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니골 통신-인생2막 이야기/소니골 통신-귀산촌 일기歸山村 日記

동락재 통신-44: 남해기행 1-통영: 이순신 장군의 수루에 올라서서.....

sosoart 2007. 3. 26. 07:49

숙소에서 바라본 통영 앞바다

 

선착장에서 바라본 숙소인 마리너 리조트.  비수기라 한가했고 전망은 좋은 편

 

 

한산도로 떠나기 전의 관광선

 

한산도 제승당의 풀입문인 충무문 전경

 

 

한산도로 들어가는 해협. 가운데 하얗고 뾰죽한 모양이 거북선 모양의 등대이다

 

충무문 안 쪽, 수루의 앞쪽 비각

 

늦깎이 공예인으로서 전통 문물이나 단청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누가 나무쟁이라 안할까봐.

 

이순신 장군이 밤에 시름에 잠겨,   큰 칼 옆에 차고 시 한 수 지으시던 그 수루 앞에서 아내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다 

 

거북선 모양의 등대

 

 

이 충무공의 영정

 

 

숙소에서 바라본 충무 앞바다의 야경

 

동락재 통신-44: 남해기행 1-통영: 이순신 장군의 수루에 올라서서.....   (06.3.15(수)

 



딸이 자신의 고민거리 중 제일 큰 하나가 해결이 되자, 그간의 긴장을 풀고 해

방감에서 머리를 식히고 싶어 여행을 하자고 제안을 하여, 아비인 나로서도 아

내와 함께 흔쾌히 동의를 하였다.  다만, 아들만이 같이 못가는 것이 마음에 걸

리긴 했지만,

아내도 덩달아 많이 마음고생을 했을 터인 즉,  이것저것 잠시 버려두고 2박3일

쯤 다녀오기로 작정을 하고, 목적지와 숙소는 딸아이가 정하도록 맡겼다.


여행지는 딸이 남해와 부산을 가고 싶어 하므로, 그 쪽으로 방향을 정하고 콘도

의 예약사정이 어떤가에 따라 부산과 통영 어느 곳을 먼저 갈 것인가를 정하기

로 하였다.


예약타진 결과 통영 마리너 리조트에서 3. 15(수) 1박을 하고, 그 다음날인  3.

16(목)엔 부산 한화콘도에서 1박을 하기로 결정을 하였다.


내가 3. 13(월)부터 서울에 올라 왔기 때문에 3. 17(금)까지 홍천에 가지 않게

되면 마당의 복돌이 등, 세 녀석의 개들과 토순이, 토돌이 2녀석 토끼의 밥을

굶기게 되면 큰일이 날 수 있으므로, 옆집 용씨네 할머니께 부탁을 할까 하다

가, 잘못하여 개가 물기라도 하면 낭패이므로, 번거롭지만 우리 세 식구가 3.

14(화) 밤 시간에라도 홍천에 가서 개와 토끼 밥을 주고 3. 15(수) 중앙고속도

로를 타고 통영으로 가기로 하였다.


14일 미안한 마음으로 아들의 밑반찬을 이것저것 아내가 준비하여 놓고, 저녁

을 먹고 홍천으로 향했다.


이곳 동락재에 도착을 하니 밤 10시가 넘은 시간이지만, 이것저것 여행에 필요

한 것들을 챙겨 차에 넣어두고, 오랜만에 홍천 집에 온 딸과 아내는 같은 침대

에서 잠을 자고,  나는 거실 옆 큰 방에서 잠을 잤다.

실로 오랜만에 아내와 딸과 같이 가는 여행이다.


재작년 나의 고등학교 동창생들의 강릉나들이에 함께 간 적은 있지만, 우리 가

족의 나들이는 참 오랜만이었다.


그동안 아내는 먹고사는 생업에 종사하느라, 사업장 관리하느라 한가히 여행을

하지도 못했고, 더러 쉬는 날이면 피곤하기에 집에서 쉬는 것이 더 낫다 하여,

가족여행은 나의 퇴직 후에는 엄두도 내지 못했었다.


아들이 빠져서 매우 서운 했지만, 나머지 세 식구의 봄나들이 여행이며, 딸의

숙제 하나를 풀고 난 후의 여행이기에 홀가분한 마음으로 또 즐거운 마음으로

나기로 했다.


아침을 먹고 9시경 집을 나섰다. 홍천읍으로 들어가지 않고, 뒷길 지방도를 타

고 좌운-횡성-원주로 나가 중앙고속도로를 탔다.

중간 휴게소에서 간간히 휴식을 취하고 대구에서 마산행 고속도로를 거쳐 통영

으로 향했다.


