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자
이승훈
“오늘 신문 봤어요? 최승자가 누구야요?” “응. 최승자 시인? 몇 년째 정신분열증이야.” “그런데 최승자가 시는 잘 써요?” “시가 좋지. 내가 좋아하는 시인이야.” “그런데 뭐 허무가 보인다더니 정신병자가 되었잖아요? 부처님 말씀이 일체유심조라고 마음을 그쪽에 쓰니까 정신병자가 된 거야요. 이상인가 뭔가 하는 시인도 정신병자 아니야요?” 겨울 오전 주방 식탁에 앉아 밥 먹을 때 전기 청소기 들고 아내가 하는 말이다. “나도 오십보백보야.” 한 마디 하려다 그만 둔다.
―『시와 반시』2011년 겨울호
■■■■참으로 이승훈 선생님의 시다. 있는 그대로, 간략하게. 누가 그랬던가? 사실 그대로를 가감없이 그려내는 게 가장 큰 충격이라고. 오롯한 그대로를 목격하게 함으로써 가장 깊숙한 폐부를 찌르는 고수의 기술이 엿보인다. 시인이란 이름을 가진 우리 모두가 피해갈 수 없는 외나무다리 같은 不問 하나를 심어 놓은 것. 오직 모를 뿐인 화두를 내가 아닌 나 안에 심어 놓고 당황스럽고 불편한 대면을 주선한 것. 자고로 ‘시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들은 마땅히 겪어 보았을 병이 속세에서 이름값을 치르고 있다. 그 ‘맞수’는 세상 사람들이기도 하고 심지어는 나의 가족이기도 하다. 살을 맞대고 살아도 이해되지 않는 현상이 엄연히 현실 안에서 목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지경은 부정할 수도 없는 딱한 노릇이면서 타인을 통해 내 정체성의 일말을 대변하기도 한다. 시 속의 ‘최승자’는 시를 쓰는 모든 시인이기도 하니까. “최승자가 누구야요?” 란 물음 앞에 시를 쓰는 모든 시인은 가슴이 딱 막히는 당혹감을 느낄 것이다. 그것은 내 아내가, 내 자식이 던져오는 질문처럼 뜨끔하고, 아프고, 대책없는 그러나 근원적인 질문이기도 하다. 뿌리가 아프다는 말을 하지 못하는 나무의 발성은 정상적인 소통체계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너무 간절하고 너무 아파서 이상한 몸짓으로 비칠 수밖에 없다. 무릇 정신병의 근저란 소통의 열망이 또아리를 튼 불통의 신경다발을 몸 안에 들인 일이 아니던가. 세계를 향한 그런 정신병이란 도저한 물음의 징표이며 자기와의 치열한 싸움의 한 방식에 다름 아니다. 다행스럽게도 시 안의 화자는 아내의 정공법에 “시가 좋지, 내가 좋아하는 시인이야.”라고 맞받는다. “이상인가 뭔가 하는 시인도 정신병자 아니야요?”라는 韻에조차 “나도 오십보백보야.” 라고 답하고 싶은 시인의 긍정은 얼마나 건강한가! 이 대답만큼 시원한 정체성이 어디 있겠는가. 문제는 마음을 그쪽에 쓰고 싶었던 것일 게다. 그게 병이든지 말든지. 그러므로, 마땅히, 최승자 시인은 안쓰럽지만 잘 견디고, 잘 싸우고, 잘 즐기며 좋은 시를 생산할 것이다. 멀쩡한 그 누구보다 더 희귀한 정신의 꽃을 여여하게 피울 것이다. “두려움을 바라보라. 도망치지 않고 정당화하지 않고 비난하지 않고 억누르지도 않으면서 그것을 바라볼 자신이 있는가?” 나도 최승자 시인처럼, 이승훈 시인처럼 즐거운 ‘오십보백보’가 되어 아무 결론도 내리지 않고 세계의 모든 움직임을 이해할 수 있는 가슴을 소명처럼 지닐 것이다.
단평 이인주 2006년 『서정시학』으로 등단.
Flora No
|
'同樂茶軒-문화와 예술 > 詩가 있는 뜨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갈대 / 천상병 / 신경림 (0) | 2013.11.10 |
---|---|
[스크랩] 별까지는 가야 한다 - 이기철 (0) | 2013.11.10 |
우리가 어느 별에서 만났기에 / 정호승 詩 (0) | 2013.11.10 |
[스크랩] 괜히 왔다 간다 .... / 중광 (重光) (0) | 2013.11.07 |
[스크랩] 바다의 집 / 마종기 (0) | 2013.11.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