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니골 통신-인생2막 이야기/소니골 통신-귀산촌 일기歸山村 日記

동락재 통신-83: 남도기행 3

sosoart 2007. 4. 7. 15:53

목포에서 무안가는 길 옆에 있는 식당. 값도 싸고 반찬이 20여가지 나오며 맛도 아주 좋았다. 

 

아쉽게도 처음 상이 나올때 사진을 찍어두지 못해 남이 먹고난 상을 찍어 보았다. 

 

함평으로 들어서니 앞에 보이는 야산에 나비의 형상으로 가꾸어 놓았다.

 

 

고창의 도솔산 선운사 입구

  

절의 경내가 조용하다 

 

목어의 채색이 전통 단청의 분위기가 나지 않는 듯하다. 

 

모든 건물이나 목어,운판 등이 새로 만들어진 것들로 보이며 고색창연한 맛은 느낄 수가 없다.

 

 

선운사의 역사를 알리는 안내문 

 

변산반도 어느 포구의 앞바다 

 

바람은 잔잔하여 바다바람을 쐬기에는 좋은 날씨였다. 

 

 

춘장대 해수욕장 앞바다의 일몰광경 

 

일몰 직전의 바다는 밀물이 막 들어오는 시간이었다.

 

삼각대를 받쳐 놓은 카메라의 사진을 찍느라, 또는 그냥 찍으며 필름에 일몰의 모습을 담느라 바쁜 아들의 모습 

 

 

해가 지는 바닷가의 바람은 쓸쓸하고 쌀쌀하게 느껴졌다.

 

 

좋은 카메라로 필름사진을 찍으면 좋은 작품이 나올텐데.......

 

 

아무튼 일출과 일몰의 시간은 금방 지나가므로, 사진은 순간순간을 포착하여 많이 찍어야.....

 

 

 

 

해가 아주 넘어가는 것이 아쉬워 계속 셔터를 눌렀다.

 

 

등대의 불빛도 켜지고 

 

백사장의 조그만 게들은 모랫속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동락재 통신-83: 남도기행 3- 고창, 변산, 서천, 춘장대 해수욕장>

 

남도기행-셋째 날  (06. 10. 12. 목)


아침이 되자 숙소가 여객터미널 부근이라서 그런지 시끄럽기도 하고, 일찍이

일정을 시작하여야 하므로, 분주하게 움직이는 거리를 빠져나와 고창으로 향했

다.

아침식사는 가다가 적당한 곳이 있으면 들어가서 간단히 요기를 하기로 하고,

무안을 향해 가다가 보니  백반집 안내판이 보이기에, 도로변에 있는 "옛날백

반" "기사식당"이라고 간판이 붙여진 그 식당 주차장에 차를 대고 들어서니, 아

침시간인데도 불구하고 홀 안은 꽉 차있었고, 밖의 테이블에 한 두 자리가 비어

있어 그곳에 앉아 식사를 시켰다.

 

오천 원짜리 백반이기에 어제 낙안읍성 가는 길에 들렸던 그 백반 집 정도이려

니 했는데, 상이 차려져 나오는 것을 보니 반찬이 어제 그 집보다 더 많고 쇠 불

고기와 게장도 따라 나오는데, 아주 정갈하게 보이며 맛이 있어 보였다.

맛을 보니 의외로 맛도 있고 깨끗해 보여, 아주 맛나게 밥을 먹었다.


반찬이 많이 남아 아깝기도 해서, 여간해서는 자기 定量보다 밥을 더 먹지 않는

아들도 입맛이 당기는지,  밥 한 공기를 더 시켜서 아들과 나누어 먹었다.


오는 손님들을 보니, 자주 오는 사람들도 많은 것 같았고, 한 70된 주인장도 무

어 모자란 것이 없냐면서 친절하게 챙겨 주는 것이 이 집이 잘되는 비결이 아니

겠나? 생각을 했다.


어쨌던 이번 여행에서 두 번째로 값 싸고, 맛있는 남도의 밥상을 받아 보았고,

후한 인심에 흐뭇함을 느꼈다.

게다가 서비스로 내주는 커피 한 잔을 마시니, 식사 후 기분도 개운하여 무안을

향해 달리는 차창 밖의 날씨도 아주 청명하고 상쾌하였다.


무안을 지나 함평으로 들어서니,  멀리 보이는 야트막한 산에 함평의 상징이 되

어버린 나비의 모양을 나무로 아주 크게 꾸며 놓아 멀리서도 볼 수가 있었다.

