同樂茶軒-문화와 예술/詩가 있는 뜨락

정희성

sosoart 2016. 8. 24. 19:56



정희성 시인 프로필

 

1945년 경남 창원 출생

1964년  용산 고등학교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서울대대학원수료

197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변신>당선 등단

`972년 숭문고등학교 교사

1974년 시집 <답청>(문학동네)

1978년 시집 <저문 강에 삽을 씻고>(창작과 비평)

1981년 제1회 김수영문학상  신경림 시인과<한국 현대시의 이해> 출간

1991년 시집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창작과비평)

1996년 민족문학작가회의 부이사장 역임

1997년 시와시학상

2001년 제 16회 만해문학상 수상,  평양 815평화문화축전에 도종환, 김준태와 남축대표시집 <시를 찿아서> (창작과비평)

2003년 제8회 현대불교문학상

2006년 민족문학작가회의 16대 이사장

2008년 제5회 육사시문학상 , 시집<돌아다보면 문득>(창비)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어느날 당신과 내가
날과 씨로 만나서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우리들의 꿈이 만나
한 폭의 비단이 된다면
나는 기다리리, 추운 길목에서
오랜 침묵과 외로움 끝에
한 슬픔이 다른 슬픔에게 손을 주고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의
그윽한 눈을 들여다볼 때
어느 겨울인들
우리들의 사랑을 춥게 하리
외롭고 긴 기다림 끝에
어느날 당신과 내가 만나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저문 강에 삽을 씻고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 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日月 


 

낮과 밤의 길이가 같다는
춘분 그 즈음에
해와 달을 몸받아
누리에 나신 이여
두 손 모아 비오니
천지를 운행하올 제
어느 하늘 아래
사무쳐 그리는 이 있음을
기억하소서




옹기전에서 


 

나는 웬지 잘 빚어진 항아리보다
좀 실수를 한 듯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아내를 따라와 옹기를 고르면서
늘 느끼는 일이지만
몸소 질그릇을 굽는다는
옹기전 주인의 모습에도
어딘다 좀 빈데가 있어
그것이 그렇게 넉넉해 보였다
내가 골라놓은 질그릇을 보고
아내는 곧장 화를 내지만
뒷전을 돌아보면
그가 그냥 투박하게 웃고 섰다
가끔 생각해보곤 하는데
나는 어딘가 좀 모자라는 놈인가 싶다
질그릇 하나를 고르는 데도
실수한 것보다는 차라리
실패한 것을 택하니





얼은 강을 건너며 


 

얼음을 깬다.
강에는 얼은 물
깰수록 청청한
소리가 난다.
강이여 우리가 이룰 수 없어
물은 남 몰래 소리를 이루었나
이 강을 이루는 물소리가
겨울에는 죽은 땅의 목청을 트고
이 나라의 어린 아희들아
물은 또한 이 땅의 풀잎에도 운다.
얼음을 깬다.
얼음을 깨서 물을 마신다.
우리가 스스로 흐르는 강을 이루고
물이 제 소리를 이룰 때까지
아희들아.




씻김 


 

물에서 나와 산으로 쫓긴 영산
태평연월에 총맞아 죽은 영산
저승 가다 먹으려고
도토리 한 알 손에 쥐고
올 같은 풍년에 굶어 죽은 영산
가랑잎 뒤집 쓰고 산에서 죽은 영산
애면글면 살겠다고
버섯 따다 죽은 영산
칠성산 총질 끝에 쓰러져간 젊은 영산
넋이야 넋이로다 죽은 영산 죽인 영산
모두 다 우리 동포 아니시리
우리 형제 아니시리





詩를 찾아서 


 

말이 곧 절이라는 뜻일까
말씀으로 절을 짓는다는 뜻일까
지금까지 시를 써 오면서
시가 무엇인지
시로써 무엇을 이룰지
깊이 생각해볼 틈도 가지지 못한 채
헤매어 여기까지 왔다
경기도 양주군 회암사엔
절 없이 절터만 남아 있고
강원도 어성전 명주사에는
절은 있어도 시는 보이지 않았다
한여름 뜨락에 발돋움한 상사화
꽃대궁만 있고 잎은 보이지 않았다
한 줄기에 나서도
잎이 꽃을 만나지 못하고
꽃이 잎을 만나지 못한다는 상사화
아마도 시는 닿을 수 없는 그리움인 게라고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마음인 게라고
끝없이 저자 거리 걷고 있을 우바이
그 고운 사람을 생각했다
시를 찾아서

