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니골 통신-인생2막 이야기/소니골 통신-귀산촌 일기歸山村 日記

동락재 통신-57: 수타사의 공작산 등산로에서

sosoart 2007. 4. 3. 21:57

 

수타사의 계곡엔 잘 생긴 소나무들이 많이 있다.  물가의 나무잎들도 이제는 파릇 파릇 파르스름히 녹

색의 아름다움을 내 비친다.  이 계곡엔 유난히 작은 沼들이 많다

 

 

물가의 키작은  갈대 숲의 누런 색이 완전히 없어져야 이곳의 완연한 봄이 시작되며, 곧바로 여름으로

이어진다.  더구나 요즘들어 이곳의 기후는 이렇게 봄이 왔나? 싶으면 곧 여름으로 떨어진다. 

 

냇가의 습진 곳에 이름모를  순박한 꽃이, 산골 처녀의 맑은 미소처럼 예쁘다.

 

여름엔 이 계곡이 물놀이 하는 사람들로 붐빈다.  아직 이곳 수타사 계곡은 자연보호를 위한 통제가 없

다. 그럴수록 깨끗하게 사용하고, 훼손시키지 말아야 할텐데.....

 

대웅전의 처마 밑에 조각된 용머리.  우리 조상들은 집을 지어도 이렇게 멋과 풍류를 아는 삶에 미를 들

여와 더불어 즐길줄 아는 그런 미를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프랑스인들의 자존심보다

더 큰 자부를 우리는 느낄 수 있다고 믿는다.

사찰의 건축물, 궁중건축, 또한 사대부와 일반 상민들의 한옥 건축에서도 편액, 주련 등 건축물의 미와

더불어 글씨 또한 건축에 도입시켜, 종합적인 예술로 승화시키지 않았던가? 

 

사찰 법당으로 올라가는 양쪽 난간에 세운 연꽃 모양의 돌기둥 또한 새로 만든 것이긴 하지만, 옛부터

이러한 사소한 것에 까지 아름다운 미술품(돌조각)을 도입하여 한껏, 요란하지 않으면서도 풍요한 미

를 즐길 줄 아는 그런 아름다움을 아는 민족이었다. 

 

무엇이 사람들로 하여금 이렇게 원하는 바를 많게 만드는 것인가?

저 돌맹이 하나 하나에 많은 사람들의 소원이 압축되어 서로를 받치며 서있다.  진안 마이탑사의 이갑용

처사의 돌탑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 염원들은 그에 못지 않으리....

 

<동락재 통신-57: 수타사의 공작산 등산로에서>    2006. 4. 15(토)


오늘은 숲 해설가로서의 임무가 아닌 산림보호 및 산불방지 계도의 임무를 받

고, 공작산의 등산로에서 계도 봉사를 하였다.


공작산의 등산로는 크게 3-4가지의 경로가 있다.

동면의 수타사 경내를 경유,  시내(川)와 같은 넓은 계곡의 물길을 따라 오르는

길, 그리고 노천리의 노천저수지를 지나 계곡물을 따라 오르다, 個人이 운영하

는 山莊을 지나 오르는 길(이 코스는 자동차가 個人 山莊까지 오를 수 있어, 정

상까지는 3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다)

또, 공작산 뒤편 화촌면에서 오르는 코스, 그리고 동면의 냇가를 따라 계곡을

지나 산을 오르는 코스 등....

하긴 화촌면에서 오르는 코스도 몇 가지가 더 있을 터이다.


나의 봉사지역은 수타사 경내를 지나는 등산로에서 등산객이나 상춘객의 산불

조심에 관한 경각심이나 주의를 환기시키는 임무라고 생각하면 되는데, 혹 등

산 코스라든지, 산림청이라 표시된 명찰이나 쓴 모자를 보고는, 나무나 산림에

관한 질문을 하는 이도 있는데,  아는 지식의 범위에서 알려주면 되는 일이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요즈음은 강원도 홍천군의 휴양림이나 산, 그리고 산림의 林木 종류

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도감이라든지, 지리서라든지를 탐독하며, 나무의 식생이

나 종류에 관한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다.

