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니골 통신-인생2막 이야기/소니골 통신-귀산촌 일기歸山村 日記

동락재 통신-45: 남해기행 2-거제도

sosoart 2007. 3. 26. 07:50


 

거제도 해금강 가는 길목의 전망대에서....  낚시꾼이 포인트를 가늠하는지 서성이고 있었다.

 

기암과 소나무가 절경인 해금강.  날이 흐리고 비가 와서 선명하지가 않다.

 

 

부산 태종대에서 바라보는 오륙도와 거의 같은 모습이어서, 깜빡 놀랐다.  이렇게 같을 수가....

 

 

해금강을 배경으로..... 누가 부부아니랄까봐.  마냥 좋댄다. 

 

 

비가 오면 어떠리.  다음엔 날 좋은 날 유람선을 타고 해금강을 한바퀴 돌기로 했다.

 

 

몽돌해변.  이렇게 자갈이 매끄럽고 윤기가 난다.  대천엔 모래가 아니라 조개껍질 사장이더니....

 

 

태종대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바다.

 

 

바다 물빛이 너무 말고 파래서 뛰어들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나......?

 

 

날씨가 맑으면 저 멀리 대마도가 어렴풋이 보일텐데.......

 

 

해운대의 숙소 (한화콘도) 17층에서 내려다 본 방파제

 

 

숙소에서 바라본 야경.  딸이 창을 통해 야격을 찍느라 바쁘다.  이곳은 초고층이어서 그런지 베란다가 없어서 밖의 야경은 창을 통해 찍어야 한다.

 

 

 

태종대 전망대의 정자 앞 조각 옆에서

 

 

카메라를 창밖으로 내놓고 셔터를 눌렀다.  그래서 초점이 잘 맞지 않는다.  해운대 해수욕장 앞의 건물들의 불빛이 화려하다.  오른쪽 ㄹ 자 불빛이 달맞이 고개.

 

 

숙소 창으로 내려다 본  바다

 


동락재 통신-45:  남해기행 2-거제도    2006. 3. 16(목)

 

              

 

아침 일찍 식사를 마치고, 콘도에서 Check-out 하자마자 거제도로 향했다.

가는 길에 세병관과 충렬사 그리고 벅수 등 문화재를 보고 가지 못해 아쉬웠지만, 다음에 아들과 온 가족이 다 같이 올적에 보기로 하고, 거제로 가는 길에, 일제 때 만들었다는 해저터널을 보려 하다가 그것도 다음에 보기로 작정을 했다.


이곳 출신의 문인으로 옛날 우리네 교과서에도 실린 “깃발”의 작가 유치환 - 극작가 유치진 씨의 아우이기도 한 - 과 김상옥 씨, “꽃”의 작가 김춘수 씨. 토지의 작가 박경리 씨, 독일로 귀화한  음악가 윤이상 씨, 화가 김형근 씨와 전혁림 씨도 통영 출신의 사람이다. 

특히 6.25 전쟁 때 이곳으로 피난 와서 잠깐 머물었던 이중섭도 통영과 인연이 있는 사람이라 하겠다.


이순신 장군의 동상과 유치환의 “깃발” 詩碑가 있는 남망산에도 오르지 못하고 가는 아쉬움이 매우 컸다.


“아들과 꼭 다시 오마”는 약속을 뒤로 두고, 거제대교를 넘어 외곽 신설 4차선도로를 따라 가다가 전에 아내와 둘이 가보았던 몽돌해수욕장을 거쳐서 가기로 했다.


거제의 진경을 보려면 다리를 건너자마자 왼쪽 도로가 원래의 도로이기에 원래의 풍광이 남아 있을 터였다.


거제도는 500여 미터 안팎의 산들이 중심에 서서 그 자락을 해안으로 뻗는 지형이기에 도로 역시, 강원도의 그것처럼 만만치가 않다.  더구나 길이 좁아서 비오는 날엔 더욱 안전운전에 신경을 써야한다.


이 외곽도로가 아닌 원래의 도로를 타고 해변가를 천천히 달리면서 구경을 하여야 제대로 볼 수가 있는데, 시간에 쫒기다보니 그런 여유가 없었다.


