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사랑/ 구석본
2003년 4월 4일 12시 4분,
당신은 대구광역시 순환도로를
100킬로 속도로 달렸습니다
그곳은 80키로가 제한 속도입니다.
차를 운전하는 나의 모습이 또렷하게
인쇄되어 있다
옆자리는 검게 지워져 있다
지워진 검은 잉크 밑에서 그녀의 까만 눈동자가
얼룩이 되어 반짝이고 있다.
누군가 우리들의 사랑을 찍었다
100킬로로 달리던 속도와 그 뜨거움 속으로
내닫던 사랑을 흑백으로 현상하여
6만원을 요구하고 있다
누군가 제한해 놓은 속도,
그 속을 벗어나면
가차없이 현상되는 우리들의 사랑
- 시집『쓸쓸함에 관해서』(시와반시,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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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어떤 년하고 어딜 신나게 싸돌아다닌 거야?’ 속도위반통지서를 받아든 아내가 뿔이 날대로 나가지고선 쏘아붙인다. 그도 그럴 것이 조수석의 쌍판을 검은 판자떼기로 가린 것 자체로 뭔가 음흉스럽고 걸리는 게 있기 때문이지 싶었다. 프라이버시를 감안한 당국의 친절한 배려임을 아내가 알 리 없었다. 아내의 뿔따구에 남편은 바로 대응할 방도를 찾지 못해 멈칫했다.
가만 기억을 되짚어본다. 어디 보자 4월 4일이면 바로 장인의 팔순 생신일이 아니던가. 그래서 처가가 있는 김천으로 가기 위해 고속도로를 달렸던 것이고. 생각이 그것에 미치자 남편은 즉각 반격에 나섰다. “그래. 그년이 바로 이년이다” 통지서를 아내의 턱 밑에다 냅다 던지고 돌아섰다. 이상은 오래전에 들은 친구의 경험담이다. 그 친구가 얼마 전엔 또 다른 괴상망측한 일을 내개 ‘보고’했다. 운전 도중 장모에게 전화가 왔는데, 마침 그때 네비 여인이 조잘대는 걸 들은 장모께서 ‘김서방 여자 있는 것 같더라, 한번 알아봐’라며 아내에게 일러바쳤다는 것이다.
운전을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당할 수 있는 일이고 늘 그 개연성에 노출되어있다. 가차 없이 끊겨지는 주정차, 속도위반 등의 범칙금이 쌓이다 보면 사람까지 고분고분 길들여질 것 같다. 그래서 옆자리에 누군가를 태우고 랄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질주할 수 있는 통 큰 사랑을 구가하기란 쉽지 않다. 젊은 청춘남녀의 사랑이야 당연히 예외로 치고, ‘우리 시대의 사랑’ 혹은 우리 세대의 사랑이란 곳곳에 설치된 감시 카메라와 파파라치의 망원 렌즈와 사정기관의 방망이를 여하히 피해 가느냐가 관건이다.
밟으면 밟을수록 뜨거우면 뜨거울수록 ‘가차 없이 현상되는 우리들의 사랑’이다. 누군가를 옆에 태우고 한번 세게 밟아보고 싶은 아득한 이 봄날에 어딘가 숨어있을 카메라와 이웃의 눈동자와 벌어진 입들. ‘지워진 검은 잉크 밑에서’ ‘얼룩이 되어 반짝이’는 ‘그녀의 까만 눈동자’만 미확인비행물체처럼 쓸쓸하다.
권순진
Holiday - Scorp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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