同樂茶軒-문화와 예술/詩가 있는 뜨락

귀촌일기 7- 간이역 풍경/ 박건한

sosoart 2016. 4. 23. 00:05




귀촌일기 7

- 간이역 풍경

 

                박건한

 

오르는 이

내리는 이

없는

 

보내는 이

맞이할 이

없는

 

가을 볕 속 시골 간이역

저 홀로 한들거리는 코스모스

좀 보게

 

손 흔드는지

몸 전체로

잉크 빛 하늘 한 자락

쓸어 담듯 비질하고

 

흰 구름 두어 송이

머언 기적 소리만

머금고 사라져 가고

 

!

이제는 열차마저

서지 않는

시골 간이역

 

      

박건한 시인

1942. 9. 10 전남 해남 출생

해남초등학교 제43회 졸업

해남중학교, 목포사범학교 졸업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한양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한등학교 교사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사무처 근무, 계간지 <예술계> 편집

도서출판 동화출판공사 편집부 근무(20년 근속)

- <세계의 문학대전집> <한국단편문학전집> <한국의 사상대전집> <한국미술전집> <민족문 학대계> <그림나라 100> <한국사선서> 전집 외 단행본 등 편집

문예지 <문학>지 신인작품 당선(심사위원 박목월, 박남수 시인)으로 문단 진출

시 동인지 <七十年代> 창간 동인(1969)

시집 <우리나라 사과> 간행 (1977)

정병규 출판디자인 근무

도서출판 문학수첩 편집위원

아트 스페이스 코리아비상임 편집 고문

도서출판 시월편집주간(20052~현재)

 

현재 사라진 활판인쇄시설을 복원한 출판도시 활판공방에서 한정판 활판시 선집 간행중

한국문인협회, 한국시인협회, 국제펜클럽한국본부 회원

 

 

 

!/ 이제는 열차마저/ 서지 않는/ 시골 간이역......

 

박건한 시인의 시처럼 어쩌면 늙어가는 모든 인생과도 같은 것이 시골의 간이역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젊은 시절과 한창 인생이 무르익어가는 중년시절 누구나 자기 생에서의 화려한 흔적을 만들며, 나름 최선을 다하며 열심히 살아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시골의 산촌에서 초라한 은둔의 생활을 하며 오프라인에서의 사람과의 관계는 멀리 두고 있는 저로서는, 더구나 고희를 넘긴 아무도 늙어가는 사람에게 찰나의 눈길도, 귀도 기울여 주지 않는, 사람 사는 세상의 인생퇴물에게는 아마도 딱 맞는 표현이 시골 간이역같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나이든 사람들이 다 그렇다는 것은 절대 아니니 오해는 하지 말아 주십시오.

일반적으로 지금 흘러가는 세태의 정이 그렇다고 느끼는 것은 저 혼자만의 일인지도 모를 일이니까요.

 

고희古稀라는 말은 두보의 人生七十古來稀에서 나온 말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말이지만, 이제는 백수白壽한다는 말을 당연히 여기고 있는 장수의 시대가 눈앞에 와있기는 하지만 불과 30년 전만 해도 인생을 칠십대에 마감을 해도 그리 놀라지 않았던 시절이었건만....

 

조회가 끝나면 날마다 봄옷을 잡혀

매일같이 강가에서 만취해 돌아오네

술빚이야 가는 곳마다 늘 있는 것이지만

인생 칠십은 예로부터 드물었다네

꽃 사이로 나비 분분히 날아들고

잠자리는 물 위를 여유롭게 나는구나

듣자니 좋은 경치는 함께 다녀야 한다고

잠시라도 서로 즐겨 어긋남이 없자꾸나

 

朝回日日典春衣

每日江頭盡醉歸

酒債尋常行處有

人生七十古來稀

穿花蛺蝶深深見

點水蜻蜓款款飛

傳語風光共流轉

暫時相賞莫相違

 

두보(杜甫) 곡강이수(曲江二首)중 두 번째 시

출처: 고사성어대사전

 

이제는 시골의 간이역이 그렇게 낭만적이지만은 않게 느껴지는 것이 나이를 먹어가는 탓인지, 초라한 산촌의 촌노村老에 지나지 않는 자신의 모습에 순응하는 것 같아서 씁쓸하기도 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더욱 활기차고 건강하게 생활을 해나가야 몸도 마음도 활력이 있고 또 나아가서는 자식들과 주변사람들에게 누를 끼치지 않을까? 싶어 의도적으로라도 노력을 하는 것을 즐거움이라 생각하며 살아가고자 노력을 하게 됩니다.