몇 년 전에 왔을 때보다 길도 넓어지고 많이 달라져 있었다.


여기도 역시 서울보다는 경유 값이 싸다.  기억으로는 남해 전라도 쪽의 경유

값이 제일 쌌던 것 같다.


마침 기름도 바닥이어서 주유소에 들려 기름을 가득 넣고 통영으로 향했다.

4년 전 아들, 딸과 함께 오던 날은 비가 와서 그런지,  길이 좁은 통영시에 들어

서니  차들이 많이 밀렸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아마 아이들 봄방학인 2월 말이어서 차들이 그렇게 많았던 것 같다.


기억을 더듬어 숙소인 마리너 리조트 가는 길을 제대로 들어서서 헤매지 않고

찾을 수 있었다.


우선 숙소에서 짐을 풀고, 나가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여장을 풀고 밖을 보니 그런대로 전망 좋은 방을 잡은 것 같다.

시장기가 동하여 횟집을 찾아갈까 했더니, 딸아이가 배를 타고 싶다고 하여 숙

소에서 보이는 선착장으로 가서 배편을 알아보니 지금 금방 떠나는 한산도행

배가 있다하기에, 얼떨결에 표를 사서 배에 올랐다.


배를 타고 나니 새삼 매우 배가 고픈 것을 느꼈는데, 요기라도 할 매점도 없어

한산도의 제승당 관람을 끝내고 점심을 먹기로 했다.  시간이 벌써 4시를 가리

키고 있었는데....

     

약 10분 정도 지나니, 벌써 다 왔다고 한다.   하긴 저 멀리에 우리의 숙소가 보

이는 거리였다.  소양호의 민물 배를 타고 청평사를 가는 시간보다도 짧았던 것

처럼 느꼈다.


한산도에 내려서 제승당 관람의 매표를 하고 15분 정도의 길을 걷자니, 상쾌한

갯내음이 코를 간지른다.


물이 조금 빠진 갯가엔 아낙들이 무언가를 채취하느라 몇 몇 사람들이 웅크리

고 호미질을 한다.


동백은 벌써 거의 다 지고, 끝물에도 다 피지도 못하고 시들한 매화꽃인 듯 몽

우리가 벚꽃 같아 보인다.

사람도 그렇게 덜 되고 늦되는 사람들이 있듯이, 만물은 모두 그런가 보다.


개나리나 벚나무들의 꽃망울이 이제나 저제나, 서로 경쟁 삼아,  건드리면 터질

듯 한 태세다.


앞서가는 단체관광객들을 따라 가니 커다란 소나무들이 더욱 더 경내를 경건하

고, 고즈녁하게 느끼도록 만드는 것 같이 고요하다.


언덕위에 자리 잡고 있는 제승당은 지붕을 고치는 듯 공사 중 이었고, 수루에

올라서니 머릿속에선 장군의 시 한 수가 절로 나온다.


한산 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수루(戍樓)에서 멀리 해협을 바라보니,

그 옛날에도 달밤에 바다를 보았다면, 어디서 들리는 구성진 피리소리와 함께

고향생각이 절로 날 듯 하다.


왜구와의 전쟁을 치루면서 가족들과 오랜 동안 떨어져 있는 병사와 장군들의

마음은 오죽하겠는가?  피리의 간드러진 음율이 애간장을 녹일듯 싶다.


달 빛 비치는 바다의 고요한 밤은 실로 많은 것을 그리웁게 하고, 많은 보고싶

은 얼굴들을 떠오르게 할 터인 즉, 예나 지금이나 나라를 지키는 군인들의 노고

와 애국심은 국가의 간성이 아니겠나?


김대중 정권이후부터 지금의 노무현 정권에 이르기까지 마치 나라를 지키는 

군인은 벌레처럼 흉물시 하고, 북쪽에 악착같이 저희들의 권세와 지배를 위하

여 북한 주민을 도탄에 빠트리게 하는 빨갱이 놈들의 눈치를 보며, 租貢을 갖다

바치는 한심한 작태를 자행하고 있는 자들은 그야말로 온 자유국민의 이름으로 처단을 하여야 할 것이다.

남한의 못 사는 절대빈곤의 동포는 인권이 없고, 저 빨간 무리들과 북녘 동포만

인권이 있는 불쌍한 동족인가?

빨갱이 놈들을 열사니 유공자니 하는 이러한 자들을 과연 묵시하고 가만히 놓

아두어야 할 것인가.......?

하긴 멀쩡한 선량한 국민의 인권은 없고, 흉악한 범죄자들의 인권은 제 상전 모

시듯 하는 자들 아닌가?


