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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락재 통신-47: "동락재 통신"을 다시 이어가며

sosoart 2007. 3. 26. 07:53

홍천 수타사. 어느 사찰의 말사이지만 홍천에선 유일한 사찰같은 사찰이라고 할 수 있다.



 

 


<동락재 통신-47: "동락재 통신"을 다시 이어가며>   2006. 3. 21

 

“同樂齋 通信”을 인터넷 카페에 연재 했던 때가 벌써 4년이 지났다.

 

퇴직을 하자마자 한참 의욕에 차서 겁 없이 일을 저지르고, 이리 저리 일을 벌

여 놓고도 자신감에 차있었지만 그 후 겨우 2 년여의 시간이 흘렀을 뿐인데도

낙관적으로 보였던 허상은 아침 안개처럼 어느새 씻은 듯이 거둬지고, 남아 있

는 실체는 아무것도 잡히는 것이 없었다.


겨우 시골 집 하나 건지고 제풀에 주저앉은 곳이 바로 이 “同樂齋”라는 곳이었

다.


노도처럼 밀려오는 감당할 수 없는 분노, 패배감과 四面楚歌의 냉소적 고적함

과 정적 속에 버려진 외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뼈에 스며드는 슬픔과 좌절이

었다.


인생을 사는데 아무런 계산도 없이, 미련하고 무지하고 순진무구하며 허무한

내 인생이 버리고 싶기도 했다. 


자신이 속했던 어느 무리를 마다하고 스스로 걸어나왔지만, 이재와서는  밀려

나간 것 같은 脫離感과,  현실과 격리되어 버려진 황폐한 황무지와도 같은 그런

매우 건조한 心性만이 나를 지탱하고 있었다.


그래도 여기서 쓰러진다면 안 되었기에, 가족들에게 그런 나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기에, 예전처럼 그런 얼굴에 그런 헛김이 잔뜩 들어간 큰 목소리로 살

아감을 보여주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나쳐 보건데, 그래도 그 때는 지금에 비하면 그래도 “부잣집 망해도 3년은 

간다”는 것처럼 견딜 만 했다.


그리고 쓰라린 상처를 조금이나마 치유하고 잊을 수 있었던 것은 재취업이라도

할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前職에 머무를 때와는 모든 면에서 비교를 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그 나이에

그런 재취업은 이제 와서 돌이켜 보면 아주 특별한 대우였었는데........


그것도 제 푼수를 이기지 못하고 제 주제에 무슨  “弘益人間”하겠다고 오너와의

氣 싸움을 벌이다, 배짱이 맞지 않는다고 그마저 중거리 슛 차듯 멀리 차버리고

때려치웠으니, 지금 생각하면 허허로운 웃음이 나올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허

허로운 내 인생이여......


그리고는 목공예디자인을 배운다고 그 나이에 또 엉뚱한 다른 짓을 하면서도,

“나만의 테두리 안에서만 蟄居한다면 나의 삶은 죽음과도 같을 것이다”라는 생

각에, 삶에의 의욕을 불러일으킬 같잖은 동기부여의 의미에서 인터넷 세상에

들어가 메일 친구도 사귀고, 인터넷 카페에 들어가 이런 저런 살아가는 이야기

를 “同樂齋 通信”이라 이름 하여 올렸었다.


이러구러, 목공예디자인 수업을 마치고 전통 木家具, 전통 木彫刻 등의 작업에

몰두하면서, 아마츄어로서 그렸던 그림과의 조화로운 만남을 형상화하고 浮彫

와 같은 그림으로 표현하면서 나만의 木藝術의 세계를 만들자며 작업에 정진을

하느라, 또 먹고 살아야 된다는 생존의 정신적 압박에 가위 눌리며, 남들의 삶

처럼 평균적인 생활도 되지 않는 “사람의 삶과 같지 않은 생활”을 해왔던 것이

지금까지의 피를 말리는 괴로운 시간들이었다.


아니 그러한 시간은 아직도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지만.......