함평하면 씨름도 떠오르지만, 요즘 들어서 나비를 郡의 상징처럼 내세우고 있

어, 대학시절 나비 채집에도 취미를 가졌던 아들과 나비 전시관 같은 곳도 들려

보고는 싶었으나, 이번 여행은 일정상 심층적인 여행을 할 수가 없어, 다음 기

회로 미루고 고창으로 향했다.


이러구러 고창에 들어서서, 좀 더 고창의 명물이나 관광지를 알고자 군청에 들

려서 관광안내 책자를 받아 들고 선운사로 향했다.


낯 선 고장을 여행 할 때에는, 우선 지방의 시청이나 군청에 들려서 관광안내책

자와 그 지방의 소개책자를 받아 여행의 일정과 계획에 참고를 하면 효율적인

관광과 체험을 할 수가 있어서 참 좋다는 말을 덧붙이고 싶다

.

지자체 실시 이후 각 지자체에서는 각 고장의 홍보와 관광수입 증대를 위하여

안내책자를 구비하고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배포하고 있으니, 적극 할용하면

많은 시간이 절약도 되고, 그 고장에 대해 더 상세하고 알 수 있고 시간을 절약

하는  장점이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안내책자를 일별하여 보니 맨 먼지 고창 고인돌유적에 관해 안내가 되어 있었

다.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것은 선운사와 복분자 정도 인데, 고인돌유적이 있다는

것은 생소한 것이었다.


“고창 고인돌 유적은 동서로 약 2.5Km 범위에 447기의 고인돌이 집중 분포되

어 있고, 군내 전역 85개소에 2천여기 이상의 고인돌이 분포하는 것으로 추정

되어 세계최대의 고인돌 조밀지로 평가받고 있다.

고인돌은 북방식으로 불리우는 탁자형과 남방식인 바둑판형, 지상석곽형 등 다

양한 형식이 분포되어 있다.“고 설명되어 있었다.


그 외에 “선운산 도립공원” “고창 읍성” “학원 관광농장” 그리고 “주변관광지”와

“축제 한마당” “먹거리 한마당” 등으로 안내가 되어 있었다.


어느 지방을 여행하며, 그 지방의 특성과 역사, 환경 등을 알려면 최소한 그 지

방의 소개책자에 수록되어 있는 곳 정도는 직접 가서 보고, 느끼고 돌아와야 진

정 그 지방을 여행하고 돌아왔다고 말을 할 수가 있을 터인데....


단지 조금 아쉬운 것은 안내 책자의 내용이나 철자법 등은 관련 전문가의 감수

를 받아, 내용을 왜곡하거나  誤記가 없도록 관심을 기울여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이 안내 소책자에도 “먹을거리”라고 표기를 하였지만, “먹거리”가 옳은 표기이

다.

     

고창군청에서 선운사 쪽으로 방향을 잡으니, 곳곳에 풍천 장어 집과 복분자  술

공장 및 판매소들이 자주 눈에 띈다.

풍천장어는 아직까지 한 번도 먹어보질 못했고, 복분자 술과 쥬스 등도 현지에

서 사본 적이 없기에 사볼까? 하다가 도로변의 판매소에 사람도 없는 것 같아

그냥 몇 번을 지나쳤다.


송창식의 “선운사의 동백꽃을 아시나요?”하는 노래로 더 알려진 곳이 “선운사”

라는 절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이곳도 개발을 한답시고, 대규모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지자체 이후, 수익사업의 기획과 운용에 아마츄어 수준의 공무원들이 개발이다

체험이다, 축제다 해서 각종 행사와 수익성사업을 벌려놓지만, 실제로 활성화

되고 사업이윤을 창출하는 것이 얼마나 되려는 지는 면밀히 검토하지도 않고,

또 얼마나 많은 주민들의 세금을 먼저 먹는 놈이 임자라고 여기 저기 건물만 호

화롭고 크게만 벌려 놓으니, 감사기관은 뭘 하는지 국가 및 지방관서에서 국민

의 혈세로 예산을 낭비하고 탕진하는 행태는 하루 빨리 고쳐져야 할 것이 아니

겠는가?


시민단체라는 것이 그러한 정부나 지자체의 잘못된 행정과 예산의 집행을 감시

하고, 제대로 국민과 주민을 위해 행정을 해나가도록 감시와 독려를 해야 하는

데도 불구하고, NGO라고 자처하는 자들이 정부의 돈이나 타먹고 그들의 비위

나 맞추고, 그 알량한 지식과 실력으로 출세나 하려고 하니 얼마나 한심한 작태

들이 지금 이 시간에도, 이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지 하품만 나올 뿐이다.


