同樂茶軒-문화와 예술/詩가 있는 뜨락

이름을 지운다/ 허형만

sosoart 2015. 2. 25. 23:10

 

 

 

 

이름을 지운다

 

                              허형만

 

 

수첩에서 이름을 지운다

접니다. 안부 한 번 제대로 전하지 못한

전화번호도 함께 지운다

멀면 먼대로

가까우면 가까운대로

살아생전 한 번 더 찾아뵙지 못한

죄송한 마음으로 이름을 지운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음을 몸이 먼저 아는지

안경을 끼고도 침침해 지는데

언젠가는 누군가도 오늘 나처럼

나의 이름을 지우겠지

그 사람, 나의 전화번호도

함께 지우겠지

 

별 하나가 별 하나를 업고

내 안의 계곡 물안개 속으로 스러져가는 저녁

 

 

 

허형만

 

중앙대 국문과 졸

1973월간문학등단

목포대학교 인문대학장 겸 교육대학원장 역임

소파문학상, 전남문학상, 예술문학상, 전라남도문화상,

평화문학상, 한국크리스챤문협상, 우리문학작품상,

편운문학상, 한성기문학상 수상

시집청명,풀잎이 하나님에게,모기장을 걷는다

입맞추기,이 어둠 속에 쭈그려앉아,供草

진달래 산천,새벽,풀무치는 무기가 없다

 

 

 

나의 수첩에서 적혀진 사람의 이름을 지운다는 것은 나의 머리 속에서 모든 그 이름으로 기억되는 모든 일과 추억들을 지운다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던 존경했던 분이던, 그리고 어떤 일로 인하여 미워했던 사람이나 좋아했던 사람도 의도하지 않았지만 살아가는데 바빠서, 또는 지금은 소식을 전하지 못해도 나중에라도 마음을 전하면 모든 것을 이해하고 비록 섭섭했더라도 나를 이해해 줄 것으로 믿었던 사람이었지만,

 

더 많은 세월이 흘러서 서로 왕래도 못하고 그리워하는 마음 하나로 훗날을 기약했던 만남이 이루어지지 못한 채로, 먼 후일 어느 날 생각이 났지만 이제와서 연락을 한다는 것이.....”라며 차일피일 미루다 관계유지의 골든타임을 놓치게 되는 서글픈 일이 있게 됩니다.

 

바빴지만 그리 이루어 놓은 일도 없이 어느덧 나이만 먹어 초라한 몰골만 안고 옛 사람들이 그리워 나의 옛 수첩을 들쳐보면, 안부 한 번 전하지 못하고 지나왔던 그리운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러나 이제는 이름은 그대로 이겠지만 전화번호가 그대로이지 않을 사람들이기에 수첩에서 그 이름들을 하나하나 X표로 지워버립니다.

 

그 지워버리는 마음이 나의 흔적과 존재를 지워버리는 아픔과 단절 같아서 가슴이 쏴~ 해집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지울 때 그는 아마 나의 이름을 이미 지웠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사람이 살면서 아니 또 살아온 날을 정리하는 나이가 되면서 보고 싶었던 사람을 만나고 가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이제 와서 보면 모두가 그리운 사람들, 모두가 나의 마음이 묻어있는 사랑스럽고 존경스러운 사람들 이었는데.....

 

서울의 밤 하늘은 산골의 하늘처럼 차가웁지만 별들이 서성이는 밤이 아니어서 적막도 외로움도 낭만도 없는 거친 밤 같습니다.

 

오늘도 기억의 수첩에서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지우며 에린 가슴과 허전한 마음을 추슬러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