 

약 한 달 전 외손주 얼굴을 보러 서울에 올라가는 길에 그만 교통사고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남양주시 인가? 구리시 인가? 잘은 모르겠지만 갈매교차로 라는 곳을 회전하고 직전 하다가 신호가 바뀌어 정지를 하고 있는데 별안간 뒤에서 오던 트럭이 쾅하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저의 차를 추돌하였습니다.

젊은 친구였는데 정신을 어디에 두고 운전을 하였는지? 아니면 신호가 바뀌었는데도 무리하게 통과하려다가 저의 차를 받는 사고를 낸 것입니다.

 

몇 년 전에도 이와 비슷한 사고가 났었는데, 그래도 그때의 젊은 운전자는 죄송하다고 머리를 조아리고 사과를 했지만, 이번 젊은 운전자는 안색도 변하지 않고 사과는커녕 미안한 얼굴도 아니었습니다.

 

이런 막가는 친구에게 무엇을 기대할까마는 아무튼 세상 참 너무 못되게 변해가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아내와 저는 그 사고 이후로 머리와 허리 그리고 온 몸이 골병이 들어 재활의학과, 신경과, 정신과 등의 치료를 받고 있는데도 별로 호전이 되지 않고 있어 걱정입니다.

사람이 늙어서는 조그만 충격에도 큰 데미지를 입게 마련인가 봅니다.

아내는 치료를 받고 있는 지금까지의 한 달 사이에 신체적, 정신적 충격으로 새벽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심장이 멎는 듯하고 머리가 깨지는 듯 아프다고, 마치 죽는 것 같다고 호소하여 대학병원 응급실을 수차례 드나들고 지금도 골병의 치료는 물론 외상후증후군이라는 병으로 정신과적 치료도 병행을 하고 있습니다.

 

몇 차례 아내가 그런 상태를 반복하니 상대적으로 덜 다친 저로서는 혹시 아내가 잘못되면 어떻게 하나?” 이런 걱정 때문에 밤잠을 잘 이루지 못하고 가끔 가슴이 벌렁벌렁하고 공포감이 엄습하여 수면유도제를 복용하면서 교통사고로 인한 치료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아내가 잘못되면 어떻게 하나?” 생각을 하면 참으로 아무런 생각이 없이 그저 머리가 하얗게 변해버리는 것 같습니다.

 

30년 전에도 한 번 그런 일이 있었는데, 그 때는 아내가 몸이 좋지 않아 종합병원의 간전문의에게 진료를 받았는데, 의사가 오진을 하고 아내가 간암일 확률이 높다고 해서 아내에게 말은 못하고 아내의 옆에서 잠을 이루지 못하며 아내 몰래 눈물을 흘린 적이 몇 날 며칠이었는지 모릅니다.

연구기관이라는 맑은 공직에 근무하면서 무슨 돈이 있겠습니까마는 아내가 얼마 살지 못한다는 생각에 못난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 헌신만 했던 아내에게 마지막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저에게는 비싸다고는 하지만 죽어갈지도 모른다는 아내에게 밍크 반코트를 선물하기도 하고 아낌없이 모든 것을 해주고 싶었습니다.

 

아내는 자신이 암 선고를 받았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을 하지 못하고 그저 간이 나빠 치료를 받으면 되는 것으로 생각을 했으니, 평소에는 하지 않던 행동을 하며 무리하게 돈을 낭비하는 남편에게 당연히 마다했었지만 그때는 아내에게 못해주었던 것을 단 하나 만이라도 더 해주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또 한의사인 큰동서의 친구에게 특별히 부탁하여 치료에 좋은 치료제와 보약을 짓고 복용하도록 하였는데, 그것이 또한 알고 보니 더욱 병세를 악화시키기도 했던 모양이었습니다.

