同樂茶軒-문화와 예술/詩가 있는 뜨락

그렇게 살고 있을꺼야 다들/ 김낙필

sosoart 2015. 3. 6. 16:04

 

"귀촌 이야기" 대나무에 유채 oil painting, 50x50 cm, 2003. 동락재

 

 

그렇게 살고 있을꺼야 다들

 

                                    김낙필

 

그렇게 살고 있을 꺼야 다들

사연마저 없는 이가 있을까

 

저마다 가슴 속에 사연 하나씩은 심고 살겠지

때로는 울 수 없어서 가슴만 젖고

때로는 숨고 싶어 가슴만 태우는

그런 속앓이 하나쯤 가슴 한 켠에 품고 살겠지

 

산다는 게 녹녹치 않아 쉽게쉽게 살 수도 없고

속상하고, 억울하고, 허망해서 애 탈 때가 한 두번 아닐 테지

그렇게 살다 보면 세월은 어느새 서리 내리고

 

문득 어느 날

'회심곡'이 마음에 와 닿는 날

그날은 저무는 저녁놀 조차

예사롭지가 않을 꺼야

 

살다 살다 그렇게 혼자 지쳐서

술 한잔 놓고 넋두리만 웅얼거릴 때

사연들은 더 깊이 속으로만 숨고

살면서 사연 없이 사는 이가 누구 있을려구

 

누구든 저마다 말 못할 사연 하나쯤

깊은 가슴 속에 묻어 두고 웅웅거리며

그렇게들 아마 살고 있을꺼야

 

어디 나만 그렇겠어

다들 그렇겠지

 

 

김낙필

- 시인/ 화가

- 아트그룹 모티브회장

- 한국문학작가연합, 한국미협(과천)회원

- 시집 마법에 걸린 오후’ ‘나의 감옥

 

 

 

우리네 평범한 보통사람들이 한 세상을 살아가자면 누구나 한, 두 가지 쯤의 사연은 모두 다 가지고 있을 것 같습니다.

 

사람이 살면서 가슴 속에 품은 속내를 어디에다 표현하고, 속에 품었던 말을 다하며 살겠습니까?

 

젊은 시절엔 좋아하는 사람에게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 없인 하루도 살 수 없을 것 같아요뭐 이런 말을 그대 앞에서 했던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하긴 요즘 젊은이들은 거침없이 표현하고 행동으로 옮긴다고 하지만......

 

또 친구 간에, 지인, 친척 간에 상대방은 아무런 악의 없이 뱉어버린 말이라도 나에게 큰 상처나 비수처럼 꽃혀 올 때도 있었던 일도 있었고

 

부부간에도 서로 사랑한다고는 하지만 남편은 밖에서는 친절하고 자상한 상사이고 동료이지만, 아내와 자식에게는 내 가족이니까 아무런 걸름 장치없이 그대로 말을 하여 아내에게, 자식들에게 아주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을 가슴아픈 말을 했었을 수도 있을테고........

 

혹은 나이 들어 퇴직을 하고 집에 있으면 늙은 아내들이 삼식이잔소리꾼이니 남들처럼 모은 돈도 없고 공무원이나 교사 출신처럼 두둑한 연금도 받지 못하니 천덕꾸러기로 전락되어 마누라는 친구를 만나 점심을 먹으러 나간다’, ‘동창모임에 나간다하며 점심엔 끓여 놓은 지 며칠 지난 곰국이나 드시구려.....’ ‘매일 매일 삼시세끼 끓여 먹는 것도 나이가 들으니 힘이 드네, 뭐네하며 기죽은 늙은 남편 들으란 듯이 마구 말을 쏟아 낼 때도 그저 꿀먹은 반편 모양 아무 말 못하고 끙~하니 속을 다스리는 늙다리 남편들도 있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살기가 팩팩하고 힘이 들 때, 사람들은 문득 첫사랑이나 젊었던 처녀, 총각시절 좋아했던 사람이 생각난다 하기도 하지요.

 

그것이 뭐 상대에 대한 부정不貞한 생각이 아니라, 지금은 돌아갈 수 없는 찌들었지만 젊은 시절 풋풋한 감정에 대한 그리움과 추억이겠지요.

 

물론 게 중에는 국민학교 동창을 만나거나 아니면 우연한 기회에 가슴에 묻어두었던 그 사람을 만나면,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야! 혹은 운명일지도 몰라! 하며 자기변명을 위한 정당성을 부여하여 부적절한 사이로 발전되었던 일을 고백하지 못하고 가슴에 묻고 사는 사람들도 있을 법한 일입니다.