늦은 나이에 암기를 할 수는 없고, 이해 위주로 책을 읽고는 있지만, 일반인들

의 질문에 막히지 않고, 쉽고 이해가 빠르도록 설명을 하기 위해서는 암기를 많

이 하여야 하지만, 이제는 머리가 자갈돌보다 더 굳어가니 어찌 방법이 없는 것

도 같다.


그러나, 또 새로운 분야의 도서나 자료를 접하고, 인터넷에서도 많은 정보를 찾

다보니, 나의 지식세계를 넓히는 데도 적지 아니 도움이 된다.


단지, 제일 어려운 것은  나무의 종류를 사진으로 보고 이름을 암기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로 나무를 많이 보고, 어린 시절을 자랐다면 덜 하겠으나, 나무의 종류를

기껏 알고 있다고 해야, 흔히 우리가 먹는 몇 가지 果實 樹種과 소나무 정도, 그

리고 동락재 안에 심어놓은 몇 가지 종류뿐이라고 하겠으니 이 또한 매우 어려

운 일이다.


그러나, 자꾸 사진과 실제 나무를 비교하며 관심을 가지다 보면, 많이 알게 될

것이 아니겠는가?


이바구를 잘 굴려, 탐방객에게 짧은 지식을 전달하기 보다는, 내 자신이 공부삼

아 나무에 관한 깊은 지식을 쌓고, 또 나의 안내와 설명을 듣는 사람들로 하여

금 더욱 더 나무에 관심을 가지고, 나무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유도를 하면 그것

이 바로 이 봉사의 목적이 아닌가도 생각을 해본다.


그러나, 오늘 같은 날은 등산객이 별로 없어서, 등산로를 산책하는 기분으로 나

무를 살펴보며, 사진도 찍고, 비록 봄이 늦게 오는 지역이긴 하지만, 완연한 봄

의 물소리를 들으며 맑은 공기를 흠뻑 쐰 좋은 하루였다.

이제야 겨우 진달래가 핀 곳이기도 하지만......


수타사 절에 들려서 다시금 단청과 나무로 조각된 건축물의 세심한 부분을 관

찰하며, 사진에 담기도 하였다.


계곡을 내려오면서, 홍천 남면의 군부대에 근무하는 아들의 면회를 온 부부를

만났는데, 수타사 앞을 흐르는 넓은 계곡 물의 깊은 沼를 바라보며 “여기에서

수영을 할 수 있는가?” 묻기에 “할 수야 있지만, 수영을 하면 안 되지 않겠느

냐?”는 대답을 했더니, 또 다시, “왜 안 되느냐?”는 이유를 묻기에, “우선은 이

곳의 수심이 깊어 해마다 1-2명씩 수영을 하다가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나며,

수영을 함으로써 수질이 악화가 되지 않겠느냐?”는 대답으로 마루리를 하였다.

 

모르고 묻는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그래서 壽陀寺 이름의 내력에 대해 얘기를 해 주었다.

 

“원래의 “수”자는 물 水 자를 썼었는데, 해마다 계곡의 깊은 沼에서 사람들이 빠

져죽어 목숨 “壽”자로 바꿀 정도로 인명피해가 많은 곳이어서 위험하니, 수영은

삼가야 하지 않겠냐?“ 는 전설과 더불어 수타사에 보관되어 있는 보물을 관람

하고 가는 것이 좋겠다는 권유를 하였다.


관광안내 리프렛에 나와있는 공작산과 수타사의 소개 내용을 잠시 옮겨본다.


