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락재의 기사가 수록된 국내 전원생활에 과한 정보를 제공하는 월간지 "전원속의 내집" 07년 9월호 표지
전원속의 내집 07년 9월호 목차(Contents) pp.62-67에 동락재에서의 전원생활과 목공예가 소개되었다.
"니어링부부"는 마음에 들지 않고, Henry David Thoreau 가 쓴 "Walden"부럽지 않다고 표현 했으면
좋았을 텐데.....
사진전문기자가 찍은 동락재의 전경이 아내는 "참 마음에 든다"고 하였다.
기자의 눈과 목공예가가 보는 눈과는 서로 다름이 당연한 것이 아닌가 싶다. 기자는 대중을 나는 작품성을 생각하며 보고 느끼는 것이 아닐까?
동락재 통신 115- 전원생활 관련 잡지사의 취재 대상이 된 색다른 경험
(07. 8. 31)
며칠 전 전원생활과 목공예에 관한 취재를 약속했던 “전원속의 내집”이란 잡지사에서 취재기자와 사진기자가 취재차 방문했다.
약속시간은 오전 10시30분 이었는데 차가 밀릴 것 같아서 일찍 출발했더니 예정보다 일찍 도착을 했단다.
나는 집안에서 다른 일을 하고 있던 차라 옷도 챙겨 입지 않고 있다가 부랴부랴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뜰 안 깊숙이 차� 대고 내리는 그들을 맞았다.
우선 동락재의 거실로 안내를 하니 아내가 차를 내왔다.
아내는 전원생활을 취재하는 기자들이므로 산촌의 신선하고 맑은 공기 속에서 자란 소나무의 솔잎으로 만든 솔잎차를 대접하고 싶었나 보다.
이 솔잎차는 향이 좋고 청랭(淸冷)하게 하여 마시면 입과 머릿속이 환하게 맑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 솔잎차는 지난해에 담근 것으로 발효가 되어 송엽주(솔잎술)처럼 약간의 술 냄새가 나기도 한다.
양주의 드라이 진과도 냄새가 유사하긴 하다.
우리 동락재를 방문하는 반갑고 소중한 손님들에겐 하절기엔 솔잎차, 동절기엔 우리 동락재의 안주인인 아내가 특별 제조한 한방 동락차를 내놓는데 이 茶들은 우리 동락재의 대표 茶라고 할 수 있다.
의례적인 인사를 나누며 기자는 조그만 수첩을 꺼내 기록의 준비를 한다.
무에 그리 적을 만한 귀중한 말들이 있을까마는......
기실 동락재를 방문하는 손님들이 오실 때에는 약간 난감한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평소에는 밭이나 뜰에서 소채와 꽃들을 가꾸기에 그저 편한 옷을 입고 껌정 고무신에 맨발로 일을 하다가 땀에 흠뻑 젖으면 욕실로 들어와 샤워를 하고 그저 텃밭에서 따온 고추며, 가지, 상추 등속으로 반찬 삼아 먹고, 작업을 하기도 하니 외양에는 신경을 쓰지 않아서, 예고 없이 방문하는 나와 아내의 친구들에게는 스스럼없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어도 흉이나 결례가 되지는 않겠지만, 이렇게 약속을 하거나 미리 통고를 하고 찾아오는 손님들에게는 평소의 머슴차림으로 맞이하면 결례가 되는 것 같아서 마땅한 옷을 찾아 입으려 해도 솔직히 옷이 없다.
아내는 몇 해 전까지 자신의 매장을 운영할 때에는 입기 편하고 의상비용이 별로 안 든다는 이유로 생활한복을 주로 입곤 했지만, 나의 경우는 공식적인 사회생활이나 직장생활을 하지 않은지가 오래되어서 서울엘 가서도 정장을 입을 일이 거의 없고, 아니 정장은 전혀 입지 않고 어쩌다 경조사에 참석할 때에만 꺼먼 정장만을 꺼내어 입곤 했다.
그래서 시골에서 산다는 것이 품위유지비가 별도로 들어가는 경우가 많지 않으므로 참으로 편하기도 하지만 낯설거나 조금은 격식을 갖추어 맞아야 할 손님들이 오게 되면 곤혹스럽긴 하다.
하여 아내는 전에 입던 편안한 여름 생활한복으로 갈아입었지만, 나는 그저 늘 입는 반바지는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긴 바지로 갈아입고 위에 남방 하난 걸쳐 입고 손님을 맞이하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이만하면 우리에게는 옷차림으로는 큰 손님을 치루는 것이기도 하다.
아내는 생활한복이 잘 어울린다. 평소에도 화장을 하지 않으니 수수한 모습이 시골에서 살아가는 촌사람들 본연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기사 취재의 이야기 거리라기보다는 산촌에서 생활을 하게 된 인생스토리(?)를 얘기하면서 목공예에 입문하게 된 연유, 시골에서 살아가는 이야기, 고적함과 자연과 함께하면서 나물먹고 물마시고 無慾으로 자기성찰의 시간에서 작품과 함께, 또 외부와의 단절을 막고 외곬으로 흐르는 시골촌부가 되지 않기 위해 작업실이 아닌 살림채로 사용하던 여유건물을 농어촌민박 지정을 받아 펜션으로 활용하며 살아가는 이야기 등을 나누나 보니 점심시간이 가까워졌다.
나는 1시가 되면 무릎치료를 위하여 매일 읍내의 정형외과 의원에 가서 물리치료를 받아야 하고, 기자들은 사진을 찍어야 한다기에 같이 뜰 안과 밖으로 나와 10여장의 사진을 찍었다.
