(제주도 서귀포시 대평리), 아마도 인근의 고씨굴을 염두에 두고 개장했다가 여의치가 않아 현재는 문을 닫은 고씨굴랜드(강원도 영월)가 있다. 이외에도 ‘고추 먹고 맴맴’이란 동요의 발상지로서 동요마을을 테마로 제안한 경우(충북 음성군), 그리고 폐공산품 쓰레기를 재활용해 조형으로 되살려낸 정크아트를 통해 새로운 표현 가능성을 형식 실험한 경우(경기도 김포시 대명항)가 주목된다. 


펄벅기념관.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 심곡본동에 가면 펄벅기념관이 있다. 펄벅(1892-1973) 여사는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근 40평생을 중국에서 살았다. 부친과 연이은 남편의 선교 사업이 타지에서의 삶을 살게 한 것이다. 그런 연유로 펄벅에게는 사회봉사활동에 대한 남다른 소명의식이 잠재돼 있었다. 이런 사회봉사활동과 함께, 펄벅이라고 하면 단연 문학적 소양과 성취를 빼놓을 수 없다. 미국 여성으로는 유일하게 퓰리처상과 노벨상을 동시에 수상한 작가다. 1931년에 출판된, 그리고 1938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소설 <대지>는 빈농으로부터 입신해 대지주가 되는 주인공 왕룽을 중심으로 왕룽의 아내 오란과 세 명의 아이들의 삶이며 역사를 그린 장편소설이다. 한 가족사라는 프리즘을 통해 격동기 중국의 근대사의 한 단면을 들여다본 대하소설이다. 

펄벅은 작가와 함께, 사회봉사활동에 대한 남다른 소명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한국과의 인연은 이 소명의식이 그 계기가 됐다. 과거 한국군이 베트남에 주둔하면서 그랬듯, 미군 병사들이 아시아 여러 나라에 주둔하면서 생긴 미국계 사생아들을 돕기 위해 1964년에 펄벅재단이 설립된다. 펄벅재단은 한국을 시작으로(1965년 한국지부 설립) 현재 11개 나라에서 운영되고 있고, 미국 필라델피아에 본부를 두고 있다. 펄벅은 1967년 경기도 부천시 소사읍 심곡리에 소사희망원을 세워 향후 10여 년간 한국의 전쟁고아와 다문화아동들을 위한 복지활동을 펼쳤다. 그리고 2006년 9월 옛 소사희망원 자리에 펄벅기념관이 건립돼, 매년 9월이면 고인의 정신을 기리는 펄벅축제가 열린다. 한국에 대한 펄벅의 애정은 남달라서 1963년에는 한국의 수난사를 그린, 소설 <대지>만큼이나 작가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소설 <살아 있는 갈대>를 펴내기도 했다. 

여기에 작가들(펄벅문화마을 공공미술 프로젝트팀)은 심곡본동의 부천 남초등학교에서 펄벅기념관 사이 7백 미터에 이르는 구간을 펄벅 여사를 기리는 각종 조형물로 꾸몄다. 펄벅 여사의 실루엣과 한국의 전통적인 색동 패턴을 대비시켜 옹벽 위에 그린 벽화 <펄벅아리랑>에서는 펄벅과 한국과의 관계며 인연을 엿보게 한다. 펄벅 여사 기념관 동산에는 펄벅 여사의 초상(흉상)을 제작해 세웠는데, 철판에 레이저커팅 하는 방법으로 초상의 실루엣 형상을 표현했다. 세부가 생략된, 다만 가장자리 선으로만 암시되는 초상의 제목이 재미있다. <그림자>란 제목은 말하자면 텅 빈 초상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일까. 아마도 작가들은 펄벅의 실체를 단정하기보다는, 저마다의 상상력으로 펄벅의 실체에 접근하고 재해석할 수 있도록 열어 놓은 것이 아닐까. 그렇게 텅 빈 초상은 사실은 충만한 초상임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펄벅의 저작을 모티브로 한 입체조형물을 세웠다. 거대한 책 터널 형태의 이 조형물은 작가의 대표적인 소설 <살아 있는 갈대>를 재현한 것으로서, 저작을 통해 작가의 한국과의 남다른 인연을 음미하게 한다. 