게다가 2 년전 겨울에 아내의 事業場인 춘천으로 출근을 위하여 아내를 태우고

눈길을 운전하다가, 눈길에 미끄러져 1 미터 높이의 도로 밖 논으로,  차체가

써커스 하듯 2 회전하고 거꾸로 박혔지만,  폐차를 할 정도로 차가 부숴졌지만

목숨을 건진 것만을  다행으로 여기고, 또한 사고 후유증으로 인하여  집사람 

業場을 별안간 정리하게 되어 시설비, 권리금, 商品代金 등은 한 푼도 건지지

못하고 폐업을 하고 말았다.


그래도 유일한 가족들의 밥줄이었는데......


퇴직 후 지금까지 모두 남을 위해(?) 갖다 바친 수업료만 지불하고, 얻은 것은

인간에 대한 환멸과, 인간의 존엄과 품위유지의 최소한의 인격을 지키기 위한

“양반정신”은  온데 간데 없이, 뭇 인간에 대한 적개심과 바보같은 悔恨만을 차

곡차곡 쌓고 있었다.


더구나 木藝術의 작업과 학술적 탐구에 정진하기 위하여 더 깊이 파고들 예정

이었으나, 더 이상 주변은 나의 만용(?)을 허락하지 않아서, 다른 좌절도 같이

겪어야 했다.

 

그래서 나의 “生活 日記” 이자 “살아가는 삶의 이야기”인 “同樂齋 通信”의 續篇

이라 할 수 있는 나의 살아가는 이야기는 아직도 끄적일 수가 없었다는 것이 정

확한 표현이라 할 수 있겠다.


더 정확히 말하면 지금의 생활은 사람이 예사스럽게 살아가는 “生活”의 이야기

가 아닌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生存” 의 몸부림 밖에는 되지 않아서, 남들처럼

한가로이 글자로 이야기를 꾸밀 수가 없는 절박한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지난 일 년 동안, 나와 아내는 참으로 많은 인생의 경험을 했다.  더 이상 추락

할 수 없는 낮은 곳까지 내려가서, “할 수 없이 자기에게 주어진 밑바닥 인생살

이를 하는 이들과 같은 同類로서”의 경험도 각자 2-3개월 이상을 하기도 했다.


그래도 아직은 뱃살에 기름기가 남아서 인지, 더는 그런 세상에서 그들과 같이

생존의 몸부림을 치기에는 “체력”이나 “인간의 예절을 버리는 상놈이나 노예

근성”과 “惡質的 根性”이 따르지 못해 스스로 포기하고, “아, 우리는  이 세상에

서 결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러한 微物밖에는 되지 않는다”는 것을 뼛속 깊

이 사무치게 인식을 하게 되었다.


더럽고 혼탁한 세상에서 버틸 수 있는 아무런 몸과 마음을 만드는 준비도 없이,

비록 바닥의 생활이긴 하지만 함부로 뛰어들었다는 “호사스런 사치와 만용을

부렸다”는 깨달음만을 얻었을 뿐이었다.


우리 가족이 구성된 이후 최대의 절박한 위기였다.  누구 하나 의지할 데 없는

四顧無親에 다름없는 나의 주변이기에 더욱 더 외로움과 적막감을 느꼈지만,

끝까지 마음을 놓지 않았기에 “이제는 起死回生의 기회가 왔다”고 마음을 다잡

아,  다시금 똘똘 뭉쳐, 제로 베이스에서 굳은 정신과 마음으로 거친 풍랑을 헤

쳐 나갈 준비를 하고 있다. 


인생의 살아가는 예절을 그야말로 “껄렁한” 것으로 알고 “껄렁한” 마음으로 스

스로 명예 퇴직을 한 후, 6 년 동안 인생이란 것에 대한 臥薪嘗膽과 絶體絶命의

순간까지 몸소 체험을 한 후, 이제는 “인생을 쉽게 살지는 않겠다”는 각오와 한

순간 한 순간을 全力投球하는 마음으로 살고자 한다.


내 인생을 自重自愛하며 모두를 사랑할 수 있는 겸손한 마음으로 다시금 새롭

게 살아가고자, 우리 가족 모두가 서로 따뜻한 손을 꽉 잡고 “말없는 약속”을 하

였다.


이제부터,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삶을 계획하고, 경영하며,  生佛이 되고자”

경건히 다짐하는 마음이다.


다시금 “同樂齋 通信”을 쓰며 나와 내 아내의 패배하지 않고 살아가는 삶의 이

야기를 정리하고자 한다.


동락재에서  동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