차라리 시를 가슴에 묻는다
발표 안 된 시 두 편만
가슴에 품고 있어도 나는 부자다
부자로 살고 싶어서
발표도 안 한다
시를 두 편 가지고 있는 동안은
어느 부자 부럽지 않지만
시를 털어버리고 나면
거지가 될 게 뻔하니
잡지사에서 청탁이 와도 안 주고
차라리 시를 가슴에 묻는다
거지는 나의 생리에 맞지 않으므로
나도 좀 잘 살고 싶으므로





술꾼 


 

겨울에도 핫옷 한 벌 없이
산동네 사는 막노동꾼 이씨
하루 벌어 하루 먹는다지만
식솔이 없어 홀가분하단다
술에 취해 이 집 저 집 기웃거리며
낯선 사람 만나도 알은체하고
남의 술상 앞에서 입맛 다신다
술 먹을 돈 있으면 옷이나 사 입지
그게 무슨 꼴이냐고 혀를 차면
빨래 해줄 사람도 없는 판에
속소캐나 놓으면 그만이지
겉소캐가 다 뭐냐고 웃어넘긴다




서울역 1998 



 

틈만 나면 서울역에 갔다
침침한 지하도 한 구석에는
지쳐 쓰러진 사람들
죄 많은 내가 누워야 할 자리에
다른 사람이 먼저 와 있다
이 꼴을 볼라고 작년에
하느님이 나를 인도에 보내셨던지
북인도가 아프게 꿈에 보였다
노란 겨자꽃이 한창이었다
마알간 거울 속처럼
이상하게도 세상은 고요했고
말을 해도 소리가 되지 않았다





사랑 사설(辭說) 


 

가여운 입술이나 손끝으로 매만질 수 없는 사랑의 깊이를
더러는 우리가 어둑한 심장으로도 느낄 수 있는 것을 왜 몰라
오늘따라 어설피 흰 살점의 눈내리고 이 겨울 우리네 마음같이 어두울
뽕나무 스산한 가지 설운 표정을 목로에서나 달래는 심정으로 훼훼
탁한 술잔을 흔들다가는 시나브로 눈발이 흩날리는 거리로 나서보지마는
언제 우리네 겨울이 인정같이야 따뜻한 것가 어두운 나무에서 반짝이는 눈빛같이야
어차피 반짝일 수 없는 우리네 마음이 아닌 것가
미쳐간 누이의 치마폭에 환히 빛나던 싸리꽃 등속의 그 꾀죄죄한 웃음결만치도
밝게 웃을 수 없다면야 순네의 슬픔에는 순네의 슬픔에 맞는 가락지
우리 모두가 우리네 슬픔에 맞는 사랑을 찾아 잃어버린 사랑을 찾아 나서볼 일이다






답청 


 

풀을 밟아라
들녘에 매맞은 풀
맞을수록 시퍼런
봄이 온다.
봄이 와도 우리가 이룰 수 없어
봄은 스스로 풀밭을 이루었다.
이 나라의 어두운 아희들아
풀을 밟아라.
밟으면 밟을 수록 푸르른
풀을 밟아라.





너를 부르마 


 

너를 부르마
불러서 그리우면 사랑이라 하마
아무 데도 보이지 않아도
내 가장 가까운 곳
나와 함께 숨 쉬는
공기(空氣)여
시궁창에도 버림받은 하늘에도
쓰러진 너를 일으켜서
나는 숨을 쉬고 싶다.
내 여기 살아야 하므로
이 땅이 나를 버려도
공기여, 새삼스레 나는 네 이름을 부른다.
내가 그 이름을 부르기 전에도
그 이름을 잘못 불러도 변함없는 너를
자유여.





