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니골 통신-인생2막 이야기/소니골 통신-귀산촌 일기歸山村 日記

동락재 통신-81:남도기행 1

sosoart 2007. 4. 7. 15:43

 삼봉약수 입구 명개리의 냇가의 숲

 

 명개리 냇가 옆의 자작나무 숲. 이 자작나무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에게 많이 사랑을 받는 나무이기도

하다.

 

 

삼봉휴양림 입구계곡의 풍경

 

삼봉휴양림 내의 삼봉약수.  탄산약수로서 약간의 철분이 함유되어 있으나 사이다처럼 시원하다.

 

 

<동락재 통신- 81: 남도기행 1- 홍천에서 여수 돌산도까지>   2006. 11.10(금)


지난 달 10월 10일,  생활 속의 노곤함과 이런 저런 잡념을 떨치고자 아들과 함께 남도로 여행을 다녀왔지만, 차일피일 미루다 아직까지 다녀온 여행일지를 적지 못하고 어언 한 달이 더 지나갔습니다.

산다는 것이 이리도 고단하고, 아무런 가치도 없는 일을 계속해야만 할 때도 있다는 것은 우리네 인간에게 주어진 죄업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우리네 가엾은 중생들의 곤궁의 삶은 죽는 날 자연스레 끝나겠지만, 죽기 전까지 그런 고해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지 않고 살아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행복한 삶이 될 것인가? 라는 바보 같은 생각을 해봅니다.


지금과 같은 인생 후반기에 고난의 시간을 겪는다 해도, 퇴직 후부터 최근 수 년 동안 온갖 풍파에 살 얼음장 걷듯이 살아왔던 慣性에 의해 어느 정도 견디기도 하고,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려니...하는 막연하지만 허황스러운  기대를 해보기도 하지만,

아직 30은 미처 되지 않은 한참의 젊은 나이의  아들에게만은 인생에 고난의 시간이 없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과는 달리, 현재 고난과 고해의 한 가운데서 힘들어하는 아들을 바라보며, 시리고 아픈 가슴을 아들과 더불어 잠시 고통의 시간을 떠나, 마냥 멍한 無念의 마음으로 여행을 하기로 작정을 하였습니다. 


남도 기행-첫째 날 (06. 10.10)


여행의 출발지를 서울로 정하여  아들과 나는 남쪽으로 여행을 떠나고, 아내는  혼자서 홍천의 동락재를 지키기 위해  혼자서 내려 간다면 그 또한 마음에 걸리는 일인지라, 홍천에서 출발하는 것이 차도 밀리지 않고 여유로운 여행길이 될 듯하여, 서울엔 딸아이만 혼자 남겨 두기로 하고, 9일 날 밤에 아내와 아들과 함께 서울에서 홍천의 동락재로 돌아왔다.

 

시간의 여유가 생기면 낚시도 겸하여 갈까 하다가, 낚시 짐을 꾸려 가면 여행도 낚시도 아무것 하나 제대로  못할 것 같아서, 낚시 도구는 일체 가져가지 않고, 혹시나 하여 비상식과 간단히 기본적 취사도구와 식수만을 챙겨 떠나기로 했다.


10일 아침에 일어나 식사를 하고, 아들과 함께 10시경 출발을 했다.

물론 운전대는 아들이 잡고, 원주를 거쳐 중앙고속도로로 충주나 제천쯤에서 충청도로 빠져나갈 계획이었다.


아들이 운전을 하는 사이 잠시 눈을 부쳤는데, 원주에서 고속도로로 들어설 예정이었지만, 아들이 그만 지나쳐버려 눈을 떠보니 차는 이미 진부 가는 길로 들어서 있어서, 다시 유턴을 하여 원주 시내로 들어서서, 중앙고속도로로 진입을 하였다.

 

대구까지 고속도로로 갈까 했는데, 아들이 고속도로는 재미가 없다고 국도로 가자고 하여, 충주에서 국도로 갈아타고 청주 방면으로 들어섰다.


