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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락재 통신-9: "벌써"와 "이제야......."

sosoart 2007. 3. 26. 05:53

졸작 "저무는 숲속에서"-종이에 수채

 

 

<동락재 통신-9>     2003. 3. 19


오늘이 벌써 수요일이군요.


하긴 "벌써"라고 하는 사람, "이제야"라고  표현하는 두 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있겠군요.

자기가 서 있는 곳, 그 시간과 사람에 따라 관점이 모두 다르겠지요.


아직도 공부를 한다는 것이 잘 적응이 안 되어 몸이 피곤합니다.

그래도 배우는 것이 재미있으니, 정신적으로는 피곤한 것을 모르고 지내고 있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즉 2000년도에 명퇴를 했을 때 시작을 할 것을...." 하고 많이 후회를 했습니다. 그랬으면 목공예도 배우고 이미 도예도 같이 병행해서 시작을 하므로써, 서로 장르는 조금 다르지만 풍부한 예술과 작품 세계를 경험할 수가 있을 터이니 말이죠.


그때 바로 시작을 했더라면 어리석게도 남에게 이용을 당하지도, 떼이지도 않았을 터이니 얼마나 다행스럽고 행복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었지요.


그러나, 모든 것은 투자를 하지 않으면 내 것이 되지 않는 법이라 생각하니, 고귀한 인생수업을 하기 위한 아주 큰 수업료를 지불했다 생각을 하고, 한 켠으로는 "뒤늦게 그나마 몽땅 날리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나는 복받은 사람이다" 라는 생각도 듭니다.


어쨌던, 우리 사람들 사는 세상사, "얻으려면 버려야 한다"는 진리는 영원불변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무엇을 하나 얻으면, 또 하나는 잃게 되어있고, 또 하날 잃으면 또 다른 것을 얻게 되는 것이, 물리와 화학에서 말하는 질량불변의 법칙이 그대로 우리네 세상사에도 적용이 되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체육시간이 있어서 모처럼 축구를 했습니다.

저는 원래 운동을 참 좋아했습니다. 중, 고등학교를 야구명문 학교인 00 중,고등학교를 나와서 야구를 제일 좋아했습니다. 그때는 야구의 명문이기도 하지만 대한민국의 5 대 공립고등학교의 하나였지요.

물론 백인천씨가 몇 년 선배이지요.


저도 중학교 3학년 체력검사 때 벌써 공 던지기를 72미터를 던졌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까지는 키가 그리 적은 편은 아니었는데, 역도를 너무 지나치게 해서 그 후론 키가 크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운동을 좋아해서 그 비슷한 등산에도 미쳐서 겨울 산을 혼자서 야영도 하고 단독등반도 하고 매니아의 비몽사몽 무아의 경지에서 헤어나지 못한 때도 수  십년이었습니다.


초보시절 도봉산 선인봉에서 암벽등반하다 죽을 고비도 몇 번 넘기고, 여름 비오는 설악산의 장기등반과 야영에서 초보자들을 겁도 없이 5명을 데려갔다가 죽음의 계곡, 대청봉을 지나 봉정암과 오세암 사이에서 비박을 하다가 몇 끼를 굶기도 하고, 죽을 고비도 넘겼었고, 아무튼 무엇엔가 빠지면 끝을 보는 성격이었지요.


그런데, 연애만은 그렇게 죽고 못살게(?) 빠져 본 적은 없었지요. 등산과 낚시에 빠져 결혼도 서른 살이 넘어서야 했지요.


산과 물이 내가 제일 사랑하는 애인이었으니까요. 그때는 사귀는 사람이 만나자 해도 토요일, 일요일은 절대 양보를 하지 않았지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오로지 산이었으니까요.


제가 다니던 연구소가 테니스 코트 10여면과 야구와 축구할 만한 운동장이 있어서, 다른 사람들은 축구나 테니스를 주로 많이 했지만, 저는 그때 연구단지 야구 아마츄어 리그를 창설하고 몇 년을 주도해 왔었는데, 전두환이 정권을 잡으면서, 서울에 있는 연구단지의 몇 개 연구소를 대전의 대덕연구단지로 이전하라 해서 84년 대전으로 내려가기까지 리그를 존속 시켰었습니다.


그 당시 일간스포츠에도 본인의 기사가 고우영의 만화가 게재된 면에 전체면의 1/4크기로 사회인야구의 또 다른 "연구단지리그 탄생하다"라고 대서특필(?)은 아니지만 제법 크게 기사화가  된 적이 있었지요.