박인환문학관. 강원도 인제군에 가면 박인환문학관이 있고, 박인환 거리가 있다. 하나같이 마을미술프로젝트가 들어서 지자체를 움직인, 그리고 그렇게 이뤄낸 성과란 점에서 중요하고 의미가 있다. 시인 박인환(1926-1956)은 1926년 8월 15일 강원도 인제군 인제면 상동리 159번지에서 박광선과 성숙향 사이의 4남 2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경성제일고보를 거쳐 평양의전을 중퇴하고 서울 종로에서 마리서사라는 서점을 경영하면서 시를 쓰고 시인들과 교류했다. 비교적 젊은 나이인 31세에 요절한 천재시인 박인환에게는 여러 수사적 표현들이 꼬리표처럼 따라붙는다. 이를테면 모던보이니 댄디보이 같은. 시 역시 비수 같은 날카로움과 서정적인 감미로움을 감각적으로 믹서해내고 있어서 긴 여운을 남긴다. 

시들 중 특히 <목마와 숙녀>, <세월이 가면>은 공교롭게도 두 곡 다 박인희 가수가 노래해 대중적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어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 한다, 는 구절로 시작되는 시 <목마와 숙녀>에는 목마와 함께 버지니아 울프가 등장한다. 목마는 아마도 상실한 것들, 잃어버린 것들, 돌이킬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그리움을 상징할 것이다. 그리고 버지니아 울프는 앵그리 영맨 곧 성난 젊은이들, 이라는 영국의 전위적인 문학 서클의 일원이었지만, 평생을 우울증과 자살충동에 시달렸다고 한다. 항상 주머니에 자갈을 넣고 다니던 작가는 남편의 손에 이끌려 정신질환으로 상담을 받은 다음날 우즈 강가에서 자살하는 것으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아마도 시인 박인환의 영원한 숙녀이며 분신으로 봐도 되겠다. 이와 함께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란 구절로 시작되는 시 <세월이 가면> 역시 스산한 가을바람에 낙엽이 몰려갔다 몰려오는 것 같은 회한과 탐미와 쓸쓸한 감정에 감싸이게 만들고, 애잔한 음색이 통렬하게 만든다. 술값 대신 지어준 시라고 한다. 

여기에 작가들(분주한 상자)은 시인 박인환 거리와 박인환문학관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산촌박물관 일대를 배경 삼아 박인환과 관련한 모티브로 조형물을 꾸몄다. 먼저, 박인환문학관 가는 길 초입에 박인환의 조상과 함께 시비 <목마와 숙녀>를 설치해 사람들을 유도하게 했다. 시인은 탁자를 앞두고 앉아있고, 탁자에는 평소 시인이 즐겼을 막걸리 주전자가 놓여 있다. 막걸리 주전자에는 사람들을 초대하는 시인의 애틋한 마음이 담겼을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시인 자신인데, 실제로는 음각돼 있지만 보기에는 양각처럼 보이는 묘한 조각이다. 미미하지만 보는 각도에 따라서 조각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탓에 어느 쪽에서 보든 마치 시인과 눈을 맞추고 있다는, 그리고 그렇게 시인과 대면(아님 대화?)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만든다. 

그리고 박인환문학관에 들어서면 문학관 앞 정원에서 또 다른 시인의 조상을 만날 수가 있다. 바람을 맞고 선 듯 휘날리는 넥타이와 함께 외부를 향해 열린 외투자락을 손으로 부여잡고 있는 자세가 형태 내부에 상당한 공간을 만들어 놓고 있는 조각이다. 손에는 아마도 집필할 때 썼었을 만년필이 들려져 있어서 시인의 문학 혼을 엿보게 한다. 아마도 시인의 시 세계를 바람 같은 시 아님 바람 같은 문학으로 해석했을 터이다. 시인의 열린 옷자락 안쪽에 마련된 벤치에 앉으면 마치 시인의 품안에 안긴 것 같은, 시인의 문학 혼을 수유 받고 있는 것 같은, 외풍 곧 외부의 바람으로부터 보호받고 있는 것 같은 안온함을 맞볼 수 있다. 여기에 시인의 목에는 센서가 장착돼 있어서 마치 육성으로 시인의 시와 노래를 직접 듣는 것 같은 행복한 경험을 하게 만든다.        

그리고 작가들은 박인환문학관과 문학관 가는 길의 초입에 해당하는 시인 박인환 거리 사이 공간을 시인의 시로 꾸며 사람들로 하여금 음미하게 했고, 각종 시를 모티브로 한 조형물이며 특히 목마를 소재로 한 조형물로 꾸몄다. 이를테면 <책 읽는 목마>라는 작품을 보면 목마 형태의 조형물에 어린이들을 위한 미끄럼틀을 설치하고, 몸통 내부에는 방을 만들어 놀이 공간 내지 작은 도서관으로 활용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과일 대신 시가 주렁주렁 열리는 <시가 열리는 나무> 등 조형물을 통해 시인의 문학 혼이며 정신이 후세에도 그대로 전해져 또 다른 형태의 결실을 맺기를 바라는 작가들의 마음을 담았다. 