어느덧 점심때가 되어, 지나다가 적당한 곳에서 간단히 점심을 먹기로 하였는데, “옛날 짜장”이란 간판이 보이기에 오랜만에 아들과 짜장면 한 그릇을 먹고 싶어 그 식당 앞으로 차를 세우게 했다.

그런데, 낯이 익은 식당 같아서 안으로 들어가 보니 작년 이맘때 쯤 인가? 아내와 “청주 국제공예비엔날레”를 관람하기 위하여 청주를 가다가 우연히도 들렸던 집이 이 집이었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머릿속에 잠재된 어떤 관성적 의식이 이 집을 다시 오게 했던 게 아니었나? 하는 생각에 웃음이 났다.


“옛날 짜장”하면 내 머릿속에 항상 떠오르는 것이 있다.


옛날 6.25 사변 때에 서울에서 外家인 청주로 피난을 갔고, 거기서 국민학교 3학년 1학기까지 몇 년간을 살았던 적이 있었는데, 국민학교 2학년쯤인가?

그 시절엔 청주 중앙공원 담 옆으로 아주머니들이 함석 다라이를 깔아놓고, 짜장면이며 국수를 말아 팔곤 했는데, 그때에 또래의 동무들 몇 이서 그 짜장면을 사먹은 적이 있었다.

퉁퉁 불은 국수에 짜장 이라곤 감자와 채소로 만들었고 고기는 아마 한 쪼가리도 없었을 터인데, 그것이 그렇게 맛이 있을 수가 없었다.


그때 돈 몇 환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용돈이 생기면 또 와서 사먹겠다고 벼르고 있었는데, 결국은 더 사먹지 못하고 내가 태어난 서울로 다시 돌아와 신당동 근처의 광희국민학교라는 곳으로 3학년 2학기에 전학을 왔었다.

 

지금도 그때의 그 맛은 잊을 수가 없어서, 서울은 물론 전국의 어디를 가든 “옛날 짜장”이나 “손짜장”이라는 간판만 붙어 있는 짜장면 집이 있으면 습관처럼 들어가 보곤 한다.


작년에도 아내와 같이 가다가, 그런 간판을 보고 들렸었는데, 올 해에는 아들과 마주앉아 짜장면 한 그릇을 먹었다.

 

역시 옆에 아내와 딸이 빠져 있으니 섭섭하긴 하다.


식사를 마치고 청주로 가는 국도를 따라 가다가, 교통이 혼잡하여 이렇게 가다가는 오늘 밤 안으로 남도에 도착하기가 어려울 것 같아서, 청주에서 경부 고속도로를 타고 대전을 거쳐 호남고속도로로 갈아타고 순천이나 여수에서 1박을 하자고 아들에게 얘기를 했다.


아들은 늦어도 좋으니, 국도나 지방도로 가자고 한다.

누가 내 아들 아니랄까봐, 고집은 제 아비 뺨을 친다.


이번 여행에서는 아들과 이런 저런 진지한 이야기들을 하고 싶어서, 아들이 하자는 대로 그냥 따르기로 하였다.


청주를 지나 고속도로로 신탄진까지 가서 국도로 가기로 했다.

신탄진에서 외곽으로 난 길로 가면 지난 날 내가 다니던 연구소 앞을 지나게 된다.

 

그 당시에는 연구소가 아주 외진 곳에 자리하고 있었고, 민가도 별로 없는 연구소의 정문 진입로 주변에 닭죽을 하는 여염집이 두 집이 있었는데, 점심시간에 자주 다니며 맛없는 구내식당 밥의 아쉬움을 달개기도 했던 곳이기도 하다.

 

그 때에는 가족들이 모두 이사를 가지 않아서, 약 7개월간 연구소의 독신료(기숙사)에서 지내고 있었고, 그러다보니 먹는 것이 시원찮아서 가끔은 저녁에 근처 숫골이라는 동리에서 냉면이나 보신탕으로 영양보충(?)을 하기도 하고,  유성이나 대전 시내에 나가 돌판에 구운 삼겹살을 먹고 들어오는 일이 많았다.


동료들 여럿이서 나갔다가 들어오면 택시비가 아깝지 않지만, 혼자서 나가면 들어 올 때의 택시비가 아까워서 매일 나가지는 못했던 시절이었다.

