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일
김용택
날 저물면 산그늘 내려오듯
제 가슴에 서늘한 산 그림자 하나 생겨났습니다
그 그림자 나를 덮어오니
큰일입니다
당신을 향해 차차 데워지는 이 마음을
어찌하지 못합니다
큰일입니다
뜨거워서
날이 갈수록 뜨거워져서
내 몸이 델 것 같은데
인자 나는
정말로
큰일 났습니다
김용택 시인, 전 초등학교 교사
출생 1948년 9월 28일 (만 66세), 전북 임실군
학력 순창농림고등학교
데뷔 1982년 시 '섬진강'
수상 2012 제7회 윤동주 문학대상
2002 제11회 소충사선문화상
1997 제12회 소월시문학상
1986 제6회 김수영문학상
경력 2003 제4대 전북작가회 회장
2002 전북환경운동 공동의장
2002.03 덕치초등학교 교사
- 시노래 모임 '나팔꽃' 회장
출처: Daum
조병화 시인의 시를 젊은 시절 매우 공감을 가지고 천착하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사랑과 허무 그리고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과 사려 그리고 사람과 대중에 대한 애착과 애증 그리고 타인은 남남으로서 결국은 주고받을 것도 없지만 그것이 사랑하는 마음이던, 미움이던, 집착이던 또한 결코 소유하려고만 하지 않는 무욕의 마음으로 주거나 베풀거나 하는 내면의 마음은 버리지 않는 그의 시 세계를 중년이 넘어서도 그런 시인의 마음으로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한 참 후 어느 날 김용택 시인의 시를 접하게 된 것은 아마도 30년이 채 안된 것 같습니다.
물론 그의 시인으로서의 데뷔가 80년대 초반이니까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요.
지리산 자락과 위로는 옥정호 아래로는 남해 한려수도로 흘러가는 천혜의 자연경관을 간직한 곳에서 김용택 시인은 섬세하면서도 어쩌면 여성적인 감성으로 사랑을 노래하였지 않았나 생각을 해봅니다.
한 참 낚시에 몰두해 있을 젊은 시절 운암댐(옥정호)으로 낚시를 간 적이 있었지요.
운암댐의 댐공사가 완공이 안 된 시절, 강태공들에게는 서울에서 비록 1박 이상의 낚시행차였지만 물 반, 고기 반이라는 낚시회 총무의 말을 믿고 당시 여자 친구(?)와 그의 고교시절 은사와 한 팀을 이루어 함께 출조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낚시회 버스에서 내려 배를 타고 한 20여분 되는 거리에 낚시 포인트를 잡고 낚싯대를 몇 대 펴놓고 밤11씨 까지는 고른 씨알로 심심치 않게 붕어가 낚였지만 그 이후로는 낚시가 안 되어 등 뒤의 뚝에 기대어 하늘을 보니 여름 밤하늘은 그야말로 온통 별들의 잔치가 벌어졌었지요.
그 즈음에 발표되었던 김광섭 시인의 “저녁에”란 시가 절로 실타래 풀리듯 머릿속에서 흘러 나왔습니다.
저렇게 많은 별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서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서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그 당시 여름 밤낚시에는 요즈음처럼 낚시찌에 케미라이트를 달아맨다든가 배터리를 사용한 손전등을 사용하지 않고 “칸데라”라는 “카바이트 등”을 사용했었지요.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낚시하던 시절도 있었나.....?” 할 정도로 모든 분야에서 급변하는 환경이 눈부신 지금이지만 말입니다.
그 카바이트 등을 어둠이 내리는 저녁 호숫가에서 켜면 새벽 4~5시가 되면 칸데라의 가스불빛이 가물가물하여 또 카바이트를 보충을 하고 낚시를 하지 않으면, 잠깐 눈을 부치기도 했더랬습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그러한 “아나로그”적 낭만이 있는 호숫가에서 새벽이 되고 아침이 될 무렵 호면(湖面) 위로 가물거리는 물안개 피는 모습은 참으로 절경이라고도 할 수 있었습니다.