제가 맡은 포지션은 초기3-4년은 투수였고, 그 후엔 포수로 주로 뛰었었지요. 그러다가 40의 중반쯤 은퇴(?)를 하였지만.....


제 어깨가 좋아, 제 볼을 치는 사람이 드물었었지요. 포수를 볼 때는 2루 견제가 압권(?)이라고들 했었어요. 지나고 보니까 그때가 참 황금기 였어요.


창동이나 수락산 아래 한일은행 야구장, 성대 야구장, 금곡의 동대문상고 야구장, 숙대 운동장, 중고등학교 운동장 등에서 야구를 끝마치면 동료들과 주로 청량리의 "무진장"이라는 삼겹살 집에서 1차 소주 한잔하고, 2차는 이문동 중앙정보부 입구의 맥주 집에서 노래도 부르고(그때는 노래방이 없어서 맥주홀이나 싸롱에서 노래를 부르면 밴드에게 한 곡당 몇 천원씩 주고 노래를 불렀었지요), 술도 마시고 밤 12시 통금시간 직전에 택시 합승하여 집어타고 총알처럼 집으로 날아가기를 몇 년을 했는지? 술도 좋고 친구도 좋았었는데.....


그때는 참 체력도 좋았어요. 그렇게 매일 술을 먹고도 직장엔 지각 한 번 하지 않았으니.....


물론 제가 술을 즐겨하는 편이라 불과 1-2년전 까지도 매일 소주 한 병이나, 매실주 1병은 마셨었지요. 그때는 집에서 혼자서 마시는 날이 많았어요.


왜냐하면 우리 아이들 고등학교때,  큰놈인 아들녀석은 10시에, 막내인 딸아이는 외고에 다녔는데, 이 녀석은 11시에, 이렇게 두차례를 데리러 가야하니, 남들은 퇴근후 동료들과 한 잔들 하지만, 저는 아이들 데리러 가야하니, 그 좋아하는 술 한 잔 같이 하지 못하고, 퇴근 후 집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아이들을 모두 집에 데려다 놓은 연후에나, 한 잔 한 잔 하다 보니 아주 집에서 마시는 습관이 되어 버렸지요.


두 녀석이 2년 차이니까, 그 녀석들 학교로 밤 늦게 데리러 간 세월이 만 5년이지요. 그렇게 키웠는데....


저희 아비는 동료들과 어울려 술도 마시지 못하고 5년이란 세월을 꼼짝없이 묶여 있었는데, 그 녀석들이 뭐 그런것을 알겠습니까?


하기야 나도 그 나이 때는 부모님 고마운 거 몰랐지요.

그러기에 다 제 스스로 자식을 키워봐야 부모 고마움을 안다 하지 않습니까?


그저 저희들 제 몫이나 잘하고 살기만을 바랄 뿐이지, 옛날처럼 자식 덕 보려는 부모가 이제 어디 있겠습니까?


제발 대학졸업하고 제 갈길 가며, 또 제 짝 잘 만나서 행복한 가정 꾸리면 그걸로 대만족이겠지만, 한 편으로는 성인이 되고 자식을 낳아도, 제 부모에게 의지하는 마음을 가지면 어떻게 하나? 이런 노파심과 걱정도 솔직히 없는 게 아닙니다.


가만히 생각을 해보면, 자식이라 할지라도 낳고나서 국민학교 때까지만 같이 있는 시간이 많을 뿐이지, 중학교만 들어가도 그때부터는 부모, 자식 간에 같이 보내는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학교가고, 집에는 12시 되어 아이들이 돌아오면 잠자고, 불과 얼굴 보고 이야기하는 시간은 1-2시간이나 될까요?


귀중하고 소중하고 그야말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자식들인데, 대학교 들어가면 저희 학교생활과 친구들과 어울려 시간을 지내다 보면, 자식을 낳아서 출가 시키기까지 같이 얼굴보고 이야기하는 시간은 정말 짧습니다.


그래서 아이들과 이런 저런 얘기도 거리감 없이 하고, 되도록이면 모든 이야기와 생각을 듣고 싶고 이야기하고 싶은데, 그 녀석들은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하지요. "제가 뭐 어린아인가요?" 하면서.....

마치 제가 혼자 커 온 것처럼.


그러나, 언젠가는 저희 일가를 이루어 떨어져야 할 내 자식.


그래서 자식에게도 항상 헤어지는 연습을 하며 살게 되는 가 봅니다.