시내버스는 하루에 몇 차례 다니지 않기에, 시간을 맞추기가 어려워 매번 택시를 이용해야 했었다.

 

바로 그 연구소 앞길에서 호남고속도로로 들어서는 진입로가 생겨서 그 길로 들어가 전주로 향했다.


멀리서 지난 날 다녔던 연구소의 건물을 보니, 옛 추억이 하나, 둘 머릿속에서 떠오르기도 한다.


지금 이 나이에도 다니는 옛 동료들이 있는데, 나는 그 좋은 직장을 박차고 나와서 아웃사이더로 먼발치에서 옛날을 추억하며 지나치는 이 아이러니가 참으로 씨니컬하였다.


논산을 지나치며 보니 낚시를 몇 번 갔던 논산저수지가 눈앞을 스친다.

물 한 가운데 놓여진 좌대를 타야 붕어가 잘 잡혔는데, 몇 몇 낚시 벗들과 낚시를 하며 이야기도 나누고, 삼겹살에 소주도 한 잔 기울이며 정을 나누기도 했었는데.....


지나간 추억들은 아름답고 아쉽기만 하다.


전주에서 시내에 들려서 아들에게 “전주 비빔밥”을 맛보게 해주고 싶었는데, 이제는 어디가 어디인 줄도 잘 모르겠고, 차들이 많이 밀리는 곳에서 마땅히 누구에게 물어볼 사람도 없으니, 다음 기회로 미루고 남원에 가서 추어탕이나 먹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남원으로 향했다.


남원하면 생각나는 일이 있다.

한 십년 전 아내와 결혼기념일을 즈음하여,  그야말로 아내와 단 둘이 지리산 콘도를 예약하고 지리산으로 향한 적이 있었다.

 

그때에도 남원 광한루를 지나 지리산으로 향했는데, 지리산으로 오르는 길목 길가에 잠시 차를 세우고, 자판기에서 커피를 한 잔 뽑아 마시며 주변의 모습을 살피며 구경을 하고 있는데, 어느 40대 남정네가 “지리산은 산길이 험해서 위험하니 오늘 밤은 여기서 주무시고 내일 떠나십시오!” 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내심 “아니 지리산의 차로가 얼마나 험하다고 이 사람이 겁을 주나? 혹시 이번 늦게 내린 폭우에 길이 끊어지기라도 한 걸까.......? 그래서 승용차는 위험하니 가지 말라는 것일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아니, 그렇게 길이 험해요?” 하니

“예! 길이 커브가 심하고 꼬불꼬불해서 위험 합니다” 한다.

“뭐 길이 끊기거나, 산사태로 막힌 것은 아니지요?” 하니, “예, 그런 것은 아니지만 위험하니 하루 묵었다가 날이 훤하면 가십시오” 한다.


그래서 “걱정해 줘서 고맙긴 한데, 여하튼 올라가 보고 위험하면 다시 오리다” 하고 핸들을 잡았다.


시간이라 해야 해가 질 무렵이었기에, 그리 어두운 시간도 아니고, 또 어두워 봤자 내가 초보시절 처음 운전대를 잡을 때에도 강원도의 험한 운두령, 구룡령을 넘은 사람인데, “민박 손님을 잡는 방법도 참 여러 가지로구나”라고  생각을 하며, 소위 “잔머리를 굴린다고 생각을 하니 씁쓸한 미소가 지어진다.                      

 

지리산의 차로는 강원도의 산이나 고개 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란 것을 그 민박을 하는 남정네는 모르는지? 아니면 알면서도 그러는지.......?


어쨋던 그날, 우리 내외는 천천히 지리산의 맑은 공기의 내음을 맡으며 여행의 즐거움을 만끼하면서 화엄사를 지나 그 근처 콘도에 여장을 풀었다.


오늘은 아들과 같은 곳을 지나면서 옛날 그 생각을 하니, 그 때만 해도 그 민박집을  운영하던 친구가 그래도 어리석게도 순진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을 했다.


매표소에서 입장료를 지불하고 다시금 위로 올랐다.