최명희, 혼불문학관. 전라북도 남원시 사매면 서도리 노봉마을에는 작가 최명희(1948-1998)의 대하소설 <혼불>을 기념하는 혼불문학관이 있다. 2004년 10월 정식 개관했다. 문학관 내부에는 작가의 평소 집필실 그대로를 재현해놓고 있고, 소설에 등장하는 인월댁 베 짜기와 같은 체험시설을 갖추고 있다. 이외에도 혼례식 장면, 강모 강실 소꿉놀이, 액막이연 날리기, 효원의 흡월, 청암부인 장례식, 춘복이 달맞이 장면 등 소설 <혼불>의 주요 내용이며 장면 10점이 디오라마(작은 공간 안에 대상을 설치해 놓고 틈을 통해 볼 수 있게 한 입체 전시)로 구성돼 있어서 소설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혼불문학관이 있는 노봉마을과 그 주변에는 종가, 노봉서원, 청호저수지, 달맞이공원, 노적봉, 서도역 등 소설에 등장하는 주요 장소들이 대개는 그대로 남아 있어서 마치 소설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실감을 준다.   

남원시의 경우에는 마을미술프로젝트 주최 측으로부터 2010년, 2011년, 2012년 세 차례 연속 지원을 받았는데, 발전 가능성이 보이는 특정 지역이며 아이템을 집중 발굴 육성한다는 취지에 해당하는 경우라 하겠다. 이에 힘입어 남원시는 작가들(행.희.낭 프로젝트)과 의기투합해 프로젝트를 적극 지원하고 나섰는데, 작가들의 작은 움직임이 지자체를 움직인, 그리고 그렇게 사업을 확장해 본격적인 궤도에 올려놓은 사례가 되겠다. 이를테면 시와 작가들은 2010년에 최명희의 소설 <혼불>의 근원지인 옛 서도역 일대를 문화공간으로 조성한데 이어, 2011년에는 옛 서도역 내 빈 역사와 관사 등 5개의 유휴공간을 미술관으로 조성했다. 역사 주변에는 소설 속의 이야기를 토대로 정크아트 작품과 아트미로를 제작하여 관람객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했다. 또한 지역 경제 활성화 차원에서 아트 레일바이크를 운영해 지역주민들의 적극적인 지지와 참여를 이끌어냈다. 이로써 문학과 미술이 조우하는 소위 혼불문학미술관 내지 혼불문학뮤지엄이라는 새로운 개념의 프로젝트를 성사시켰다. 향후 다른 유사한 성격의 프로젝트를 위한 적절한 적용 사례로 볼 수가 있겠다. 

특히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남원 서도역은 주변 마을과 함께 최명희의 소설 <혼불>의 주요 무대가 되고 있다. 문학적인 가치와 함께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준 작가 최명희가 심혈을 기울여 집필한 <혼불>의 가장 중요한 배경이 바로 서도 기차역인 것이다. 또한 혼불문학관 자체는 2004년 10월 개관한 이후 관광객이 꾸준히 찾고는 있지만, 대개는 문학 애호가들이어서 아직 대중적인 관광지로서의 인식은 약한 편이다. 이와 함께 이 지역이 비교적 소외된 시골 마을이어서 혼불문학관 이외에는 이렇다 할 문화적 메리트가 없다는 점, 근대 유산으로 복원된 서도역의 시골스러움과 주변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해치지 않으면서 조형적인 개입과 조화를 이뤄내야 한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소설 <혼불> 자체에 대한 텍스트 분석과 문학적 해석에 독창성과 깊이가 요구된다는 점, 그럼으로써 문학과 미술의 성공적인 만남을 이끌어내야 한다는 점이 작가들로 하여금 한편으론 의기소침하게 했고 다르게는 의기충천하게 했다.  

2010년과 2011년에는 서도역을 배경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2012년에는 서도역으로부터 혼불문학관 쪽으로 약 500여 미터 가량 떨어진 곳에 같은 주제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 장소는 최명희의 본가이면서 소설 <혼불>의 청암 부인이 실제로 거주했던 종가가 있는 마을이지만, 현재 이와 관련한 흔적은 전혀 남아있지 않아서, 작가들은 그 흔적이며 향기를 조형으로 되살려내야 하는 과제를 떠안았다. 그렇게 작가들은 소설가 최명희가 평소에 즐겨 쓰던 펜과 원고지를 소재로 한 버스정류장을 만들었고, 만년필의 형상을 이용한 가로등이며 독서하는 소녀상을 만들었다. 