 

40여 년 전 여름휴가 때 서울에서 설악산을 가려면 서울 마장동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8시쯤 버스를 타면 홍천쯤에서 점심을 먹고 진부령을 넘기 전에 속초방향에서 오는 자동차가 지나갈 때 까지 기다리다가 인제 방향에서 속초 쪽으로 가는 자동차가 지나가는 일방통행을 할 시절이 있었습니다. (홍천에서 점심 먹을 시간도 주어졌습니다)

 

그 시절 등산이라곤 도봉산 한 번 정도 올랐던 직장 동료 1명과 당시 대학생이던 사촌 여동생과 그 친구 2, 이렇게 5명을 이끌고 그렇게 속초의 신흥사 민박촌에 4시쯤 도착하여비선대를 거쳐 양폭산장에서 하루를 묵기 위해 부지런히 5인분의 34일의 텐트 등 공동 장비와 쌀과 부식 등 40Kg가 넘는 배낭을 지고 등반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초보자들을 거느리고 34일의 설악산 등반을 한다는 것이 무모하기도 하였지만 어쨌던 양폭산장을 거쳐 둘째 날엔 비가 추적추적 내렸음에도 죽음의 계곡을 비껴 대청을 오른 후 백담사 야영장에 2박을 하려했으나 등반객이 너무 많아 오세암 못미쳐 작은 계곡에서 비박을 하였고 다음날 날이 개어서 오세암을 지나 마등령을 넘어 신흥사 민박촌에서 마지막 날엔 편하게 자려고 비선대를 지나 신흥사 부근에 당시 등산인들에게는 좀 알려진 젊은 부부의 야외 커피집에서 따끈한 커피를 한 잔 하고 민박집으로 향했습니다.

 

민박집에 도착해서는 비와 땀에 젖은 빨래도 하고 저녁을 먹고 여름이긴 하지만 방에 뜨겁게 불을 때 달라고 해서 마지막 하룻밤을 편안하게 지내고 다음 날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밤에 하도 방이 뜨거워 땀이 뻘뻘 나기에 새벽에 혼자 나와 마당의 돛자리에서 잠을 자고 아침에 얼굴에 무엇이 닿는 이상한 느낌이 들어 눈을 떴더니, 강아지 한 마리가 내 얼굴을 핥고 있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모두들 무사히 그 당시 설악산이란 험하고 높은 산을 무사히 등반을 해준 동생 친구들이 고맙고 대견하다고 했더니 사촌 여동생이 오빠, 그러면 서울 가면 언제 한 턱 내!“라고 해서 그러마 하고 나중에 만나서 간단히 저녁을 먹자고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서로 시간이 맞지 않아서 차일 피일 미루다가 이래서는 안 되겠다 생각하여 날짜를 정하고 그날 나온 사람만 같이 만나기로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 날짜에 동생의 친구 하나만 나올 수 있게 되었지만, 내가 한 턱을 내기로 한 약속이니까 약속 이행을 위해 한 사람이라도 만나서 이 약속이라는 빚을 상쇄하고자 종로의 모 다방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동생뻘이지만 오직 두 사람만이 만난다는 것이 어색하기는 했지만 별다른 감정 없이 약속장소로 나갔었지요.

 

이 아이는 사촌여동생과 고교시절 친한 친구이면서 그 당시 대입 1차 시험에 떨어져 2H대학에 같이 들어간 대학 3년 재학생이었는데, 솔직히 뭐 얼굴이 예쁜 것도 아니고 요즘 말처럼 내 스타일이 전혀 아닌 아니올시다였지만 약속은 약속이라 그 아이 혼자만이라도 나온다고 하니까 약속 장소에 나갔던 것이지요.

 

그러나 이 여자아이가 혼자 온 것이 아니라 친구라는 아이 하나와 같이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E여대의 메이퀸에 나갔던 아이라나 뭐라나 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하는 말이 걸작입니다. 뒤로 나자빠질 뻔 했습니다.

 

이 아이는 가만히 있고, 그 메이퀸인지 뭔지에 나갔다던 아이 하는 말이 얘는 아직 공부를 해야 해요. 아저씨 같은 사람과 사귈만한 나이도 아니고 결혼도 아직 생각할 나이가 아니니까, 더 이상 만나자고 하지 마세요하는 것 아닙니까?

