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니골 통신-인생2막 이야기/소니골 통신-귀산촌 일기歸山村 日記

동락재 통신-46: 남해기행 마지막 편: 부산

sosoart 2007. 3. 26. 07:51

 

달맞이고개 해월정에서 아내와 함께

 

 

 

나의 사랑하는 아내와 딸의 모습을 담으며....

 

 

 

해월정에서 본 동백섬과 이름 모를 다리....

 

 

 

<동락재 통신-46: 남해기행 마지막 편: 부산 >      2006. 3. 17(금)


2박3일의 짧은 여정을 마치고, 오늘은 서울로 귀환하는 날이다.


아침은 역시 콘도에서 간단하게 마치고, 어젯밤 가보지 못한 해운대의 달맞이

고개를 올랐다.


숙소에서 10분 정도의 거리여서 고개를 오르며 바다를 바라보니, 가슴이 시원

함을 느낀다.


부산에 사는 사람들은 항상 바다를 볼 수 있으니, 좋기도 하려니와, 바다와 같

은 넓은 아량과 이해로서 사람들을 대하는 마음이 절로 생길 것 같아, 매우 부

러운 마음이었다.


이번에 부산을 올 때에는, 금정산성, 산성 막걸리, 동래 파전, 자갈치 시장의 꼼

장어, 재치국(재첩국), 동래 범어사 등 나름대로 몇 군데를 관람하며, 맛있는 음

식도 먹으면서 이른 봄의 기운을 마음껏 쏘이고 싶었는데, 역시 아내와 딸이 이

틀의 강행군에 많이 피곤해 하니, 욕심을 부릴 수가 없었다.


달맞이 고개의 관망대이며 정자인 海月亭에서 사진을 찍고 저 멀리 오륙도와

예전보다 많이 변한 해운대의 풍광을 사진에 담고, 아쉬운 부산과의 이별을 하

였다.


우리나라 어느 곳을 여행을 하던지, 항상 느끼게 되는 것은, 지방자치 이후 각

지방의 지자체에서 주민들의 소득을 올리기 위해 각종 수익사업을 벌인답시고,

엄청난 예산의 낭비만 하였지, 실제로 주민들의 소득에 도움이 되는 사업을 영

위하는 곳은 과문 탓인지 몰라도, 거의 들은 바 없다.


“모두 눈 먼 돈, 내가 먼저 먹으면 그만이다”라는 마음으로 지자체의 예산을 낭

비하는 짓거리를 해마다 보게 되는데, 이제는 제발 그러지 말고, 각 지자체에

그 지역의 종합 여행안내소 쯤을 하나를 설치하여 그 지방의 문화와 역사를 쉽

게 접근할 수 있는 피상적이며 무성의하지 않은, 자상한 안내는 물론, 각종 인

쇄물과 홍보물을 상세하고, 각급 학교의 학습이나 평생교육의 교재로도 활용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지방의 역사와 문화에 정통한  권위 있고 높은 학식과 식견

이 있는 인사들에게 집필을 의뢰하여, 고급 향토역사교육 및 홍보자료로 간행

하여, 무료 배포하던지, 최소한의 실비로 판매하여, 그 지방에 대한 홍보 및 귀

중한, 살아있는 학습 자료로서 활용케 하여, 쓸모없는 지방의 사업에 예산을 낭

비하지 말고, 이런 곳에 사용을 하기를 일부 無腦兒的인 지자체 대표나 지방 관

리들이 정말 제 고장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그 지방의 발전을 위하여 노심초사

하는 모습을 제발 좀 보여 주었으면 좋겠다.


부산이란 곳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개항한 일본이 만

들어낸 전형적인 식민지 항구 도시이다.

조선 태종 7년인 1407년에 왜구에 대처하는 방책의 하나로 부산과 제포에 왜

관이 설치되었고, 그 뒤에 여러 변천과정을 거쳐 중종 39년인 1544년부터 부산

이 유일한 倭館으로 존속되어 왔다.

그 후 임진왜란 등 국가의 변란을 겪고, 또한 6.25 사변 이후 3년 동안 대한민

국 임시수도가 되어 피난민이 몰려들기도 하였고, 또한 유엔군의 보급기지와

작전기지로 쓰인 곳이기도 하다.

이미 1955년에 부산의 인구가 100만 명이 넘어설 정도로 전쟁으로 인한 판잣

집으로 뒤덮이게 되기도 했다.


그러기에 불도 많이 났었고, 국제시장은 잊어버릴 만하면 불이 났을 정도로 화

재가 빈번하기도 했다.


물론 그 시절엔 부산만이 아니라, 서울이나 대도시의 커다란 시장들은 겨울철

화재의 온상이기도 하지 않았던가?


피난민의 도시, 부산.

이것이 우리나라의 그리 오래 전 얘기가 아닌 우리들의 현실이었다.


북괴 김일성 놈의 남침으로 동족을 향한 총, 칼, 그리고 수많은 목숨을 앗아간

그 잔학무도한 놈들을 동포랍시고, 김대중이나 노무현정권의 박애주의자들은

돈이다, 쌀이다, 비료다, 무어다 하며 朝貢(?)을 갔다 바치지 않는가?