작가 최명희는 <혼불> 10권을 무려 17년 동안 집필해 탄생시켰다. 이를 원고지로 환산하면 원고지 4만 6천여 장에 이르는 방대한 양이다. 작가들은 이처럼 방대한 양의 원고지를 위로 쌓은 모습의 조형물을 통해 작가 최명희의 예술혼을 되새기게 했다. 버려진 창고 벽면에는 <혼불> 책을 그려 넣었는데, 샌드위치 패널의 골을 이용해 마치 <혼불> 책이 가지런히 꽂혀있는 책꽂이와도 같은 효과를 연출했다. 서도역 인근 마을 벽면에는 벽면을 따라 길게 연이어지는 완행열차를 그려 넣고, 열차에는 소설 속 그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마을주민들을 승선시켰다. 이외에도 방앗간 건물 벽에 거대한 원고지를 그려 넣는 등 소설 <혼불>에서 발췌한 내용의 원고를 여러 형태로 조형하고 변주해 작가의 문학적 향기를 음미하게 했다. 

구 서도역 광장 조형물이 역사의 오래된 목조 건물과도 잘 어우러진 것 같고, 혼불문학관과 서도역을 잇는 테마관광사업과도 잘 연계된 것 같다. 문학과 조형이 어우러져 고즈넉한 시골 마을을 문향 가득한 테마파크로 변모시킨 성공적인 사례가 될 것 같고, 향후 남원의 명물로 자리매김하게 될 것 같다. 

             

우륵, 천년의 소리. 경상남도 거창군 생초리는 한국의 삼대악성으로 알려진 우륵이 태어난 곳이다. 사료에 의하면 가야국의 가실왕이 가야금을 만들었고, 우륵이 가야금을 연주하기 위한 악곡 12곡을 지었다는 내용이 삼국사기에 전해진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가야금은 가실왕이 중국의 쟁(箏)을 본받아 만들었다고 한다. 그대로 만든 것이라기보다는 재해석과 창의적인 생각을 담았고, 특히 그 형태에 천문학적인 지식이며 관념을 담았다. 이처럼 가실왕이 가야금을 만들었다고는 하나, 우륵이 직접 제작에 관여해 사실상 만든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겠다. 

이런 역사적 사실에 착안해 작가들(공공미술 아림)은 우륵을 기념하고, 악기를 기념하고, 전통을 기념하는 각종 벽화를 그리고 조형물을 만들었다. 이를테면 가야금을 연주하는 사람, 해금을 연주하는 사람, 대금을 부는 사람, 피리를 부는 사람, 장구를 치는 사람이 어우러진 전통적인 악기며 음악의 합주를 일궈낸다. 그리고 그렇게 일궈낸 합주가 생초리라는 마을 이름에서 따온, 각종 화사하게 핀 꽃 그림과 어우러지게 했다. 감미로운 음악과 하늘거리는 생초가 어우러진 풍경이 싱그러움을 자아내지 않는가. 

작가들은 이런 전통악단과 함께 각종 악기를 연주하는 동물단원으로 구성된 동물악단을 그리기도 한다. 재밌는 것은 신윤복과 같은 전통적인 풍속화에 등장하는 연주그림과 서양화에 등장하는 연주자 그림 그리고 여기에 동물악사 모두를 한 자리에 그려 넣어 합주하게 했는데, 시공을 초월한 음악의 위대한 힘이며 미덕을 새삼 일깨워주고 있다는 생각이다. 음악도 예술도 말이 필요 없는 만국공용어라고 했다. 저절로 소통이 되니, 차이를 극복하고 화해며 화합을 이끌어내는 것으로 치자면, 이만한 언어도 없지 싶다. 조형물도 조형물이지만, 작가들은 이 모든 그림들을 일일이 사실적인 벽화로 그렸다. 마치 그 실체가 손에 집힐 듯하고, 나아가 흡사 연주하는 현장에 동참하고 있는 듯 한 음률 한 음률을 음미하게 만드는 생생한 그림들이다. 이 프로젝트의 특징은 이처럼 생생하게 그려진, 완성도 높은 벽화에 있지 않을까 싶다. 

더불어 작가들은 생초마을 주민들과 함께 전통악기 ‘훈’을 직접 만들고 체험해보는 프로그램을 따로 마련했는데, 우륵을 소재로 한 프로젝트의 성격에도 부합할 뿐만 아니라, 작가와 주민이 함께 만들어가는 마을미술프로젝트의 이상적인 모델이 되고 있다는 생각이다.    