 

간의 건강에 한약은 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 무지로 인해 아내를 더욱 힘들게 했던 것이었습니다.

 

결국은 몇 달의 치료로 거의 회복이 되었고, 간암 판정은 오진으로 판명이 되었지만, 의사들의 어이없는 진단이 환자에게는 죽음과도 같다는 것을 의사들은 아는지 모르겠습니다.

 

환자가족으로서의 생각은 설사 환자가 불치의 암환자라 할지라도 환자에게 절망 보다는 힘을 줄 수 있는 말 한마디가 치료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를 절실히 느낀 계기가 되었습니다.

 

혹여 불치병이나 난치병으로 진단을 받았다면 반드시 한 두 사람의 의사에게 진료를 받아보는 것이 확실한 진단을 위하여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야기가 잠시 초점이 흐려져 다른 곳으로 흐르고 말았습니다.

 

박건한 시인은 전에도 말한 적이 있지만 목포에서 경기도 파주까지 매일을 출퇴근 하다시피 하던 분이었습니다. 지금은 주 1회 정도 출퇴근을 하신다고 하지만 어쨌던 노익장을 과시하는 건강에 찬사를 보내고 싶습니다.

 

 

근 황近況

                      박건한

 

아내가 세상을 버린 후

요즈음 나는 안방에

남도 고향의 뒷산을 아예 들어앉혀 놓고 산다.

그리고 어느 날은 그 산 한 자락을

돌돌 말아 베고 눕기도 하고,

어느 날은 양지 바른 산언덕에

머리 처박고 으으으으 으으으으

울부짖기도 하고,

어느 날은 산골짝을 쓸어 가는 바람소리, 물소리에

비로소 나를 띄워 버리기도 하면서...

아내가 세상을 버린 후

요즈음 나는 또

고집을 부려서라도

건넌방 작은방에는

고향 뒷산 위를 지나는 흰 구름들을 덩이째로

가둬 놓고 산다.

 

 

오랜 동안 희로애락을 같이하면서 살아온 오직 내편, 사랑한다 말은 안했지만 세상 누구보다 사랑하고 소중한 아내를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낸 사람의 마음은 정말 어떻겠습니까? 이루 말 할 수가 없음은 당연한 일이겠지요.

 

아무도 그야말로 아무도 없는 자식들이 있다 해도 나의 아내만 같을 수 없고- 너무나 크고 빈 자리, 마음의 공허함과 슬픔을 채워 줄 수 있기나 하겠습니까? 고아 아닌 영원한 혼자.

벽을 보고 때로는 천정을 보고 눈물을 머금어보아도 영원히 나의 곁에서 떠난 그 아내를 누가 대신 할 수 있을지....?

깊은 밤 잠 못이루고 자리에 누워 벼개를 흥건히 적셔도 아내에 대한 그리움과 회한만이 하염없이 커져 갈 터인데.....

 

그러한 시인의 마음을 짐작할 것 같습니다만 그 정도가 무릎 정도에도 미치지 못하겠지요.

그렇지만 박건한 시인님을 비롯한 모든 아내를 자신보다 일찍 보낸 모든 이들에게 상실과 회한 그리고 허탈의 슬픔을 극복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자중자애의 마음을 유지하며 활력있게 살아가시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입니다.

 

때론 제주의 올레길이나 지리산의 둘레길 아니면 근처의 숲길과 들길을 걸으며 아내를 생각하며 대화하듯 길을 걷는 시간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

 

나이를 먹어가니 이 세상의 모든 슬픈 사람들, 마음이 아픈 사람들, 어떤 고통에 빠져있는 모든 이들에게 응원을 보내는 마음이 됩니다.

 

더구나 모든 것을 멀리하고 산촌에 들어와 초라한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또 내려놓을 것도, 버릴 것도 없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인생이지만 저 세상으로 소풍을 떠날 때 그저 마음 편하게 가는 것이 큰 바램이기도 합니다.

 

여유롭게 가진 것이 있다면 모든 아프고 고통에 빠져있는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나누어 주고 마음을 보태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만 나누어 줄 것은 그저 맑은 마음 하나뿐이어서 세상을 헛살아왔다는 후회만이 가득할 뿐입니다. 나무관세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