수루를 내려와 이 충무공의 영정 앞에서 경건한 마음으로 참배를 하였다.

어떤 놈은 자기가 충무공을 닮았다느니, 김구를 닮았다느니 하면서 TV 매체에

공익광고를 구실 삼아 착각과 환청에 빠져서, 제 PR에만 열을 올리고 있지를

않는가 말이다.


주어진 시간이 짧아서, 천천히 둘러보고 싶었지만, 아쉬움을 남기고 다시 배에

올라 뭍으로 돌아왔다.

조그만 바위섬에서 낚시를 하는 낚시꾼이 보였으나 저곳이 제일 낚시가 안 되

는 곳이라고 안내인이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배에서 내려 횟감을 싸게 판다는 시장으로 향했다.  약 10분정도의 거리였는데,

마침 시장 앞에 주차장이 있어서 주차를 하고 시장으로 들어갔다.


요즈음은 전국 어디에서나, 재래시장의 활성화를 위하여 시장건물을 신축하고,

통로 등을 정비하는 곳이 많았는데, 이곳도 예외는 아니어서 한 참 공사 중이었

다. 생선회라고 안내판이 써있는 곳으로 가니 바로 살아있는 싱싱한 생선들을

커다란 고무광주리에 넣어두고 서로들 자기 것을 사가라며 시끄럽다.


값을 물어보니 도미, 농어, 도다리, 숭어 등 비교적 큰 놈들을 4마리에 5만원 이

란다.

서울이나 구리의 수산시장에서 산다 해도 이 정도의 활어라면 10만원은 부를

것 같은데, 많이 싸다.

물론 관광철이 아니라서 그렇긴 하겠지만.....


아내는 멍게와 해삼을 좋아하니 멍게와 해삼을 섞고 그 생선 중 2마리만을 횟

감으로 만들어 달라며 아내는 5만3천원에 흥정을 했다.


딸아이는 아빠가 굴을 좋아하니 굴도 사가자고 하는데, 어떻게 그 많은 것을 한

꺼번에 먹을 수 있겠나 싶어, 굴은 다음에 먹기로 했다.

술 마신 후 굴 국이 참으로 좋긴 좋은데.....


아내는 물건 값을 흥정할 줄을 모른다.  그래서 시장엔 아예 가질 않는다.

마음이 여려, 남이 부르는 물건 값을 깍질 못한다.  그래서 가끔은 나에게 퉁박을 받는다.

“고모 떡도 싸야 사먹는다”고 시장에서 “장사꾼이 달라는 대로 다 주면, 어떻게

하느냐?”는 나의 불평에도 깎지를 못해, 참다못해 내가 “아주머니! 좀 싸게 주

세요!” 하고 거든다.  그런다고 싸게 주겠는가?


어쨌던 오랜만에 생선회를 싸고 푸짐하게 먹을 수 있어서 마음이 모처럼 흐뭇

하다. 먹는 것을 이리도 밝히니 나는 큰 인물이 못되나보다.

음식점에선 이 정도의 양이면 30만 원 이상은 할게다.


서로들 배가 고프니 얼른 숙소로 가자하여, 시장의 구경은 하지도 못하고 콘도

로 돌아왔다.

사실 여행을 다니면서 그 지방의 풍물과 시장의 구경은 재미도 있고 그 지방의

특색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곳이기도 한데, 아쉬웠다.

시장이란 곳은 사람의 사는 열기가 느껴지며, 더구나 새벽시장에서의 사람들의

모습은 삶에의 강한 의욕을 불러 일으키는 곳이기도 하다.

물건을 흥정하며 “깎아달라”, “밑져서 안된다” 며 승강이를 하며 밀고 땡기는

흥정의 “수작”들이 여간 재미있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숙소의 슈퍼에서 초장, 겨자, 상추 등 야채와 “단순히 건배에 사용할”(아내에게

술을 살 때에 한 말) 술 등을 사가지고 올라가서 푸짐한 상을 벌렸다.


오랜만에 싱싱하고 푸짐한 회를 먹으니, 맛도 있고 게다가 술 맛은 더 좋았다.


셋이서 건배를 하고, 회를 양껏 먹었는데도 많이 남았다.

물론 아내와 나는 아들이 함께 하지 못해서 무척 마음에 걸렸다. 부모의 마음이

란 것이 좋은 옷, 좋은 것,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매끄럽게 넘어가지는 않는 것

아니겠는가? 

먹는 도중에 아들에게 전화를 하니, 저녁을 먹고 지금 잠시 쉬고 있단다.