탄광촌의 기억. 한때 석탄산업의 요충지였던 태백은 현재 탄광산업의 사양화로 인해 주민들이 떠나고 없는, 텅 빈 마을이 되었다. 그리고 작가들(미술모임 사계)이 그 빈 마을(강원도 태백시 동점동)에 찾아들었다. 작가들은 마을미술프로젝트를 통해 구동점동 사무소를 문화예술 공간으로 탈바꿈시키고자 했다. 이를 통해 과거의 추억을 되살리고 싶었고, 여전히 마을에 살고 있는 주민들에게 삶의 활력을 불어넣고 싶었고, 여차하면 떠난 사람들이나 외지인들이 마을을 다시 찾는 동기를 부여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렇게 작가들은 꿈을 캐는 아이들을 조형했다. 아버지들에게 석탄은 곧 꿈이었다. 아버지들이 석탄을 캐면서 꿈을 캤듯, 저마다의 꿈을 캐는 아이들을 조형한 것이고, 그렇게 과거와 현재 아님 미래를 대비시킨 것이다. 또한 동사무소 마당 한쪽에는 추억의 채탄열차를 설치했다. 때론 벤치로 그리고 더러는 포토존으로 활용할 수 있게 했다. 

이런저런 작품들이 있지만, 그 중 주목되는 것으로 치자면 사무소 2층에 설치한 <김, 이, 박, 최, 허씨>다. 이 작품의 주인공 김씨, 이씨, 박씨, 최씨, 허씨는 탄광산업이 한창일 때 실제로 이 마을에 살면서 광부로 일했던 사람들이며 현지인들이다. 지금도 여전히 그들의 살붙이며 피붙이들이 마을에 살고 있고, 그 가족들이 전해준 사진을 참고로 작품을 만들었다. 그런 만큼 현지인들에게, 그리고 특히 가족들에게 각별한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는 작품이다. 이런 의미심장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 작가들은 사각의 프레임을 석탄원석으로 채워 넣었다. 그리고 사진 그대로를 모사해 레이저커팅 한 스테인리스스틸 판을 그 표면에 덮어 고정시키는 방법으로 작품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내구성이며 안전성을 위해 투명 아크릴판으로 재차 그 표면을 덮어 작품을 완성했다. 

여기서 초상 이면의 석탄원석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그들의 얼굴을 석탄원석이 채우고 있는 것이다. 석탄이 곧 그들의 얼굴이며 몸이며 살임을 표상한 것이다. 이처럼 작가들은 석탄원석과 스테인리스스틸 판을 대비시키고, 광물질과 금속성의 표면질감을 대비시키고, 흑과 백을 대비시켜 완성도를 높였다. 이런 완성도는 물론이거니와, 그 자체가 광부의 정체성을 대변하고 강화한다는 의미도 내포하게 된다. 검댕이 묻은, 빛에 미묘하게 난반사하는, 광부의 번쩍거리는 얼굴이며 눈빛이 연상되지가 않는가. 그렇게 작가들은 태백에 청춘을 불살랐던 실제 광부들을 오롯이 되살려냈다. 광부들과 함께 한 시대를 되살려냈다. 예술의 힘이며 미덕이 아니고선 불가능한 일이다. 


개항의 근대사적 의미. 전라북도 군산시 장미동에 가면 국내 최초의 국제항으로 개항한 군산항이 있다. 2010년은 군산항이 개항한지 111년째 되는 해이다. 그래서 프로젝트의 명칭도 <길 111 in 군산>이다. 일제 강점기로 소급되는 짧지 않은 세월을 함축하고 있는, 군산항에 이어지는 그 길은 그대로 한국근현대사가 오롯이 아로새겨진 길이기도 하다. 

그런 만큼 구구절절 사연도 많다. 이를테면 드물게 항구 안에 역사(내항역)가 있었는데, 일본이 수탈해간 쌀을 곧장 바다로 실어내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한국인 고유의 미의식이며 정체성을 한국에서 가장 흔한 화강암의 색감과 질감에서 찾은,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소위 국민화가 박수근이 잠시 부두의 미두꾼으로 일했었다고 한다. 작고한 박완서의 소설 <나목>에 보면, 미군부대를 얼쩡거리며 미군들의 초상화를 그려주는 일로 생계를 유지한 박수근이 묘사돼 있지만, 화가의 먹고 살기 위한 처지며 형편은 이처럼 군산항 부둣가에도 그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그런가하면 그 길은 부두 노동자의 회한을 그린 채만식의 소설 <탁류>의 배경이 되는 길이기도 하고, 소설 속 계봉이 감옥에 간 언니 초봉을 기다리는 길이기도 하고, 재개발 계획으로 철거 예정인 장미동 사람들의 회한이 서린 길이기도 하고, 최근의 경우로 치자면 새만금을 통해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는 희망의 길이기도 하다. 