꽃자리 


 

촉촉히 비 내리던 봄날
부드러운 그대 입술에
처음 내 입술이 떨며 닿던
그날 그 꽃자리
글썽이듯 글썽이듯
꽃잎은 지고
그 상처 위에 다시 돋는 봄
그날 그 꽃자리
그날 그 아픈 꽃자리




..시인 정희성 ~

..1945년 경남 창원에서 출생, 서울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7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1981년 제1회 김수영문학상 수상한 바 있다. 시집으로〈답청〉,〈저문 강에 삽을 씻고〉,〈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이 있으며, 저서로〈한국현대시의 이해〉(공저) 등이 있다. 현재 숭문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재직중이다.



."사 랑"

사랑아 나는 눈이 멀었다
멀어서
비로소 그대가 보인다
그러나 사랑아
나도 죄를 짓고 싶다
바람 몰래 꽃잎 만나고 오듯
참 맑은 시냇물에 봄비 설레듯


"차라리 시를 가슴에 묻는다"


........................- 정희성 시인 -



발표 안 된 시 두 편만
가슴에 품고 있어도 나는 부자다
부자로 살고 싶어서
발표도 안 한다
시 두 편 가지고 있는 동안은
어느 부자 부럽지 않지만
시를 털어버리고 나면
거지가 될 게 뻔하니
잡지사에서 청탁이 와도 안 주고
차라리 시를 가슴에 묻는다
거지는 나의 생리에 맞지 않으므로
나도 좀 잘 살고 싶으므로


"꽃자리"


................- 정희성 시인 -



촉촉히 비 내리던 봄날
부드러운 그대 입술에
처음 내 입술이 떨며 닿던
그날 그 꽃자리
글썽이듯 글썽이듯
꽃잎은 지고
그 상처 위에 다시 돋는 봄
그날 그 꽃자리
그날 그 아픈 꽃자리



."그대 귓가에
...........닿지 못한 한마디 말"



.....................- 정희성 시인 -



한 처음 말이 있었네
채 눈 뜨지 못한
솜털 돋은 생명을
가슴 속에서 불러내네

사랑해

아마도 이 말은 그대 귓가에 닿지 못한 채
허공을 맴돌다가
괜히 나뭇잎만 흔들고
후미진 내 가슴에 돌아와
혼자 울겠지

사랑해

남몰래 울며 하는 이 말이
어쩌면
그대도 나도 모를
다른 세상에선 꽃이 될까 몰라
아픈 꽃이 될까 몰라


."파문"


..............- 정희성 시인 -



내가 빚은 사랑의 노래가
그녀의 술을 익게했네
그녀가 스며든 내 시속에
작은 파문이 일어나네


"태백산행"


..................- 정희성 시인 -



눈이 내린다 기차 타고
태백에 가야겠다
배낭 둘러메고 나서는데
등뒤에서 아내가 구시렁댄다
지가 열 일곱 살이야 열 아홉 살이야

구시렁구시렁 눈이 내리는
산등성 숨차게 올라가는데
칠십 고개 넘어선 노인네들이
여보 젊은이 함께 가지
앞지르는 나를 불러세워
올해 몇이냐고
쉰 일곱이라고
그 중 한 사람이 말하기를
조오흘 때다

살아 천 년 죽어 천 년 한다는
태백산 주목이 평생을 그 모양으로
허옇게 눈을 뒤집어쓰고 서서
좋을 때다 좋을 때다
말을 받는다

단골집 귀때기 새파란 그 계집만
괜스레 나를 보고
늙었다 한다


"이른봄 저녁무렵"


....................- 정희성 시인 -



이른봄 저녁 무렵
새로 나온 이시영 시집을 읽으며
그 행간에 자리잡은
적요에 잠겨 눈을 지그시 감다가
문득 놀라 창문 열고 내다보니
언제 지었을까
아직 새 잎 돋지 않은 가문비나무 우듬지에
얼기설기 얽어놓은 까치 둥우리
새는 보이지 않고
나뭇가지 사이로 드러나는 하늘빛 고요
옳거니!
세상의 소란이 나를 눈감게 하고
저 고요가 나를 눈뜨게 하느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