빗줄기가 굵은 것은 아니지만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만만치 않을 뿐 아니라, 차에 넣고 다니던 우산을 이번에는 넣고 오질 않아서, 그냥 비를 맞으며 밖의 경치를 구경하자니 옹색하기 이를 데 없었다.


몽돌해변의 기름기 있는 검은 자갈밭을 아내와 딸은 내려서 밟고 있는 동안, 나는 차를 돌리기 위해 더 안쪽의 넓은 공간이 있는 곳까지 가서 돌아 나왔다.


다시 차에 오른 우리 집의 두 딸(?)을 태우고 해금강의 勝景을 감상하러 언덕길을 오른다.


오르다 보니 전망대라고 하는 바다를 관망할 수 있는 전망대를 데크처럼 만들어 놓은 곳이 있어, 그 앞의 주차공간에 차를 세우고 관망을 하니 과연 비가 오고 흐릿한 날씨였음에도 경치가 아주 좋았다.

이런 날씨에도 불구하고 바다낚시를 나온 꾼의 모습이 보이기도 하였다.


이 거제도만 해도 그리 오래 전이 아닌 6, 7년 전만 해도 번듯한 민박이라든지, 맵시 있게 지어놓은 펜션이나 모텔들은 찾아보기가 어려웠었는데, 이제는 여기 저기 경치가 괜찮다 하는 곳엔 어김없이 들어서 있었다.


요새처럼 비수기에는 오히려 이 섬 안에 들어와 숙소를 정하고 오붓하게 관광을 해도 좋을 듯하였다.

어쨌던, 전망대에서 바다를 배경으로 사진도 찍고, 비바람에 추웠지만 이곳저곳 살펴보며 다시 차에 올랐다.


해금강을 바라 볼 수 있는 곳에는 너른 주차장과 민박집 그리고 모텔과 음식점, 매점들이 즐비하게 들어차 있었다.


시간이 허락하면 유람선을 타고 섬 일대를 관광하며 바닷바람을 즐기고 싶었지만 그 교통이 복잡한 부산으로 가야하니, 사진을 몇 장 찍고 서둘러야 했다.  


이번에는 “거제 포로수용소를 꼭 보고 가마” 했는데 또 다음으로 미룬다.

어디 거제 포로수용소 뿐 이겠는가?


대한민국에서 제주도 다음으로 큰 섬인 거제도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고향이기도 하고, 대우 조선소나 삼성조선소가 자리 잡아, 이 섬을 커다란 경제활동을 하는 활발한 경제도시로 탈바꿈한 곳이어서,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대우조선소 건립당시 세계에서 제일 큰 규모의 높이 97m의 골리앗 크레인이 설치 된 곳이라 하여, 한 번 구경을 하고자 했었는데.....


자그만치 8년 동안에 걸쳐 이어져 온 대 役事로써 모습을 드러낸 대우 조선, 옥포조선소는 단위 조선소로서는 세계 정상급이라 한다.

서울운동장 축구장의 7.5배쯤인 길이 539m, 너비 131m, 깊이 14.5m의 드라이 도크를 비롯하여

그보다 규모가 작은 제2도크와 해상도크가 있다한다.


더구나 거제도는 三國史記에 따르면 “변한”에 딸린 부족국가 12개에 들던 “독로국”이 세워져 있었다 한다.


거제도는 유배지가 되기에 아주 적합한 땅으로, 외떨어지고 험한 섬이었기에 실제 은둔과 유배의 땅이었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고도 한다.


역사적 기록에 나타난 거제도에 유배당한 첫 인물은 고려 18대 임금인 의종이다.  “高麗史”에 따르면 그는 1,170년에 무신 정중부가 일으킨 난으로 인하여 임금의 자리에서 쫓겨나 이 섬으로 유배 당했다.

그 후 여러 조정의 신하들과 고려를 뒤이은 조선 왕조 때에도 유배지로서의 구실을 톡톡히 한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대표적인 이가 최숙생과 송시열 등이다.