선운사를 들어서는 길들이 운치는 있으나, 절의 경내에 들어서니 예니 절과 별

로 다를 바 없고, 문화재라 한들 주목할 만한 것들도 거의 없어 실망만 안고 주

차장을 빠져 나왔다.


차라리 진안 마이산엘 갔으면 마이산 탑사에 어린 그 瑞氣어린 거사의 특별한

정신세계라도 느낄 수가 있을텐데, 절의 규모에 비하여 오히려 겉모양만 반지

르하게 절의 건물을 개축하고 신축하는 데만 신경을 집중시키고 있는  것 같다

는 느낌을 받았다.


아들에게 “마이산에 들렸다 갈까?”하니 그냥 가자고 하여 변산으로 향했다.

변산반도의 풍경과 해안을 따라 펼쳐지는 경치를 사진에 담아보라는 의미에

서....


이곳 역시 핵폐기장 건설반대로 주민들끼리 서로 치고받고 싸워서 만신창이가

된 곳이 아니었던가?

우리 국민끼리 싸우는 것을 좋아할 종자들은 누구이겠는가?


이렇게 단순하고 명명백백한 답을 모르는 이는 없을 터인데, 왜 그런 불순세력

들의 음모에 선량한 우리 국민들이 놀아나는지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다.

반도의 해안도로를 따라 나오며 잠시 어느 망루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아들의

어깨를 잡고 함께 사진 한 장을 찍었다.


무슨 무슨 영화촬영장이라고 커다랗게 간판을 붙여 놓았는데, 요즈음은 국내를

여행하다보면 이런 저런 영화촬영장소라는 간판을 걸어놓은 곳이 부지기수이

다.

그렇게도 그런 곳이 가볼만한 곳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것 보다는 그 고장의

자연사박물관이나 박물관, 미술관, 도서관 등의 건립과 관람안내에  역점을 두

면 얼마나 좋겠는가?


명품이다,  세계적인 패션의 첨단을 걷는다, 먹고 살만하니 세계여행이다,  하

는데, 그 만큼 만이라도 우리 문화의 보존, 발전을 위하여서도 국가적이나 국민

적인 관심을 기울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우리가 어느 지방을 가든지, 그 지방의 문화를 일목요연하게, 또 그 지방 문화

의 중심적 구실을 하며 외부에 알릴 수 있는 장소가 하나씩은 꼭 있어서, 그 지

방을 여행할 때에 누구나가 들려서 그 지방의 역사, 문화, 경제, 생활상 등을 대

략적으로라도 알 수 있는 곳을 만들어 놓는다면, 그 흔한 무슨 축제니 뭐니 하

면서,  알맹이 하나 없는 하찮은 행사를 벌이기보다 얼마나 좋은 일이겠나?


변산반도를 거쳐 군산으로, 군산에서 군장 하구 뚝을 지나 서천으로 향했다.

서천 부근의 우리나라 모시의 본 고장, 한산이라는 곳을 언젠가 가보고 싶었는

데, 그 곁을 지나면서 그냥 지나치니 아쉬운 마음이다.


하긴 이 서천이라는 곳은 옛날 70년대에 한 참 전국으로 낚시를 다닐 적에 자주

왔던 곳이기도 하다.


개복다리(종천)저수지, 배다리(주항)저수지, 흥림지, 봉선지, 축동지 등 지금으

로부터 약 30년 전 까지만 해도, 오지의 숨어있는 저수지로 수많은 월척을 배출

하여 그 진가를 알린 곳들이 많았던 곳이었다.


그 당시 낚시를 하는 사람들은 지금같이 길이 사통팔달하고 포장이 되지 않았

음은 물론 자가용 시대도 아니었기에, 관광버스를 전세 낸  낚시회 버스를 이용

하여 통금시간이 해제되는 새벽 4시 언저리에 서울을 떠나 4-5시간 정도 걸리

는 이곳으로 낚시를 자주 왔었는데, 그 당시에는 신작로도 아닌 농로보다 조금

넓은 길을 그 커다란 버스가 기사의 운전솜씨 덕에 편하게 다니기도 했었다. 

그런데, 그 저수지를 가다보면 직각의 좁은 길 코너에 농가가 하나 있었는데,

그 집의 주인은 주말만 되면 지붕을 버스들이 부딪치고 지나가 일부 귀퉁이가

조금 부수어져, 낚시회 총무들이 변상을 해주었는데, 그 농가의 주인은 수리도

하지 않고, 아주 상습적으로 피해보상을 받아 낚시꾼들이 그의 그런 행동에 혀

를 찬 적이 있었다.


