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묘(省墓)/ 고은
아버지, 아직 남북통일 되지 않았습니다.
일제시대 소금 장수로 이 땅을 떠도신 아버지.
아무리 아버지의 두만강 압록강을 생각해도
눈 안에 선지가 생길 따름입니다.
아버지의 젊은 시절
두만강의 회령 수양버들을 보셨지요.
국경 수비대의 칼날에 비친
저문 압록강의 붉은 물빛을 보셨지요.
그리고 아버지는
모든 남북의 마을을 다니시면서
하얀 소금을 한 되씩 팔았습니다.
때로는 서도 노래도 흥얼거리고
꽃 피는 남쪽에서는 남쪽이라
밀양 아리랑도 흥얼거리셨지요.
한마디로, 세월은 흘러서 멈추지 않는 물인지라
젊은 아버지의 추억은 이 땅에 남지도 않고
아버지는 하얀 소금이 떨어져서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 남북통일이 되면 또다시 이 땅에 태어나서
남북을 떠도는 청청한 소금 장수가 되십시오.
"소금이여", "소금이여"
그 소리, 멀어져 가는 그 소리를 듣게 하십시오.
- 시집『문의 마을에 가서』(창작과 비평,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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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통령은 지난 북경의 칭화대 연설에서 남북 국민들이 자유롭게 왕복하는 ‘새로운 한반도’를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밝혔다. 동서독의 경우처럼 남북한 자유왕래가 실현된다면 통일의 물꼬를 트는 가장 획기적인 일이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이산가족 상봉 재개는 그 단초를 푸는 작은 실마리가 되어야 하며, 이를 계기로 대면상봉의 정례화와 화상상봉의 상례화가 실현되어야 할 것이다. 나아가 막혔던 금강산 길도 뚫고 관광구역 확대를 위한 노력도 아끼지 말아야겠다. 어떤 상황에서도 이산가족 상봉은 계속되어야 하고, 남북한 주민이 자유롭게 오가는 새로운 한반도 지형 위에 튼튼한 통일의 가교를 놓아야겠다.
하루아침에 북한체제가 붕괴되는 상황에 기대는 ‘통일 대박’은 위험천만하고 우리로서도 자칫 재앙일지 모른다. 상호신뢰를 쌓으며 관계개선이 우선되어야 점진적으로 곳곳에서의 길이 터일 것이다. 통일은 결국 어떤 사상이나 무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문화나 스포츠 등 다양한 채널을 통해 그들의 마음을 녹일 수 있을 때 가능해진다. 이미 우리의 대중문화가 깊숙이 침투해 있으며, 초코파이에서부터 화장품까지 우리의 상품이 저들에게 인기품목으로 자리 잡고 있는 현상이야말로 통일의 분위기를 북돋우는 최적의 조짐임을 부인하지 못한다. 따라서 개방과 시장 경제의 확대가 우리로선 가장 소망스러운 통일의 문고리이리라.
‘남북을 떠도는 청청한 소금 장수’가 재현되는 그날이 바로 통일의 그날이 아닌가. 남북 물자교류가 활발해져 묘향산에서 직접 캔 노루궁뎅이버섯을 남한의 경동시장에 내다팔고 남한의 전자제품 대리점이 북한 땅에 들어서 김치냉장고가 각 가정에 보급이 될 때 이미 통일은 눈앞에 와있을 것이다.
이 시는 성묘를 가서 아버지에게 아직도 남북통일이 이뤄지지 않았음을 고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아버지가 내다 팔았던 ‘소금’은 가족의 밥이기도 했지만 힘든 시대를 지탱하게 하는 어떤 정신적 가치를 의미하기도 한다. 아버지가 ‘하얀 소금이 떨어져서’ 돌아가신 분단시대에 그가 계승해야할 가치도 바로 그 소금과 같은 것이며, 그래서 통일을 향한 시인의 염원과 의지를 불태울 수 있었으리라. 통일의 그날을 위해 남과 북 모두에게 우리가 입을 모아 동시에 외칠 소금의 언어는 무엇일까. 아마 그들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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