 

세상에.......! 워 이런 아이들이 다 있나? 싶었습니다.

내가 저를 예쁘다고 했나, “한 번 만나줘요!”라고 노래를 했나?

하고 많은 괴짜들이 있다고는 하지만 너무 어이가 없었습니다.

 

요즘이라면 아마 이런 또라이 계집애들, 00 육갑하고 자빠졌네.....”라고 했을 텐데, 그럴 사이도 없이 그 말만 내뱉고, 저희들 찻값만 내고 총총히 나가더군요.

 

정말 대낮에 어디 귀신같은 것들에게 몽둥이로 뒤통수를 맞은 그런 충격이었습니다.

 

아니 그 당시 국내 제일의 국립연구소라는 직장에서 동료 여직원이나 밖의 젊은 여성들에게 나름 인기가 있었던 내가 저런 하찮은 것들한테 이런 인생 최대의 수모를 당하다니......” 생각을 하니 목 뒤가 뻣뻣하고 표현할 수 없는 모멸감에 떨었었습니다.

 

잠시 멍~하니 다방의 천정을 쳐다보다가 정신을 추스르고 내가 마신 찻값을 내고 나왔습니다.

 

참으로 E여대 메이퀸에 나갔다던 아이가 그렇게 못생긴데 정말 놀랐었습니다. 하긴 그 시절 분위기는 대체로 공부 못하고 돈 있는 집안 계집애들이 제 몸뚱이 내세워 시집한 번 잘 가려고 그런데 나온다는 그런 분위기였었지만 말입니다.

 

그 후 동생에게 전화를 해서 너는 어째 그런 아이를 친구로 사귀었냐? 그 애 정신이 좀 돌은 애 아니냐....?”고 하니 오빠, 걔 그럴 애가 아닌데......... 오빠가 뭐 잘 못 들은 것 아냐.....?” 이러더군요.

, 아무리 정신나간 계집애라도 그렇지, 너하고 친한 친구이고 내가 네 오빠 인데 정말로 내가 저한테 치근거리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렇 수는 없는 것 아니냐?” “그 계집에 한 번 데리고 나와라. 혼꾸녕도 내줘야겠다이렇게 애꿎은 동생에게 화풀이 해도 분이 풀리지를 않았었습니다.

 

그런 후, 몇 년이 지나니 그날 등산을 같이 하던 사촌 여동생의 친구 셋이 대학 졸업을 하고 공교롭게도 다른 날 모두 미국으로 이민을 같습니다만.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관심이 있었다면 그 아이는 절대 아니고 다른 아이였는데, 나중에 듣고보니 그 아이도 나에게 많은 관심이 있었다고 하더랍니다.

 

이 시의 내용과는 다른 얘기였습니다만, 사람이 살다 보면 때론 너무 황당한 경우를 겪게 되는 경우도 더러 있습니다.

 

그 아이도 지금은 60이 중반을 넘긴 쭈그렁 할망이 되었겠지만, 그때의 제 행동이 부끄러웠다고 생각이나 할 수 있는 정상적인 멘탈의 소유자인지 궁금할 때가 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자면 누군들 몇 가지 가슴에 묻고 살지 않은 사람이 없겠지요

그것이 나쁜 추억이든 그저 빙긋이 웃음을 자아내는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든 가슴에 간직한 그 무엇이 하나라도 없으면 인생의 또 다른 여운도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꽃샘 추위라 해도 산골 산자락의 오후는 바람은 차지만 왠지 봄의 기운을 품은 따뜻한 공기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힙니다.

 

내일이 말날이어서 된장을 담근다고 아내가 밖에서 분주합니다.

아침에 된장을 담글 커다란 장독 2개를 깨끗이 씻고 헤어드라이어로 장독 속을 말려 뚜껑을 열어놓고 햇볕을 쐬게 하였습니다.

 

된장 담그는데 춥지 말라고 공방에 난로를 피워놓고 잠시 틈을 내어 컴퓨터 앞에 앉았습니다.

 

밖의 테라스 데크 위를 총총히 걷는 발소리가 쿵, , ... 저를 부르는 듯하여 좌불안석입니다.

아내의 호령이 떨어지기 전에 된장을 담근다며 분주히 움직이는 아내의 심부름을 하러 나가

봐야겠습니다. 저녁을 편하게 얻어먹으려면..........

 

새 봄에 새 희망으로 새로운 행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Kleine Traummusi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