본인도 그곳으로 낚시를 다녀 온 후, 2주 만에 또 그곳으로 낚시를 간 적이 있

었는데, 그날도 역시 지붕이 조금 부수어 졌다고 버스를 잡아 놓고 못가게 하

며, 돈을 요구하였다. 그곳을 지나는 낚시버스는 매주 그의 밥이 되곤 했던 적

이 있었다.


낚시꾼이라는 것이 일 분 일 초라도 빨리 낚시터에 도착하여 낚시대를 펼쳐야

하는 성질이 급한 무리들이기에, 보상 문제로 시간을 낭비하며 실갱이를 벌이

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에, 그 농가의 주인은 그 약점을 최대한 이용하여 돈을

챙기고 있던 것이었다.


그 지방을 지나면서 그때의 그런 일들, 또 억척스럽게 낚시를 했던 일들이 생각

나서 혼자 웃음을 머금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이었지.

돌아오는 낚시버스 안에서 매점아줌마(낚시회에서 버스를 대절하여 낚시를 가

면 낚시회 소속(?)의 장사하는 아줌마가 따라 오는데, 낚시의 미끼부터 간단한

낚시도구, 밥, 라면,  커피, 술, 담배 등을 파는 아줌마)가 파는 외제 캔맥주 몇

개를 마시며, 잠을 청해 피로를 풀기도 했었다. 그때에는 일반 판매가 금지된

양담배를 그 매점아줌마가 팔기도 하였다.


여담이지만, 그때에는 양담배를 피다  전매청 단속반에 적발이 되면 경찰서에

끌려가서 조서를 쓰고 벌금을 물곤 하던 시절이었는데, 낚시를 가다가 어느 휴

게소에서 잠시 쉬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는데, 단속반으로 보이는 사람이 고속

버스에서 내려 양담배를 피는 손님을 적발하여, 버스를 타지도 못하게 하고 조

사를 한다고 데리고 가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내가 보기에는 그 시골 양반이 서울에 올라왔다가 아마 아들이나 사위가 한 번

피워보시라고 드린 귀한(?) 양담배 같았는데, 그만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피우

다 단속반에 적발이 되어, 버스도 못타고 어디로 끌려가 조서 꾸미고,  벌금 물

고....... 했을 터이다. 보기에 안 됐어서  “그런 양반은 좀 봐주지”라고 혼자서

중얼거리긴 했지만.

그 단속반 요원들은 멀리서도 담배연기만 보아도 양담배인지 아닌지를 구분한

다고 했다. 


서천으로 들어서서 춘장대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실은 바다의 일몰을 보기위해 부지런히 해가 지는 시간에 맞추어 이곳으로 온

터였다.

아직은 조금 시간이 있었지만, 해 뜨는 모습이나 해 지는 모습은 순식간에 없어

지므로 여유를 부렸다가는 그 순간을 포착하는 것이 쉽지만은 아니기 때문이

다.


이 춘장대 해수욕장은 전두환 군사정권 집권 이후, 84년도에 서울의 연구단지

를 모두 대덕 연구단지로 이전하라는 서슬이 퍼런 군사정권의 방침에 의해 본

인도 근무하던 연구소가 대전으로 강제 이전하였고,  미처 전가족이 이사를 갈

수가 없어서 본인만 대전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다가, 85년에 가족이 모두 내려

와서 1년간을 살았던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86년 여름에 온 가족이 춘장대 해

수욕장을 간 적이 있었다.


그때 지금의 아들이 국민학교 1학년이었을 적이어서, “아들아! 네가 어렸을 적

에 우리 네 식구 모두 해수욕하러 왔던 기억이 나니?” 하고 물으니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우리 아들과 딸이 한 참 귀여운 어린이 시절이었는데.....


차를 적당한 곳에 대놓고, 아들은 카메라의 장비들을 다시 조립하고, 나는 단순

히 디지털 카메라로  찍을 준비를 했다.

사실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기계치가 되어가고, 기계를 조작하는 것도 귀찮기

만 하여, 이제는 예전처럼 아니 전혀, 그리 흥미를 느끼지 않게 되었다.


휴대전화도 몸에 지니고 다니는 습관이 되지 않아, 오는 전화도 못 받을 적이

많아 친구들이나 지인들에게 오해를 많이 받으면서도, 또 반복을 하곤 한다. 그

래도 나는 휴대전화를 냉동실에 넣지는 않았다. 문갑 설합에 넣어놓고 종일을

찾은 적은 있었지만.


붉은 해는 바다의 해면 위로 떨어지면서 더욱 붉어지며 몸을 감추는데,  타는

듯 마지막 붉은 피를 토해 내듯이 점점 빛을 잃어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찍으려

고 부지런히 셔터를 눌러댔다. 