공작산은 해발 887m로 산 정상에서 바라보면 홍천군 일대가 한눈에 들어오며,

산세가 공작이 날개를 펼친 모습과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홍천읍에

서 바라보면 거인이 하늘을 향해 누워있는 형상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봄에는 철쭉, 가을에는 단풍이 매우 아름다우며 기암절벽과 분재모양의 노송군

락, 눈 덮인 겨울산도 일품이다.

 

수타사에서 동면 노천리까지 약12km에 이르는 수타사 계곡에는 넓은 암반과

큼직큼직한 소(沼)들이 비경을 이루고 있고,  계곡 양쪽으로는 기암절벽과 빽빽

히 우거진 숲이 호위하고 있어 이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다보면 비경삼매에

빠져들기 일쑤이다.


또한 한국 100대 명산 공작산 끝자락에 자리한 천년 고찰 수타사는  신라 33대

성덕왕 7년(서기 708년)원효대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며 대적광전 팔

작지붕과 1364년 만든 동종, 3층 석탑이 보존되어 있고 보물 제745호 월인석

보를 비롯한 대적광전, 범종, 후불탱화, 홍우당 부도 등 수많은 문화재를 소장

하고 있는 영서내륙 최고 고찰이다.


그리고, 부모님들이 카메라를 가져오지 않았다고 하기에, 아들의 면회를 온 기

록을 남기기 위해 사진을 몇 장 찍어 주겠다고 제의를 하여 사진을 몇 장 찍어

주고, 이메일로 보내주기로 하였다.


아들의 군복무에 면회를 왔다면, 당연히 아들의 군복무 시절의 모습을 남겨두

고 싶은 것이, 아들 본인이나 부모님의 마음이 아니겠나? 싶어서 제안을 했던

것이고, 기왕에 점심식사를 할 요량이면, “양지말”의 “화로 숯불구이”가 유명하

니 그곳에서 아들에게 고기를 많이 먹이는 것도 좋을 것이라는 권유도 함께 하

였다.


기실 아무것도 모르는 지방에서, 군에 복무하는 아들에게 맛있는 것을 많이 먹

이고 싶어도, 그런 것을  모르면 섭섭한 마음이 들 터이니 말이다.

그 덕분에(?) 그들이 가져온 과일과 식혜 한 잔을 대접 받았다.


아들을 군에 보낸 부모들의 마음은 얼마나 애틋하겠나?


나 역시 아들이 군기가 세다는,  양평의 포 부대에서 근무를 하여 자주 면회를

간 적이 있었고,  콘도 등이 예약이 안 되었을 때는 잠자리를 찾기가 너무 불편

한 적도 있었다.


아들이 제대를 할 때까지, 부모의 마음은 항상 가시방석이 아닌가 싶다.

더구나 요즈음에는 불행한 사고들이 너무 빈번히 일어나서, 더 걱정이 될 듯 

싶다.   


조금 전에 그 부모의 이메일로 사진을 보내 드렸다.


山林 봉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뒷산엘 잠시 올라갔다가 왔다.


지난주에 본 두릅나무들이 얼마나 싹이 나왔는지? 언제쯤 따면 될까를 가늠하

기 위해 올랐다가, 별안간 어디서 기척이 나기에 보니, 고라니가 우리 복순이

보다는 조금 큰튼 녀석이었는데,  산비탈을 타고 올라 도망을 간다.


이곳 뒷산에서 고라니를 보기는 처음이다.

산토끼나 꿩은 매일 보다시피 했지만, 고라니는 6년을 살았지만 오늘, 처음 실

물을 보았다.


두릅은 적어도 일주일은 지나야 수확이 가능 할 것 같다.

그런데, 이 두릅이란 것이 내가 따 갈 때를 기다려주는 것이 아니고, 나물 캐러

온 사람들이 먼저 보면, 그 사람들이 임자이기에, 봄철의 두릅 쟁탈전은 보이지

않는 치열한(?) 전쟁이다.


그러니까 수확할 정도로 다 크기도 전에, 때를 놓치면 남의 것이 되니, 어린 두

릅의 순이라 할지라도 모두 다 따간다고들 한다.


