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저 붉은 얼굴
이영춘
아이 하나 낳고 셋방을 살던 그 때
아침 해는 둥그렇게 떠 오르는데
출근하려고 막 골목길을 돌아 나오는데
뒤에서 야야! 야야!
아버지 목소리 들린다
“저어--너-- 한 삼 십 만 원 읎겠니?”
그 말 하려고 엊저녁에 딸네 집에 오신 아버지
밤 새 만석 같은 이 말, 그 한 마디 뱉지 못해
하얗게 몸을 뒤척이시다가
해 뜨는 골목길에서 붉은 얼굴 감추시고
천형처럼 무거운 그 말 뱉으셨을 텐데
철부지 초년 생, 그 딸
“아부지, 내가 뭔 돈이 있어요?!”
싹뚝 무 토막 자르듯 그 한 마디 뱉고 돌아섰던
녹 쓴 철대문 앞 골목길,
가난한 골목길의 그 길이만큼 내가 뱉은 그 말,
아버지 심장에 천 근 쇠못이 되었을 그 말,
오래오래 가슴 속 붉은 강물로 살아
아버지 무덤, 그 봉분까지 치닿고 있다
이영춘, 시인
출생1941년
출생지대한민국 강원 평창군
데뷔1976년 '월간 문학' 등단
중,고등학교 교사
경력한림정보산업대학 교양학과 강사
얼핏 우리네 생각엔 딸들은 어릴 적에나 나이가 먹어 늙어서나 어머니, 아버지께 참 살갑고 정이 뚝뚝 떨어지게 잘 해드릴 것 같은데, 이렇게 삶의 무게가 자신을 짓누르거나 또 나이 드신 부모님들이 거추장스럽게 여겨질 때에는 그저 늙어가는 내 앞길의 방해꾼으로 여겨지기도 하는 가 봅니다.
옛날 할미꽃 전설에서 보듯이 손녀가 제 할머니를 박대하여 결국은 객사를 하게 만든 손녀. 비록 딸은 아니지만 이 시를 대하면 왠지 할미꽃의 전설이 떠오릅니다.
무덤가에 정말 늙은 할머니의 흰 머리칼처럼 꽃과 잎과 줄기에 온통 흰털로 쌓여있는 할미꽃은 노란색의 꽃술을 가득담은 검붉은 꽃잎이 머리를 숙여 땅을 향한 모습은 마치 자식들에게 잘 해주지 못해 죄스러워하는 꼬부랑할머니를 연상케 해 공연히 슬퍼지고 눈물을 머금게 됩니다.
공들이고 정성들여 키운 손녀들이 성장하여 시집을 갔고, 할머니는 이제 더욱 늙어 살아갈 날이 얼머 남지 않아 보고픈 손녀들을 찾아갔지만 슬프게도 문적박대를 당하고 결국은 길가에서 이 세상을 하직하게 되는 할미꽃이 마치 내 할머니를 닮은 것처럼 아련하고 서글프게 느껴집니다.
이 세상 많은 딸들이 제 어머니에게 단지 엄마라는 이유로 함부로 대하고 또 단지 제 아버지라는 이유로 온갖 투정과 원망을 해대며 자신도 늙어지면 그 부모 또한 이제는 다시 보고 싶어도 못 보는 저 세상 사람으로 이별을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딸을 찾아간 아버지가 비록 돈 몇 푼 동냥을 한다 해도 저를 키워준 그 은혜에 천 만 분지 일에 견줄까마는, 결국 부모가 이 세상을 하직하고 난 후에야 후회를 하고 땅을 쳐 슬퍼한들 마음이 편할 리 없을테지요.
비록 이는 딸에게만 국한된 얘기는 아니겠지만 이 세상의 그 숱한 자식들이 제 부모에게 얼마나 감사하며 제 살을 떼어 부모님께 드릴 만큼 부모에게 희생을 할 수가 있을까요?
다시 한 번 ‘효도’에 관해 ‘부모님의 사랑’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게 됩니다.
아울러, 내 자신 자식에게 짐이 되거나 거추장스러운 존재가 되지 않고 혹여 죽은 후에라도 아이들에게 추호의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을 해봅니다.
O mio babbino ca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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