사진을 잘 찍는 다는 것이 뭐 별거이겠는가?

우선 많이 찍어야, 그 중에서 건질 것도 있게 마련이 아니겠는가?


열심히 찍는 아들의 모습을 나는 또 뒤에서 찍으며, 춘장대의 석양을 마감하고

있었다.


해가 지니 바람은 더욱 불고 추워진다.

카메라 장비를 정리하고 차에 올라, 아들에게 “대천으로 갈까?  금산 쪽으로 갈

까?   아니면 그냥 서울로 갈까?“ 물으니, 이 아비 마음대로 하란다.


아들과 하루를 더 머물고, 금산으로 가서 인삼 어죽을 술안주로 이야기를 나누

고 싶었지만, 서울과 홍천에서 각각 혼자서 있을 딸과 아내가 마음에 쓰여, “아

들아! 다음에는 시간을 여유 있게 잡고  온 가족이 함께 다시 오자”며,  “그럼 그

냥 서울로 가자”고 하여 서울로 연결되는 고속도로로 들어섰다.


“피곤할 텐데 애비가 운전을 하마!” 했더니 괜찮다며 핸들을 놓지 않는다.

혹시 아들이 운전을 하다 졸지 않을까 염려가 되지만 의자에 깊이 몸을 실었다.


당진을 지나 서해대교 행담도 휴게소에서 저녁을 먹을 겸, 야경을 건질만한 것

이 있을까? 하여 행담도 휴게소로 들어섰다.


육개장 같은 얼큰한 국물로 저녁을 먹으며 대교부근을 살펴봤으나, 사진 찍을

만한 풍경은 없어서 다시 차에 올라 서울로 향했다.


평일의 저녁시간인데도 차량이 너무 많았다.

서울에 들어서니 내부순환로에 들어서기 까지 너무 차가 밀려서 시간이 많이

늦어졌다.


동네 근처에 도착해서야 술과 안주를 사가지고 들어가서 모처럼 아들, 딸과 함

께 한 잔을 하려고 했더니, 딸은 감기에 걸렸다고 일찍 자겠다고 하여, 아들과 

시원한 맥주로 사흘간의 여독을 풀며 새벽 한시가 되어서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서 딸아이 출근을 시켜주고, 홍천으로 핸들을 잡았다.

가뜩이나 무서움을 잘 타는 아내가 잘 있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이렇게 혼자

서 집을 보고 있는 것도, 아내로서는  이번이 처음인데.....


홍천에 도착하니 11시가 넘은 시각이다.

아내가 반가이 맞이하며 “아들과 한 여행, 재미있었느냐?”고 묻는다.

아들과 여행을 가면, 그래도 든든하기는 하지만 가족 모두 같이 가는 것만큼은

재미가 있겠는가?


이다음의 가족여행은 모든 일들이 잘 이루어져 정말로 즐겁고 의미가 있는  여

행이 되기를 기대하며, 얼마간의 아들과 당면한 문제에 대해 조정하고, 일치된

인식으로 심기일전하여 최선의 노력을 하기로 약속을 하고, 나는 아비로서 최

대한의 마음의 지원을 하리라 생각을 했다. 


이번 아들과 단 둘만의 여행은 아들과의 사랑을 확인하는 여행이라고 해야겠

다.

무릇, 자식을 키워보고 나서야 안 일이지만, 자식 사랑하는 마음이야 어디가 그

끝이 있겠는가?

나도 자식이었을 때, 부모의 사랑을 뼛 속 깊은 골수에 간직하지 못했던 것처럼

내 자식들도 그러할 진데, 어디 그것이 자식의 부모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서 이

겠는가?

그저 아비와 어미의 자식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마냥 끝이 없으며, 마냥 그 자

리에서 기원하는 것이려니........


전봉건의 시 <사랑>이 바로 그러한 사랑이 아니겠나 싶다. 


사랑한다는 것은


열매가 맺지 않는 과목(果木)은 뿌리째 뽑고

그 뿌리를 썩인 흙 속의 해충은 모조리 잡고

그리고 새 묘목을 심기 위해서

깊이 파헤쳐 내 두 손의 땀을 섞은 흙

그 흙을 깨끗하게 실하게 하는 일이다.


그리고

아무리 모진 비바람이 삼킨 어둠이어도

바위 속보다도 어두운 밤이어도

그 어둠 그 밤을 새워서 지키는 일이다.

훤한 새벽 햇살이 퍼질 때까지

그 햇살을 뚫고 마침내 새 과목이

샘물 같은 그런 빛 뿌리면서 솟을 때까지

지키는 일이다.  지켜보는 일이다.


사랑한다는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