“다음 기회에는 꼭 같이 여행을 가자!, 아들이 없어서 섭섭하다”는 말로 전화를

끊었다.

거실 창과 침실 창밖으로 보이는 야경과 바닷물에 어린 불빛을 보니, “동양의

나포리”라고 자랑하는 통영의 야경도 그런대로 여행의 멋을 더하게 해준다.


차를 한 잔 하며, 야경을 감상하는 시간도 오랜만에 갖는 행복한 시간이었다.


딸이 야경을 찍는다며 테라스 밖에 나가 연신 셔터를 눌러 댄다

엄마, 아빠를 불러 사진을 찍어주고, 저도 찍고, 야경을 배경으로 사진도 많이

찍었다.


딸도 오빠가 같이 못 온 것이 못내 아쉬운지, 다음에 올 때에는 여기 충무에서

만 3-4일 머물며, 외국인과 부부의 연을 맺고 30년 이상인가를 잘 가꾸어 놓은

“외도”를 꼭 가보자고 한다.


아내와 함께,  다음에 올 적에는 배로 한려수도(이곳 통영에서 전라도 여수의

오동도 까지를 말한다고 한다) 관광도 하고, 남해도에 다시 가보고, 거제도도

좀 더 여유를 갖고 보자고 약속을 하였다.

시간만 많이 걸리는 부산은 가지 않기로 하고, 부산을 가려면 “경주”관광을 며

칠 더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다음에는 아주 작정을 하고 온 가족이 적어도 5-6일의 일정으로 느긋하게 쉬면

서 관광을 하기로 했다.


아내가 교통사고의 후유증으로 차를 오래 타거나 피곤하면 어깨는 물론 온 몸

이 아프다 하니, 앞으로는 양보다는 질로서, 여행지의 인문지리도 미리 충분히

공부하여 관광과 휴식의  의미를 흠뻑 느껴보고자 한다.


나는 여행을 떠나기 전엔 주로 “뿌리깊은 나무”에서 발간한 “한국의 발견/한반

도와 한국사람, 전 11권”에서 해당 지역의 정보와 인문지리를 미리 알아보거

나, 시간이 여의치 않으면 책을 지니고 가기도 한다.


나는  여행을 즐겨하기에 세계 각국의 안내 책자나 전국 여행정보에 관한 책을

많이 소장하고 있다.


그러나 나라 안팎으로 하루가 다르게 발전이 되는 관계로, 단행본으로 출판된

도서는 금시 지나간 정보가 되는 것이 십상이어서, 인문지리에 관한 내용은 단

행본과 잡지 등에서 기본적으로 공부(?)를 한 후 인터넷에서 최신의 정보를 많

이 입수하는 편이다.


요즈음은 각 개인들이 자기의 여행담이나 기행문을 자랑삼아, 인터넷 매체를

통하여 널리 알리고는 있지만, 인문지리학적인 측면이 아닌 다소 감성적이고

정확지 않은 떠도는 정보들이 많기에, 그런 정보를 토대로  해당 나라나 지역을

이해하기에는  매우 아쉽고 부족하다 하겠다.


나도 젊을 적에는 그저 대충 대충 되도록 많은 것을 보려고만 했고, 자세한 역

사나 지리적 측면에서의 이해는 역사, 지리학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등한시 했

으나, 나이가 차차 들어감에 따라 해당지역의 역사적, 지리적 배경을 이해하고,

조사하여, 해당 지역에 대한 많은 지식을 가지고 떠날수록 여행의 재미와 새로

이 얻는 지식은 倍加된다고 확신을 한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미리 역사적, 지리적 환경이나 배경과 그 지역의 출신 인물

들에 대하여 많이 알고자, 역사책이나 地理誌 등을 읽어 사전지식을 풍부하게

해가지고 떠나려 노력을 하는 편이다.


이번 여행은 창졸간에 떠나왔기에 “한국의 발견”  경상남도 편과 부산 편의  2

권을 가방에 넣어 가지고 왔기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 아내와 함께 읽어 보았다.


내가 알기로도 지금의 “통영시”는 통영이 아니고 “충무시” 였었는데, 왜 이름을

통영으로 바꿨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나의 추측으로는 아마 박정희 대통령 시절, 그가 군인으로서 충무공을 흠모하

고 존경하여, 그 나라에 대한 애국심과 충성심을 기리고자 충무시라든지 현충

사라든지 역사적으로 武人에 관련된 역사적 공적들만을 의도적으로 기리기 위

해 인위적으로 急造한다는 이유로, 그 후 소위 문민정부라고 하는 김영삼 정권

때부터 아마  이순신 장군의 號인 “충무”를 버리고 “통영”을 채택한 숨은 의도

가 있는 것으로 이해를 하고 있다.