다음 번 여행 때에는 좀 더 역사적, 지리적 배경에 관한 사전지식을 충분히 갖춘 뒤에 자세히 관광을 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거제의 특산물인 유자, 행종죽순, 알로에 등과 팔색조 그리고 졸복국이 맛으로 유명하다 하는데 모두 다 놓치고, 거제 대교를 건너 마산, 진해를 거쳐 부산으로 향했다.


이미 점심시간이 지나, 딸이 배가 고프다 하여 해산물로 된 음식을 먹었으면 했는데, 어디가 맛있게 하는 데인지, 주차하기가 어디가 쉬운지 모르니, 우선 주차하기 쉬운 대형 마트의 식당에서 밥을 먹기로 하고 보니, 바로 앞에 대형마트가 있어 그리로 들어가 간단히 해물 요리로 식사를 했다.


조금 있으면 “진해군항제”가 열리고 벚꽃이 만발할 것이다.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매화, 동백, 산수유, 벚꽃 등을 주제로 남해안과 남해 내륙지역을 돌아보았으면 한다.


이러구러, 김해를 거쳐 부산으로 들어서 숙소인 해운대의 한화콘도로 갈까 하다가, 아내와 딸이 태종대를 보고가자고 하여 태종대를 우선 들렸다가 자갈치 시장에 들려 맛있는 꼼장어 구이를 먹고 가자고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4년 전 두 아이들의 대학 졸업 전, 아들과 딸을 데리고 부산엘 온 적이 있어, 그때에 갔던 길을 기억으로 더듬어 보았으나, 잘 생각이 나지 않아 무조건 부산진역 방향으로 길을 들었다가 교차로 갈림길에서 깜빡하는 순간에 길을 잘못 들어 한참을 돌다가, 간신히 제 길을 찾아 舊 영도다리를 건너 태종대로 향했다.


평일이어서 관광객은 별로 없이 한가했다.  가족이 관광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여건이었다.

천천히 차를 몰아 이곳저곳 바다가 보이는 호젓한 곳이면 내려서 사진을 찍고, 그러길 몇 차례 하면서 태종대의 구경을 마쳤다.

그날은 날씨가 비교적 개인 날이어서 먼 바다가 뿌옇게 보이지는 않았다.

바다의 물결도 비교적 잔잔하여 바다를 바라보는 가슴이 탁 틔어서 흡족했다.

이제 자갈치 시장을 가야 하는데, 마땅히 주차를 어디에 해야 할 지도 잘 모르겠고, 우선은 그쪽 방향으로 차를 돌려, 영도 新 대교를 건너서니 얼마 안가서 바로 자갈치 시장이어서, 들렸다 가려 하니, 아내와 딸이 피곤하다고 그냥 숙소로 가잔다.


아까 태종대를 갈 적에는 舊 영도다리를 건너 왔고, 지금은 新 영도다리를 건너서 가고 있었다.

이 “영도다리”하면 부산 피난시절에 유행했던 현인의 노래가 생각이 난다.


“영도다~아리 난간 위이~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


6.25 당시 우리 가족은 부산으로 피난을 가지 않고 청주로 피난을 갔었지만, 부산에는 이북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이 많았던 곳으로 알고 있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얼마나 잘 살고 있는 우리 인가?  우리를 침공 했던 북한 빨갱이 놈들은 지금 저 지경으로,  위의 놈들은 배가 터져 죽을 지경이고, 불쌍한 백성들은 굶어 죽을 지경인데, 이 나라 정치하는 좌경세력들은 그 놈들에게 돈을 갖다 바치지 못해 안달을 하고, 김정일이를 만나려고 환장을 하고, 그 놈을 가까이 모시지 못해 지랄발광들을 하고 있으니, 이 나라가 어찌 되려는지 참 걱정된다.


이렇게 反共으로 단결하여 입지하고 경제적으로 성공한 나라인데, 좌경 붉은 새끼들은 저희 놈들 “보릿고개” 말의 의미도 모르게, 잘 처먹고 잘 걸치고, 잘 살게 해주었더니, 공산당 빨갱이 놈들과 싸웠던 반공투사들과 군인들은  수구꼴통이라고 하고 좌경 빨갱이 새끼들은 애국투사니 열사라고 하니, 이렇게 후레 쌍놈들이 활개 치는 나라는 아마 이 나라밖에 없을 것이다.