이런 근현대사적인 사실에 착안한 작가들은 군산 내항 부근 철로 옆 부지를 배경으로 스토리가 있는 공공미술을 꾸몄다. 그 시절 그대로 철로를 깔고 증기기관차를 제작해 설치했는데, 일본이 쌀을 수탈해간 바다가 아닌, 미래를 기약하는 새만금을 향하고 있다. 폐철로 옆 플랫폼에는 실루엣 형상의 사람형상을 통해 기다리는 사람들을 조형했다. 그 기차며 플랫폼 옆에는 쌀가마니에 걸터앉아 그림을 그리는 화가를 조형했는데, 부두노동자로 일하는 와중에도 짬을 내어 그림 그리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던 화가를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 화가가 걸터앉은 쌀가마니는 말할 것도 없이 일본이 수탈해간 쌀을 의미할 것이다. 그렇게 군산항에는 한국 근현대사의 이야기가 아로새겨져 있었고, 작가들은 과거와 미래가 오버랩 된 그 이야기를 저마다의 조형으로 풀어내고 있었다. 이로써 역사적 현실을 테마로 하여, 이를 공공미술로 전환시킨 사례에 해당할 것이다. 


고래의 추억. 거대 산업도시 울산의 낙후되고 소외된 산자락 마을인 신화마을(울산광역시 남구 야음동 신화마을 174번지)은 1960년대 석유화학단지 조성 시기 남구 매암동 철거민들이 이주해 정착한 마을이다. 당시 이주민 상당수가 포경업 종사자들이어서 신화마을은 고래와 인연이 깊다. 지금도 여전히 현지에선 고래를 소재로 한 영화가 제작되고 있고, 우스갯소리로 한창 때에는 지나가는 개도 만 원짜리 한 장 정도는 입에 물고 다닐 만큼 좋았던 시절도 있었다고 한다. 

이런 사실에 착안한 작가들(연어와 첫비)은 비록 과거지사가 됐지만, 과거의 화려했던 시절을 되불러오기로 했다. 그리고 그렇게 사람들이 상실한 꿈을 되찾아주고 싶었고, 사람들의 지난한 삶에 활력소를 불어넣고 싶었다. 말할 것도 없이 그 매개는 고래가 될 것이며, 사람들이 이입한 꿈을 실은 고래가 옛날에 그랬던 것처럼 미지의 세상을 향해 자유롭게 유영하는 형국이 될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작가들은 마을 초입에 고래 조형물을 세웠다. 이 마을이 다름 아닌 고래마을임을 알리는 일종의 이정표인 셈이다. 그리고 장생포 마지막 포경선인 진양호를 조형해, 여전히 고래잡이가 한창인 풍경을 연출했다. 각종 고래를 조형하는 한편, 특히 잡기가 힘든 만큼 귀하다고 해서 울산을 대표하는 귀신고래를 조형할 때에는 각별한 신경을 썼다. 여기에 울산 반구대 암각화를 현대적인 이미지로 해석해, 울산과 고래와의 인연이 어제 오늘 일이 아님을 고지시켰다. 그리고 안도현의 시 <고래를 기다리며>를 동판에 아로새겨, 사람들로 하여금 여전히 저마다의 마음속에 살고 있는 고래의 존재를 환기시켰다. 

이런 조형물도 조형물이지만, 고래를 소재로 그린 각종 벽화들이 흥미롭다. 그 실체가 손에 잡힐 듯 사실적이고 생생하게 그려진 고래들은 하나같이 바다가 아닌 하늘 속을 유영하고 있고, 바다 속을 유영할 때에도 마치 하늘처럼 그려져 있다. 왜 바다가 아닌 하늘인가. 고래에게 바다는 하늘에 다름 아니었다. 바다에 살붙이고 사는 사람들에게도 역시 바다는 하늘이었고, 세상이었고, 꿈이었고, 자유였고, 전부였다. 고래를 바다가 아닌 하늘에 그려 넣은 것은 바로 사람들의 꿈을 투사한 것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하늘을 나는 고래를 보고, 저마다의 꿈을 되새기게 될 것이었다. 