이 얼마나 어줍잖고 지나가던 개가 다 웃을 일들인가?

더구나 일제의 잔영이니 어쩌니 하며 “온양시”를 “아산시”로 바꾸지를 않나, 

지금의 교통상황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현재 광화문의 위치가 잘 못 되어 훨씬

더 앞으로 옮긴다고 함부로 말부터 내뱉지를 않나?  이러한 행동들이 소위 문

민정부다, 국민의 정부다, 참여정부다 하는 무뇌아들의 하는 짓거리 들이다.

 

주객이 전도되고 본말이 전도된, 본질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면서 대중적 포

퓨리즘에만 목숨을 걸고, 우매한 일부 국민들을 선동하는 작태는 하루 빨리 사

라져야 할 짓들이다.


어쨌거나 충무라는 명칭은 충무공에서, 통영이란 명칭은 통제영에서 따온 것이

다.  그렇다면 충무나 통영은 결국은 이순신 장군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왜 굳이 통영으로 바꿨는가?”는 무지의 소치에서 비롯된 아이러

니가 아닐 수 없다.


조선시대 후반에 오늘날 통영시의 삼도 수군 통제영의 통제사가 정승으로 영전

을 하여 서울로 떠나게 될 때, “강구 안 파래야, 대구, 복장어 쌈아, 날씨 맑고

물 좋은 너를 두고 정승 길이 웬 말이냐?” 라며 떠났다는 얘기가 있다.

이렇게도 통영을 떠나는 것을 섭섭히 여겼다 하여 통영 사람들이 제고장을 자

랑할 때, 입에 침이 마르도록 써 먹는 말이었다 한다.


그만큼, 통영이란 곳이 그 옛날에도 오늘날 한려수도란 명승지역을 정하여 국

립해상공원으로,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기 전부터 아름다웠던 곳이란 것을 알 수

가 있을 듯하다.


통영이란 곳이 역사적으로 조선수군의 근거지이기도 하였고, 이순신 장군의 한

산대첩이며,  “큰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던 곳” 한산도의 수루(戍樓)나,  이순

신 장군이 통제사의 일을 맡으며 손수 집을 지어 3년8개월 동안 머물렀던 제승

당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이 제승당은 1597년 칠천량 싸움으로 잿더미가 된 것을 이백년 쯤 후에 새로

세운 것이 오늘날의 모습이다.


또한 통영이란 곳은 통영 갓, 통영 자개로 만든 나전칠기, 또 장롱, 상, 소반이

나 더불어 두석(장석)으로도 유명한 곳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 많은 전통 공예품들이 유독 통영 땅에서 한꺼번에 맥을 이어 오고 있는 것은

통제영이 있었던 덕분이라고 한다.


즉, 임진왜란이 끝나 통제영이 한산도에서 오늘날의 통영시 땅으로 옮겨 온 뒤

로 兵營으로서 안정을 되찾게 되자, 통제사가 그 안에 병참기지 구실을 하는 열

두 工房을 두고 갖가지 군수물자를 만들게 하였는데, 그 일부가 생활공예품을

만드는 공방이 딸려 있었다는 것이다.

하여, 전통공예의 맥을 있는 무형문화재로서 나전칠기 기능보유자, 통영 갓 기

능보유자, 통영장 기능 보유자들이 있었지만, 이제는 뿔뿔이 흩어지고 세상을

떠나 그 전통을 잇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현실이다.


더구나 나와 같은 전통 목가구 재현을 위하여 열심히 공부하고 작업하는 사람

들에게는  당장 아쉬운 것이,  가구에 부착하여 견고성은 물론, 아름다움을 더 해주는 두석(장석)이라는 놋쇠나 백동으로 만든 목가구 장식을 구하기가 더 어

려워, 전통가구 제작에 많은 어려움이 있다.

이러한 우리네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고 보존하기 위해서는 개인보다는 국가가

주도하여 방안을 마련하여야 할 터인데, 정권을 잡고 있는 자나 정치가들이 문

화적인 白痴여서, 제 입과 눈, 귀, 배설의 즐거움만을 좇아가니 무언들 제대로

될 리가 있겠는가?


여행의 기행문이 장문의 본인도 모르게 연구논문이나 보고서의 논조로 쓰여 짐

은, 오랜 직업의 습관 탓이려니,


통영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각종 서적과 참고자료들을 더 읽어서 온 가족이 다

시 통영을 찾을 때 유익한 지식이 되도록 기약을 하며, 내일의 거제 여행으로

그 말머리를 잇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