설악산의 한계령이나 미시령 같은 곳에서는 입장료나 통행료를 받지 않는데, 같은 국립공원이라 해도 왜 이리 일관성 없이 행정을 하는 것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등산을 할 때에 사찰을 관람하지도 않는데, 국립공원 입장료에 사찰 관람료를 얹어 받는 이치나 똑같은 이런 일들이 왜 거침없이 자행되고 있는지?

알다가도 모르다.  하긴, 이런 일들이 한 두 개이겠는가? 


마치 북괴의 핵실험 직후에도 북한을 방문하고 온 좌익국회의원이란 자들은 왜 북한으로 넘어가지 않고 여기에서 단물만 빨아먹고 사는지, 잘 모르겠는 것처럼 말이다.


어쨌던, 성삼재 휴게소에 다다르니, 밤은 어두워지고 저 아래로 보이는 불빛들이 가물가물 그런대로 야경을 바라보는 가을의 밤공기는  서늘해 추울 지경이었다.

아들은 아들대로, 나는 나대로 야경을 찍긴 하였지만 불빛이 너무 희미하여 카메라에 잘 잡히지가 않았다.


잠시 고갯마루에 머물며 산 속에서 밤공기를 쐬며, 구례에서 저녁을 먹고 하룻밤을 보낼까 하려다, 아들이 더 가보자고 하여 순천에서 푸짐한 저녁상을 받아보는 것도 좋을 듯 싶기도 하고, 아니면 여수까지 가서 저녁을 먹을까? 궁리를 하며 남으로 향했다.


그런데 시간은 어느덧 밤 9시를 넘어섰고, 경험상 지방의 경우  번화한 시내가 아니고는 밤늦은 시간에는 저녁을 먹기가 어렵기에 서둘러 순천을 지나며 적당한 곳을 찾았으나, 초행길과 다름없는 이곳의 사정을 잘 몰라 내처 여수로 향했다.


몇 해 전, 쓴  남도기행을 보고  현지에 사는 카페의 어느 가족이 여수의  돌산도에 맛있는 음식점이 있다고 알려주었는데 기억도 잘 나지 않고, 시간을 보니 밤 10시가 다 된 시간이어서, 맛있는 저녁은 커녕,  잘못하면 밥을 굶을까 염려되어  서둘러 돌산도의 한 모텔에 숙소를 정하고, 그 근처의 음식점으로 가니 음식점들이 문을 닫고 있었고, 겨우 발견한 곳이 치킨점이어서 그곳에서 닭과 생맥주로 저녁을 대신하였다.


모처럼 아들과 함께 여행을 하면서 그 지방의 별난 음식들을 먹이고자 하였는데, 첫 날부터 이렇게 빗나갈 줄이야......


맥주를 한 잔 하면서 아들과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물론, 아들은 주로 듣는 편이었고, 아비인 내가 말을 많이 하게 된다.

이번에는 작정을 하고, 아들의 얘기만 듣고자 했지만, 아들도 아직은 제 하고 있는 일에 확신이 없어서인지 제 의견을 잘 말하지 않는다.

 

앞으로 며칠의 시간을 함께 할 것이니까, 서두르지 않고 서서히 본인의 마음을 풀어놓게 하려한다.

또 말이 없더라도, 느낌이라도 알 수 있다면 이번 여행의 성과는 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각자 샤워를 하고, 아들은 운전으로 피곤해서인지 잠으로 빠져들었지만, 나는 이런 저런 생각에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다 아침을 맞았다.


박목월의 이 詩처럼 “들찔레처럼....” 살고자 하지만,  그렇게 사는 것 역시 세상은  옭매인 끈을 쉽사리 놓아주지 않으니........


<산이 날 에워싸고>


산이 날 에워싸고

씨나 뿌리며 살아라 한다

밭이나 갈며 살아라 한다


어느 짧은 산자락에 집을 모아

아들 낳고 딸 낳고

흙담 안팎에 호박 심고

들찔레처럼 살아라 한다

쑥대밭처럼 살아라 한다


산이 날 에워싸고

그믐달처럼 사위어지는 목숨

그믐달처럼 살아라 한다

그믐달처럼 살아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