올레길. 제주도 서귀포시 대평리에 가면 올레길이 있다. 이제는 전국적으로 확산된, 그리고 나아가 외국에서조차 벤치마킹을 위해 방문하곤 하는 00길 걷기의 원형 격에 해당하는 길이다. 올레는 순수한 제주도 방언으로서, 거리길 쪽에서 대문으로 연이어진 좁은 골목길이다. 도심에서도 재개발 붐이 일면서 골목길이 사라진지 오래인 현실에서 왜 다시 골목길이며 올레길인가. 알다시피 골목길은 폭이 좁아서 마주보고 있는 앞집의 살림살이가 훤히 들여다보일 뿐만 아니라, 누가 오고가는지 대번에 알아차리기 마련이다. 골목길이 바로 공동체 문화가 자생할 수 있는 토양이며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말이다. 이런 골목길이 사라진 것은 주거형태가 아파트 위주로 바뀐 것과 관련이 깊고, 개인주의가 팽배해진 것과 관련이 깊고, 덩달아 공동체문화의 상실과 관련이 깊다. 결국 다시 골목길 회복 운운하는 것은 이처럼 상실된 공동체 문화가 그리워서이고, 사람과 사람 간의 대화가 그리워서이다. 

도심으로 치자면 골목길에 해당할 올레는 그러나 엄밀하게는 골목길과 다르다. 환경적인 차이로 볼 수가 있을 것인데, 자연을 품고 있는 길, 자연과 더불어 걸을 수 있는 길, 둠벙과 같은 생태를 숨겨 놓고 있는 길, 숨은 길 정도로 보면 되겠다. 도심의 골목길이 내재하고 있는 공동체문화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유대관계를 회복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면, 올레는 사람과 자연과의 관계며 대화에 그 초점이 맞춰진다. 소위 힐링 바람이 불면서, 유산소운동이며 걷기운동 붐이 일면서 이런 올레길이 최근에 각광받고 있다. 올레걷기는 단순한 걷기 이상의, 삶의 태도며 방식과 같은 보다 근본적인 변화와 관련이 깊다. 이를테면 노자의 소요유와도 같은 경지를 생각해볼 수가 있겠다. 

발터 벤야민은 비행기를 타고 가는 길, 기차를 타고 가는 길, 그리고 걸어서 가는 길의 차이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비행기와 기차를 타고 가는 길이 목적 지향적이라면, 그래서 길이 다만 경로로서의 의미만으로 축소된다면, 걸어서 가는 길은 길과 존재가 일체되는 존재론적 경험에로 유도한다. 올레는 바로 그런, 목적 없이 유유자적하면서 걷는 길이며, 길과 내가 하나로 합치되는 길이다. 길이라고해서 다 길은 아니라는 말이 있다. 올레는 느리게 걷기, 생각 없이 걷기, 방심하면서 걷기, 목적 없이 걷기를 통해 자기를 만나게 해주는, 자기에 눈 뜨게 해주는, 그런 길이다.    

여기에 작가들(JPA-올레)은 제주 대평리의 올레길에 예술을 접목시켰다. 대평리의 마을 체험학습장부터 포구까지 연이어진 수백 미터에 이르는 올레길을 조형으로 꾸몄는데, 각 방파제를 산책하는 사람들, 해돋이 풍경, 주민 초상, 물질중인 해녀, 헤엄치는 물고기, 그리고 올레 꾼의 모습을 재현했다. 또한 인근 산책로 난간을 싱그러운 파도를 연상시키는 타일 조각과 도자기로 조형했다. 다른 프로젝트에선 보기 드문 경우가 바로 서예며 서각이 조형요소로 차용된 것인데, 단순한 글자체나 의미를 넘어 그 자체가 조형적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또 다른 의미 있는 시도로 평가된다. 그런가하면 파타일로 장식된 포구길 입체조형물은 벽화가 제작된 방파제를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해 있어서 올레를 찾는 사람들의 기념 촬영지로도 사랑받을 것 같다. 그리고 여기에 해녀의 집, 올레 갤러리, 해녀 올레, 숨비소리-해녀상, 방사탑, 정주석 조명 거치대와 같은, 제주의 지역적 특수성을 살린 모티브를 더해 천연자연과 제주 고유의 풍속이 하나로 어우러지게 했다. 

제주가 이처럼 올레를 테마로 한 것은 마침 그 지역이 올레길로 주목받고 있는 터여서 더없이 적절해 보인다. 더욱이 올레길 걷기 코스 중의 하나인 대평리 올레길은 문화적으로나 지리적으로 제주에서 가장 소외된 곳이기도 하다. 이처럼 소외된 지역에 일종의 지붕 없는 미술관을 조성해 활력을 불어넣는다는 점에서 마을미술프로젝트의 목적에도 부합한다는 생각이다. 코스 내지 구간 자체가 생태 환경이 살아 숨 쉬는, 자연과 조형이 조화를 이루는 소위 생태미술관으로 거듭나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고씨굴랜드 아트미로 프로젝트.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진별리에는 석회동굴이 있다. 고씨동굴이다. 고씨동굴이라는 명칭은 임진왜란 때 고씨 일가족이 동굴 속에 피신해 난을 피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1969년 천연기념물 제219호로 지정되었으며, 1974년부터는 관광동굴로 개발된 곳이다. 