惡貨는 良貨를 구축하고 길 닦아 놓으니 똥개새끼 지나간다더니........

이 나라를 세우는데 불철주야 몸과 마음을 아끼지 않았던 옛 동지들은 일치단결하고 총력 합심하여 이 나라를 바로 잡아야 할텐데.......

어쨋거나, 저녁 퇴근시간이 다 되어 이쪽 영도에서 저쪽 끝 해운대까지 가려니 차가 많이 밀려 시간이 제법 많이 걸렸다.


부산의 도로를 운전하면 정신이 없다.

낯선 곳이라 그렇기도 했고, 도로 사정이 전에 보다 많이 좋아지기도 했지만, 비교적 길이 좁고 여러 갈래로 갈라져 교통량이 분산되지 않고 긴 외길에 가까워서 그런 것 같다.


어찌어찌 겨우 해운대 신시가지구인 올림픽 요트장  신도시 지역으로 들어서니, 저 앞에 높이 솟은 한화콘도라 표시한  건물 불빛이 보인다.


이곳도 서울 강남의 초고층 아파트를 흉내 내는지, 모두가 초고층 건물이다.

저 멀리 동백섬의 조선호텔 건물과 해운대 달맞이 길의 불빛이 보인다.


콘도 지하 주차장에 차를 대놓고 방을 정하고, 해운대나 수영 쪽으로 가서 회를 먹을까? 하니, 그냥 아래 수퍼에서 고기나 사다 먹자고 해서, 내려가 보니, 생선도 고기도 파는 것이 없다.


그래서 다시 차를 가지고 근처의 대형마트가 있나? 보니 까르푸 매장이 있어, 거기에서 고기와 술과 음료수 그리고 반찬거리를 사 가지고 직접 콘도에서 저녁을 해 먹었다.


그런데, 거기서 파는 돼지고기 삼겹살이 맛이 아주 좋았다.

서울에서 사는 삼겹살은 좀 느끼하고, 홍천의 삼겹살은 조금 억세지만 맛은 있고, 그런데 이곳 해운대의 삼겹살은 약간 부드러우면서 느끼하지 않고 맛이 있었다.


부부의 생각은 역시 같은 가 보다.

고기를 먹으며 아들 생각을 했다.  식사를 하면서 아내와 동시에 말이 나왔다.

“아들도 같이 먹었으면 좋았을 텐데......"

완벽한 하모니의 듀엣으로 말이다.  딸이 웃으며 제안을 한다.


“내일 출발 할 때, 다시 들려서 고기를 넉넉히 사가지고 가면 되지 않느냐”고.....,

“그러마”, 하며 이 사람은 설거지를 하고, 아내와 딸은 피곤할 터이니 쉬라고 했다.


17층에 방을 정하였기에, 높은 곳에서 밤바다와 야경을 보니 휘황한 불빛이 아름답다.


술을 마시지 않았으면 달맞이 고개를 올라가 달빛도 보며, 밤바다의 고깃배의 불빛도 아련히 보기 좋을 텐데, 그만 방 안에서 창밖의 풍경으로 만족해야 했다.


아빠가 설거지 하는 김에 커피를 끓여서 함께 한 잔씩 마셨다.

아직은 아들이 집에 들어올 시간이 아니어서, 객실 안에서 야경도 바라보며, 딸아이는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엄마, 아빠에게 이렇게 저렇게 포즈를 취하라 한다.


12 시가 지나 밤 1시가 다 된 시간에 아들에게 전화를 하니 전화를 받는다.

“내일 올라가니 불편하고 귀찮아도 밥 잘 챙겨 먹으라”며 엄마가 당부를 한다.


그리곤 침대에 누웠는데, 눈을 뜨니 아침이다.

아빠가 코를 많이 골며 잠을 자니, 나는 다른 방에서 자고, 아내와 딸은 전망이 좋은 큰방에서 잠을 잤다.


해운대 달맞이 고개를 거쳐 서울로 올라오는 여정은 다음에 다시 잇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