지금도 우리나라는 풍요 속의 빈곤으로 점심을 굶는 어린 학생들이 얼마나 많

다고 하는가?

이 인사들의 눈엔 우리 남한 동포들의 빈곤과 饑餓는 보이지 않고, 북한 놈들의

인권과 빈곤은 가슴이 쓰리고, 뼈와 살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끼나 보다.


더구나 그것도 굶어 쓰러지는 북한의 주민들에게 전달되지도 않는 뭉텅이 돈

과, 식량, 그리고 각종 원조품을 무작정, 무한대로 쓸어 붓고 있지 않은가?


그것도 모자라서 금강산관광을 정부에서 보조하여 보내지를 않나......

 

제발 그 돈 좀, 김대중 이후 신 빈곤층(IMF 이후, 외국에 기업을 헐 값에 팔아 넘

기고, 실업자를 양산하여, 일을 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고,

임금도 최저임금 보장도 안 되며, 그나마 체불되어 받지도 못하는 신 빈곤층이

얼마나 많은지, 이 인사들은 알고 있나 모르겠다)의 고통을 왜 모른척하며, 양

극화만 부르짖는지 모르겠다.  그것은 저희들 자신이 해결해야 할 일이지, 국민

들에게 선동하고, 얘기하면 국민이 해결하란 말인가? 


각설하고, 해운대의 아침 달맞이 고개 풍경은 썰물이 지나간 백사장처럼 고요

하더라.


아내와 딸이 피곤하다며, 이제는 곧장 고속도로로 들어서서 서울로 가자고 한

다.

더 자세한 부산의 관광은 훗날 다시 하기로 하고 서울로 가는 길을 들어섰다.

 

평일이라도 대형 트럭들의 통행이 많아서 정신이 없다.

대구, 대전을 지나 중부고속도로로 들어서서 동서울 쪽으로 향해, 집으로 오니 저녁시간이다.


집에 도착하니 파김치가 되어 아내와 딸은 피곤하다면서도 아들의 저녁 준비를

하고, 며칠 만에 온 가족이 한 식탁에서 식사를 하였다.

역시 내 집이 제일 편하다며 제일 편한 자세로 소파에 앉거나 누워서 조금 이야

기를 나누다 12시도 되지 않아 잠들이 들었다.

나는 동락재에 두고 온, 마당의 다섯 녀석들이 먹을 사료와 물은 모자르지 않았

는지 걱정이 되었지만, 내일 오전에 내려가기로 하고 잠에 빠졌다.


이다음의 여행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다시금 전라남북도와 남도의 섬 여

행을 온 가족이 다 갈 수 있기를 기약하며 짧은 여행의 아쉬움을 접기로 했다.


다음엔 食道樂과 눈으로 하는 여행보다는,  눈과 머리로 하는 문화의 여행을 계

획하며, 여행 전에 많은 자료를 찾고 조사하고 준비하여, 풍부한 일상의 일탈에

서 느끼는 즐거움과 향토의 문화를 흠뻑 느끼고자 한다.

지역의 박물관, 문화재 및 그 기록들도 접하는 시간을 할애하고 심층적인 향토

의 역사적 배경과 문화를 알기 위해 충분한 공부도 여행 전에 미리 하고자 한

다.


더하여 전국 각 사찰의 목조건축의 여러 형태, 또한 사찰 문창살이나 단청, 木

魚라든지,  佛事와 사찰의  모든 전통 문화재와 공예품에 대해 더욱 조심스러운

관찰력으로 사진의 기록과 더불어 뜻있는 여행이 되고자 계획을 세우려 한다.

 

鄭玄宗의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이란 시가,  나의 마음을 “혹? 훔쳐 본

것은 아닌가?” 하여 옮겨 본다.


나는 가끔 후회한다

그때 그 일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그때 그 사람이

그때 그 물건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더 열심히 파고들고

더 열심히 말을 걸고

더 열심히 귀 기울이고

더 열심히 사랑할 걸.....


반벙어리처럼

귀머거리처럼

보내지는 않았는가

우두커니처럼........

더 열심히 그 순간을

사랑할 것을......

모든 순간이 다아

꽃봉오리인 것을,

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

꽃봉오리인 것을!


오늘은 이 장래가 촉망되는(???????)  훌륭한 木藝術家에게 우편함을 만들어

달라는 아내의 知人의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어서, 하루 종일 작업을 하고 완료

를 하였습니다.


하기사, 木藝術家니, 木工藝家이니 하며, 전통 木彫刻이나 木工藝만 하고 싶어

도, 거절할 수 없는 木工藝의 일이 아닌 木工의 일을 하게 될 때도 더러는 있는

지라,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일진데......


시골에 사는 백수라고 제 할 일만 할 수가 있겠나? 싶어, 사는 게 다 그러려니

하며, 오늘의 시간을 살았습니다.


내일은 더 좋은 날들이 오기를 바라며, 오늘의 끝 시간을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