작년에는 두릅이 별로 많지 않고, 이미 벌써 다 따간 것 같아서, “내가 너무 늦

게 따려고 했나?” 생각을 했었는데, 마을 사람들 이야기가, 사람들이 남이 따갈

까봐 어린 순이라 해도 다 자라기 전에 따가지고 가니, 그렇게 해서 두릅을 보

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도 작년에는 두릅나무를 10여 그루 캐 와서 집의 울타리에 심기는

했는데 올해의 수확이 어떨지는 모르겠다.

추운 겨울을 이기지 못하고 죽은 나무도 몇 개가 되지만, 이 두릅도 심어 놓으

면 잘 번진다 하니, 기대를 해볼밖에.


아, 그리고 어제는 오후 늦게, 공방의 벽화 작업을 끝냈다.

서울에서 집으로 내려 오면서, 우리 동락재 앞의 저수지 오르막 길을 올라서자

마자, 또 금방 내리막길인데,   내리막을 내려오면서 보이는 벽화의 배경 색깔

이 눈에 잘 띄지도 않고, 색의 조화가 좀 어울리지를 않아서 다른 색으로 다시

덧칠을 했다.


오늘 나갔다 들어오면서 보니, 그런대로 봐줄 만은 한 것 같다.

기실, 이 벽화는 몇 년 전부터 계획을 했던 것인데, 어느 디자인으로, 어떤 채색

으로 할 것인가? 즉, 유성 페인트냐, 아니면 수성 페인트냐? 결정을 하지 못했

는데,

울타리의 솟대가 비에 젖어 썩기에, 썩은 솟대는 다 버리고, 모두 다시 솟대를

제작하고 유성페인트로 칠을 하니, 작품의 색감은 떨어지지만 내구성에 있어서

월등하므로, 솟대 등 바깥의 나무 조형물의 채색을 하고 남은 페인트로 벽화제

작을 하기로 결정을 하고, 며칠 전 서울에 올라가기 직전에 뚝딱 번개처럼 그리

고 채색을 마쳤지만, 급하게 하다 보니 채색이 마음에 들지 않아, 어저께 다시

칠해 일단 완성을 하고, 다시는 손을 대지 않기로 했다.


이제는 예전에 그렸던 유화 몇 점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는데, 그것들

의 액자를 분해하여 그림에 다시 修正과 彩色을 할 계획이다.


 

손을 대기 시작하면 한, 두 개가 아니어서 아예 외면을 하고 있지만, 마음에 들

지 않는 작품을 매일 보고 있다는 것 또한 고문과 같아서, 꽃이 피기 전에 다시

수정, 완료할 예정이다.


오늘은 또 솟대를 모두 다시 만든 이후, 제일 마음에 들었던 솟대를 세운 쇠기

둥이 조금 키가 얕아서, 여름에 옆의 단풍나무가 우거지면 가려지기에,  잘 보

이게 하기 위해 쇠기둥의 파이프에 약 2자 가량의 나무를 박고 그 위에 솟대를

올려놓는 작업을 완료했다.


조금은 더 잘 보여, 안한 것 보다는 낫다.


강원도 고성사람 이성선 시인의 “별을 보며”를 오랜만에 다시 읽어 보았다.

강원도 사람의 시는 역시 강원도의 공기처럼 맑고, 물맛이 좋다.

나만의 생각인가?


내 너무 별을 쳐다보아

별들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내 너무 하늘을 쳐다보아

하늘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별아, 어찌하랴.

이 세상 무엇을 쳐다보리.


흔들리며 흔들리며 걸어가던 거리

엉망으로 술에 취해 쓰러지던 골목에서


바라보면 너 눈물 같은 빛남

가슴 어지러움 황홀히 헹구어 비치는


이 찬란함마저 가질 수 없다면

나는 무엇으로 가난하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