고씨동굴 인근에는 고씨굴랜드가 있었다. 이처럼 과거형으로 기술하는 것은 고씨굴랜드가 현재에는 폐관돼 없어졌기 때문이다. 고씨동굴이 갖는 관광지로서의 메리트를 보고 랜드를 개관했을 것이고, 막상 개관한 이후에는 처음 생각과는 다른 현실에 부닥쳐 폐관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폐관한 이후에도 비록 랜드는 없어졌지만. 여전히 없어지지 않은 채 남겨진 것이 있었으니, 바로 랜드를 조성하면서 만든 부지며 정원 같은 부대시설이, 그리고 랜드의 핵심이랄 수 있는 각종 놀이터 시설이며 놀이기구가 그것이다. 그렇게 아이들이 빠져나간, 텅 빈 랜드가 마치 초현실적 풍경과도 같은 묘한 기분을 불러일으켰을 것이고, 그 풍경을 이루고 있는 놀이시설이며 놀이기구들이 조형을 위한 훌륭한 모티브며 재료가 되어주었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들(Art Maze)은 이제 흔적으로 남은 고씨굴랜드와 인연을 맺게 된다. 남겨진 부분들, 이를테면 진즉에 조성돼 있는 부지며 정원이, 멈춰 서버린 각종 놀이 시설이며 놀이 기구가 상상력을 자극했을 것이고, 자연스레 한 때 랜드였던 지정학적 장소에 걸 맞는 일종의 동화세계를 꿈꾸었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들은 총길이 1.2km에 이르는 일종의 아트미로를 조성하고, 미로 구간 구간에 각종 조형물들을 설치했다. 이를테면 10여 명이 올라가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를 갖춘 높이 10m 규모의 거대한 당나귀 모양의 조형물 동키를 조형했는데, 그 형태가 트로이의 목마를 닮았다. 이외에도 관람객이 조정하면 움직이는 티어의 손을 비롯해, 신데렐라, 인어공주, 백설 공주, 그리고 피노키오와 같은 알만한 동화 속 주인공들이 캐릭터로 되살아났다. 고씨굴랜드를 철수하면서 나온 폐철을 자르고 용접하는 방법으로, 그리고 폐관이나 폐 컨테이너를 비롯해 고장난 관람차와 같은 기왕의 시설이며 기구를 십분 활용하는 방법으로 이 모든 조형물들을 만들었다. 재활용과 관련한 의미 있는 사례로 봐도 되겠다. 

이로써 작가들은 방치된 유원지와 같은 유휴시설을 이용해 공공미술로 전환시키는 모범적인 사례를 남겼다. 그 일련의 과정과 방법을 통해서 작가들은 아마도 아이들의 잃어버린 꿈을 되찾아주고 싶었을 것이다. 마침, 고씨굴랜드의 아트미로와 연계한 에코미로가 현재(2013) 조성되고 있어서, 이 프로젝트가 끝날 때 즈음이면 이런 작가들의 꿈은 현실이 되지 않을까 싶다. 


고추 먹고 맴맴, 동요마을.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은 한국의 대표적인 동요 ‘고추 먹고 맴맴’의 발상지로서, 현지에는 이를 기념하기 위한 음성동요학교가 있다. 음성동요학교는 2005년 9월 옛 생극초등학교 오생분교 자리에 설립된 연후에, 2006년 6월에 정식 개교했다. 동요를 중심으로 한 일종의 체험학습 내지 전통문화학교랄 수 있는 학교에는 현재 교장 1명과 교사 10명이 재직하고 있다. 동요마을답게 마을에는 각종 악기를 갖춰놓은 음악당이 있어서, 아이들이 자유롭게 악기를 연주할 수 있게 했다. 

이런 사실에 착안한 작가들(뚝딱뚝딱 조형연구소)은 각종 악기를 모티브로 한 조형물을 만들고, 동요길을 조성했다. 거대한 피아노 조형물의 상단에 실로폰을 장착해 아이들이 발로 밟으면서 음악을 연주할 수 있게 했다(피아노). 두 개의 나팔이 교차된 터널 형태의 조형물 상단에는 500여 개에 달하는 풍경을 달아 바람이 연주하는 풍경소리를 음미할 수 있게 했고(따따따 바람소리), 피리를 모티브로 한 토템폴 형태의 조형물에는 전등을 달아 가로등 역할을 하게 했다(따따따 피리소리). 그리고 꽃밭에서, 고기잡이, 개구리, 우리 집 강아지, 산들바람과 같은, 알만한 동요들을 모티브로 동요길을 조성했다. 

 

출처: 김달진 미술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