화려한 2층의 호화고급 전원주택은 아니지만 내 손으로 몇 년간을 가꿔온 집이기에 많은 정이 가기도 하지만, 나만의 공간에 각종 목조각 조형물과 오브제 등을 설치한 뜰 안의 작품이나 실내에 전시된 나의 작품을 강조를 했으면 했는데, 건물의 외형과 우리 부부의 인물이 담긴 사진 등을 담아갔다.
기실 우리는 인물사진을 찍지 않으려 했다.
발행부수가 일반 여성잡지만큼은 많지 않을지라도 외부에 우리 부부의 모습이 알려지는 것은 그리 달갑지 않게 생각하고 있는 터였지만, 거절을 하지 못했던 것이 좀 아쉬웠다. 어쨌거나 인물사진을 찍는데 모델의 표정이 어색한지 많은 시간을 들였고 몇 컷을 연거푸 찍었다. 한 장이나 건질게 있으려는지.....
나도 사진을 좋아해 젊었을 때는 사진을 많이 찍기도 했고, 우리 가족이나 남의 사진을 많이 찍기는 했어도 정작 내 사진은 별로 찍어보질 않아서 표정이 자연스럽지 못해 항상 실물에 비해 어색하게 잘 나오지 않는 편이다.(대개 못 생긴 사람들이 이렇게들 얘기를 하지만........)
요즈음은 머리도 많이 벗겨지고 너무 늙은이로 변한 내 모습이 그리 아름답지 않아서 사진과는 더 친해지지 않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내는 자연스럽게 잘 나오는 편이긴 하다.
나와 같이 사진을 찍을 때면 아내에게 미안하다. 아내의 좋은 인상을 내가 옆에 있음으로서 버리게 만드니.....
그렇다고 이 나이에 얼굴을 뜯어고칠 수도 없으니, 그저 가는 세월만 무상하달 뿐이다.
어쨌거나 요즈음은 무릎의 치료 때문에 목공예의 작업을 하지 못하고 있기도 하지만 여름에는 나무에 습기가 많아 작업을 하지 않고 있는데, 작업을 하고 있는 장면을 연출해 달라고 하기에, 그것은 하지 않고 기자의 요청을 다 묵살할 수는 없어서 간단한 솟대의 소품을 만지고 있는 장면으로 양보를 했다.
잡지의 사진이란 것이 다 이렇게 인위적 연출에 의하여 나오게 되는 것 일진데, 하물며 TV의 사진은 오죽하겠나 싶었다.
그들의 의도대로 인상과 포즈를 취해야 하니 우리 같은 사람들은 못할 노릇이 아니겠나?
활동사진이 아닌 정지된 사진이기에 그래도 이 정도 하는 것이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
하기야 이런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각종 연출로 자기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좋은 기회이기도 할게다.
10컷 정도의 사진을 찍는 시간이 한 시간 정도나 되니, 그래도 프로들의 사진은 다르긴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의도한 장면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것.
어느 분야이든 마찬가지겠지만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한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아름다운 것이 아니겠는가?
이러구러 소위 인터뷰와 사진촬영을 마치고 아내가 준비한 콩국수로 점심을 들었다.
홍천지방의 콩으로 만든 걸쭉하고 고수한 콩국수, 그리고 방금 밭에서 따온 고추며 오이며.....
시골에서 먹는 음식은 모두 소위 웰빙 음식이 아니겠나.
유기농, 저 농약으로 재배한 소채는 고기 없이도 신선하고 깨끗하고 맛이 있다.
나의 집을 방문한 손님들이 나의 아내와 내가 만든 편안하고 아름다운 공간과 작품, 그리고 주변 자연환경을 칭찬하고 잠시 부러워하는 것을 보면 시골에서 산다는 것이 그리 외롭지만은 않다.
그저 우리 부부의 작고 아름다운 나의 혼과 정성이 깃든 공간에서 서로의 정담을 나누며 선하고 아름다움을 논하는 그 시간들이 내 생애의 소중하고 기억하고 싶은 추억으로 길이 남기를 소망한다.
오늘 우리 내외의 기사와 사진이 들어있는 “전원속의 내집” 9월호를 받아 보았다.
김00 & 김00 부부의 산촌일기
"니어링 부부가 부럽지 않습니다" 라는 부제로 6면으로 기사가 작성되었다.
사실 나는 니어링 부부로 회자되는 것은 그다지 달갑지가 않다.
나는 니어링과는 달리 좌경 자연론자는 아니고 우파 자연예찬론자로 자처하며 오히려 미국의 Henry David Thoreau의 대표작 "월든(Walden)" - 이 책은 단순한 숲생활의 기록서가 아닌 자연의 예찬인 동시에 문명사회에 대한 통렬한 풍자이며,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구속받지 않으려는 한 자주적 인간의 독립선언이기도 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 과 같은 생활을 추구한다고 하는 점에서 기자의 표현에 동의하지 않음을 표명하고 싶다.
기사의 내용은 취재기자가 잘못 이해하여 기재가 된 몇 가지를 제외한다면 전원생활에 관한 이야기는 대체적으로 무난하게 기록이 되었다고 하겠으며, 우리가 손수 가꿔온 동락재의 전경사진은 아내가 아주 마음에 흡족해 하니 그 잡지사의 변 사진부장께 감사의 마음을 표하고저 한다.
“책이 8월 말에 간행이 되는데 나오는 대로 금방 보내드리면 9월 1-2일 경이 될 것입니다.”는 말을 남기며 기자들은 떠났는데, 역시 그 기자들은 성격이 급한 사람들인가 보다.
동락재를 방문할 때에도 1시간 정도 일찍 도착을 했는데, 책을 보낼 때에도 며칠이나 앞서서 보내니 말이다.
보내준 잡지는 감사한 마음으로 받았음을 이 통신을 통하여 전하고 싶다.
강은교 시인의 시가 떠올라 적어 본다.
<우리가 물이 되어>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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