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담/ 이문재
문득 아름다운 것과 마주쳤을 때
지금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면 그대는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윽한 풍경이나
제대로 맛을 낸 음식 앞에서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은 정말 강하거나
아니면 진짜 외로운 사람이다
종소리를 더 멀리 보내기 위하여
종은 더 아파야 한다.
-시집『제국호텔』(문학동네,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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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사한 풍경을 앞에 두고 시상 ‘비스무리’한 게 떠오른다거나 하다못해 풍경에 어울리는 시가 한 수 생각나면 좋겠는데, 막상 떠오르는 것은 없고, 있다면 시 쓴다는 시인 친구 이름뿐, 생각이 거기에 미쳐 바로 전화를 때렸던 것이다. ‘이 끝내주는 경치 앞에서 시인인 너라면 두고만 보진 않겠지?’ 그 기대에 부응하여 시 한수 바로 터져준다면 상호간 흡족한 일이겠으나 일찍이 절경은 시가 되지 않는다고 했거늘 ‘그윽한 풍경’ 앞에서 속수무책이기 십상이다. 그보다 이유야 어떻든 생각해서 전화해준 게 고마운 일이긴 하다.
하지만 ‘그윽한 풍경이나 맛을 낸 음식 앞에서’ 떠오르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이 꼭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면 아무래도 구식이다. 말이 안 되는 건 아닌데, 솔직히 손때가 많이 묻은 낡은 사랑법이다. 푸지게 매어달린 벚꽃이 눈처럼 마구 휘날리는 거리를 걸을 때, 산사의 그윽한 풍경에 숨이 막힐 지경이고, 공기 너무 맑아 혼자 숨쉬기가 못내 아쉬울 때,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해서 곧장 사랑의 증표라 들이대는 건 낯간지러운 짓이다.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함부로 강하다느니, 진짜 외로운 사람이라고 단언하는 태도는 어쩌면 과장이거나 교만이거나 농담일 것이다.
나는 대체로 그런 절경이나 기가 막힌 풍경 앞에서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고 그저 먹먹히 나 홀로 잠겨들 뿐이다. 몸이 시키는 대로 호흡할 따름으로 정신이 따로 작동하진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다면 물론 몸의 이끌림대로 손 뻗어 어깨를 잠시 감싸 안을 수도 있겠지만, 특별히 좋은 풍경 앞에서만 사랑하는 사람이 생각나진 않는다. 만약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시도 때도 없이 생각날 것이다. 황사 바람이 불어 눈을 찡그릴 때도, 목련이 누른 수의를 갈아입을 때나, 벚꽃 다 져서 그 낱낱이 달리는 차들의 바퀴 아래서 이리 뒹굴고 저리 휩쓸릴 때도, 찬밥을 더운 물에 말아먹을 때도 나는 덮어놓고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할 것이다.
이것이 농담이라면 농담일까? 그래, 사랑이란 어쩌면 농담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더 깊은 사랑을 위해 더 아파야하는 것이라면, 이기를 무너뜨려야 가능한 것인데 다만 생각난다거나 떠오르는 것으로 사랑이라 할 수 있겠는지. 갈등과 방황이 방향을 잡아 주고 남다른 아픔과 역경이 아름다운 사랑을 만들어준다면, ‘종소리를 더 멀리 보내기 위하여 종은 더 아파야’ 한다‘는 말에는 동의하며 공감을 표한다.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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