이미 뱃 속에서 나오면 나의 분신(자식)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저 부모로서 세상 살아가는 마지막 날까지 자식을 짝사랑하다 가는 것이 부모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저 역시, 제 집사람 역시 이미 부모님들이 저 먼 곳에 계시지만, 우리 대한의 아들, 딸들에게 이런 말을 하고 싶습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려 하지 말고, 그런 어려운 거 하려고 하지 말고, 항상 즐겁고, 감사하고, 행복한 마음으로 화목하게 이야기를 많이 나누어라. 그것이 부모에 대한 최대한의 효도이다"라고 말입니다.


<어머님 급하시다기에>라는 시를 옮겨 봅니다


어머님 급하시다기에

달려갔읍니다 

달려가 

당신 방문 열자

어 너 왔구나

자식 무심도 하지

난 이젠 틀린 것 같다

오랜 못 살 거 같다

더 살 거 같지 않다

이걸로 


당신이 떠나시기 전

한 주일 전 일이옵니다

여름 날이었읍니다


이날부터 한 주일

시름시름 

당신은 자리에 누우신 채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제 손을 꼭 잡으시고

스스로를 보고 계셨읍니다


어린 제 눈에도 선히 보이는

당신 떠나시는 준비

서서히 

이 세상 자리 거두시는 준비

아, 그 마지막 작업

눈 감으시고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떠나시는 길

고요히

정히 

맑게 해 드리기 위해서

의사는 부르지 않고

당신 곁에 꼭 앉아 있었읍니다

일 주일을 두시고

눈을 감으셨다 떴다

또 감으셨다

이 세상 두루 마지막 살펴 보시곤

하시던 모습

식어가는 그 말씀


너 거 있구나



어떻습니까? 내 어머니의 숨결과 그 숭고하신 사랑의 모습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우리 카페의 식구 여러분들, "있을 때 잘해"라는 속어가 있지요?

그러나, 그 말이 이럴 때에는 천박하지 않게 들리실 겁니다.


부모님 살아 생전에 잘 해드리시지요. 돌아가신 날 후회해 보아야 아무것도 잡히는 것은 없습니다.


지금 내 앞에 모습으로 존재해 계실 때가 내가 부모님을 사랑하고, 사랑받은 천분지 일 만큼이라도 보답할 유일한 마지막 기회가 아닌가 싶습니다. 깨어나서, 그리고 느끼십시오. 그리곤 쉬운 것부터 하나, 둘 실천해 보십시오.


<밤의 이야기> 10장


내가 어느 날

하늘에서 나뭇잎이 떨어지는 세종로

저녁 광장 옆에서

가을의 지혜와 악수를 나누고 있을 때

철학과 사색은 담배를 물고

비각 모퉁일 돌고 있었다


생은 아침 일어나서부터 저녁 잠들 때까지

그저 있었다 가면 그뿐

비석은 석공의 수입을 위하여 세워지고

동상은 철물상의 거래로써 끝이 나는 것

역사는 한낱 사학 교수의 생활을 위하여 있고

의사당은 아버지들을 위하여 있는 것


세상은 몽땅 商事 거래

존귀한 것도 없고 비천한 것도 없다


내가 어느 날

서울 모퉁이 나무 아래서

빈자의 지혜와 악수를 나누고 있을 때

지혜는 가랑잎처럼 날리고 몰리고

조국은 마냥 동양의 하늘

낄낄이 손을 잡으며 사라지고 있었다


이 생존이여

빈 자리여!


내가 어느 날

하늘에서 나뭇잎이 떨어지는

후방 사십 리-어느 시장 부근에서

死者의 지혜와 生者의 지혜를 잡고

악수를 나누고 있을 때

밤은 가을을 안고...... 골목을 걷고 있었다



<밤의 이야기> 5장


지금 너와 내가 견디고 있는 것은

실은 오늘이 아니라

내일이다 


그리고 지금 너와 내가 견디고 있는 것은

실은 생활이 아니라

생존이다 


번식과 범람의 대륙

캄캄한 산기슭, 지붕이 없는

별 아래서


지금 너와 내가 목을 축이고 잇는 것은

실은 술이 아니라

가난이다 


그러나 가시망을 넘어서

너와 나를 이어 주는 것은

무엇이냐! 


그리고 덮을 것은 없어도

너와 나를 따뜻이 채워 주는 것은

무엇이냐! 


아! 지금 너와 내가 견디고 있는 것은

실은 오늘이 아니라

내일이다 


그리고 지금 너와 내가 견디고 있는 것은

실은 생명이 아니라

사랑이다 


이제 오늘을 접고 내일을 위해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내일을 위해 소홀하지 않은 준비를 하시기를 바라며, 오늘을 접습니다.


오늘도 좋은 밤 되소서!!!


3월의 한 밤 동산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