그 아물거리며 실루엣같은 이른 아침의 호숫가 풍경은 명품 사진으로도 훌륭한 한 컷이 되기도 합니다.
그 당시에는 경인, 경부고속도로만이 있던 때여서 토요일 오전 일과가 끝나면 낚시회의 전세버스를 타고 원거리 낚시를 다니던 때였습니다.
물론 80년대 초부터 자가용 붐이 서서히 일어나기는 했지만 60년대 후반과 70년대에는 낚시회버스를 이용한 출조(出釣)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 후, 등산인들도 동호회 전세버스를 이용한 산행이 일반화되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개인적인 출조 보다는 저렴한 비용에 피곤한 운전이라는 부담이 없기에 그 당시 자가용을 소유한 사람들도 낚시 출조시에는 낚시회 버스를 많이 이용했었더랬습니다.
이야기가 잠시 다른 곳으로 흘러갔습니다.
해서 이러한 아나로그적 당시의 낚시 풍경이 아마도 사랑의 모습에도 같지 않았나 싶습니다.
지금처럼 메마른 디지털 시대에서 그 당시의 사람냄새 나는 사랑의 시대가 참으로 그립기도 합니다.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와 같은 시는 그가 아마도 초등학교 교사이기 때문에 동심의 순수한 마음과 깨끗한 영혼이 자연과 세상 사람들의 아름다운 마음들을 그저 얘기하듯이 자연스럽게 펼쳐지는 것이어서, 그의 그러한 마음을 담은 시들이 대중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라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사랑이라는 것, 참으로 설레고 열정을 불러일으키며 때로는 눈먼 장님이 되고 벅찬 감정이 전혀 다른 사람의 마음으로 변하게 하는 가 봅니다.
이순 그리고 고희를 지난 사람이라면 소위 386세대들이 “수구꼴통”이니 “송장”이니 호로자식들처럼 막말로 비난을 하곤 하지만, 육, 칠십 년대의 그 고난한 국가적 상황과 가난에서도 당시의 대통령과 한 마음으로 모든 국민이 국가 재건 및 중흥에 온 마음과 몸을 다하여 이 나라의 초석이 되어 온 몸을 불살랐다고 자부를 합니다.
그 와중에서도 낭만이 있고 사람냄새 나는 인간미들이 온 세상에 잔잔하게 깔려있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지금에서 보자면 참으로 촌스럽고 세련되지 못한 사랑의 언어들과 그 모습들이 지금의 젊은이들이나 중장년층의 시각에서 보자면, 옛날 영화관의 필름이 돌아가면 스크린에 비가 오듯 삼류 극장영화를 보는 것처럼 별 감흥은 없겠지만, 그 당시의 사랑은 애틋하고, 마음 조리며, 또 서로를 삼가며 존중하는 마음으로 가슴의 정렬을 진정시키는 사랑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일전에 우연히 어느 방송 TV에서 사랑엔 나이가 없고 남녀노소가 없다는 결론이 맺어지는 토크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습니다.
비록 나이가 60대 이상으로 늙었지만 이성과 사랑을 하고 싶다는 마음은 남, 녀의 구분이 없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프로그램이었지요.
물론 그 패널들이 이 세상의 60이상의 신 중년들을 대표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정말 사랑에 나이가 어디 있겠고 남, 녀 구분이 있겠습니까?
옛날엔 의례히 남성이 먼저 데이트 신청을 하고 모든 데이트 경비는 남성이 모두 부담하고 또 사랑의 고백도 남자가 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지만 요즈음은 그렇지가 않은 가 봅니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도 높아졌고 남성에 의지하지 않고 여성 혼자 자립할 경제적, 사회적 여건이 되어 있어서 그런지 지금은 여성이 그리 수동적이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젊은이들의 사랑도 옛처럼 대체로 순수하고 낭만적이며 아름다움을 느끼는 그런 사랑인지 궁금할 때가 있습니다.
아! 사랑이란 아름다운 기회가 된다면 비록 늙은이지만 기다려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우리에게도 “큰일입니다. 당신을 향해 차차 데워지는 이 마음을 어찌하지 못합니다”라고 말 할 날이 올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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