同樂茶軒-문화와 예술/詩가 있는 뜨락

부재중 전화/ 오탁번

sosoart 2015. 11. 3. 22:09



부재중 전화

 

                                   오탁번

 

아치에 일어나 핸드폰을 열자

간밤에 온 부재중 전화가 뜬다

발신자는 권오문이다

오호 嗚呼,

여든두 살 영철 형님이 그에 떠났구나!

 

원주중학교 입학금을 대준

영희 누나의 오빠,

영철 형님의 맏아들 오문이가

병원 영안실에서 건

부음 訃音 전화가 분명하다!

깜작 놀라 바로 전화할까 하다가

한 순간, 멈칫한다

 

어쩐다? 어쩐다?

매일 붓방아만 찧다가

오늘 꼭 밀린 원고 끝내려고 했는데

이 일을 어쩐다?

10, 적막이 흘러간다

-어쩌긴, , 어째? 이 새끼야!

원주중학교 1학년짜리가

다 늙은 나에게 소리친다

오문이에게 급히 전화한다

-언제 서울 오세요?

아저씨랑 술 한잔 하고 싶어요

 

아무도 모르게 흘러간

적막의 10분 동안,

나는 정년 무엇이었을까

사람되라고 중학교 보내준

그 옛날의 형님 앞에서!

보신탕에도 못 낄

비루먹은 개새끼 아니었을까

 

그리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지금까지 살아온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이러한 경우라든지 또 비슷한 경우를 겪어보지 않은 동년배들이 적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주 조그마한 나의 이기(利己)를 위하여 인간의 도리 아니면 인간이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모른 척 지나가려했다든지, 애써 외면하려 했던 적이 한 두 번은 있었음 직 합니다.

 

그것이 자신의 이해득실을 따져가며 주판알을 튀기듯 얍삽한 마음은 아니었을 지라도 왠지 그저 귀찮다든지, 왠지 안 내킨다는 순간적 잘 못된 판단에 의해 정말 찌질하고 못난 행동이 평생 자신을 못난 놈으로 낙인찍고 후회하며 몰아가게 되어 진정 스스로 자신을 비루먹은 개새끼처럼 만들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을 때 나는 얼마나 슬프고 허허로운지 모를 일입니다.

 

그래도 오탁번 시인은 솔직하고 용기 있는 시인이자 생활인이 아닐까요?

그의 시를 읽으면 그의 언어와 생각에 동조하고 동일인이 되듯 일체감을 느끼며, 시라는 것은 이런 것이어야 되지 않나.....? 이런 생각을 합니다.

 

시라는 것이 어려운 말로 제 생각만을 나열하고 자기는 독야청청 저 위 높은 곳에서 독자를 내려다보듯 가르치듯 하는 시어(詩語)를 구사하며, 무엇을 지껄이는지 자신도 모르는 이야기를 씨부려대는 사이비 시인들도 참 적지 않습니다.

 

자신의 주변 이야기를 이야기하듯 물 흐르듯 예사로이 전하는 오탁번 시인.

시라는 것이 정말 무엇일까?

나이를 먹다보니, 시라는 것이 무에 별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 젊었던 시절, 대학생이나 소위 인테리라 인정받고 싶어 하는 젊은이들은 Time, Newsweek지를 옆구리에 끼고 다니거나, 두터운 원서 또는 시집들을 보란 듯이 가지고 다녔던 웃지 못할 옛 젊은이들의 초상들이 떠오릅니다.

지나고 보니, 그래도 그 때의 그 젊은 남녀들이 얼마나 인간적이고 또 순정적이었으며, 문화와 예술을 사랑했었던 풍부한 정서의 소유자가 아니었을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지금의 젊은이들은 정서와 휴매니티가 너무 메마르지 않았는가? 걱정도 됩니다.

 

평소에 김흥수 화백의 기록을 깨려고 맘먹었다

40년 연하의 여제자와 신방을 차린 것!

..................

.................. 중략

 

아뿔싸!

20101227() 외신들이 전하는

뉴스 한 토막!

Playboy Hugh finds new playgirl!

플레이보이 창업주 휴 해프너(84)

60년 연하의

크리스털 해리스(24)와 약혼을 했다는 뉴스가

내 뒤통수를 때린다

 

신기록을 세우려면 최소 61년 연하의

아리따운 소녀를 점찍어야 한다!

그럼 올해 그 아이는 겨우 일곱 살!

초등학교에 갓 들어갈 나이?

굼뜬 동작에다 때는 일락서산,

죽도 밥도 안 된

내 인생아!“

 

오탁번 시인의 아뿔싸!”란 시 입니다.

 

시인이 김흥수 화백이나 휴 해프너가 부러워서 였을까요?

오탁번 시인 특유의 페이소스나 역설적인 표현을 엿볼 수 있는 시라 여겨집니다.

 

어느덧 가을은 저 산의 빨간 단풍잎을 넘어 지나가 버리고 산촌의 겨울은 이미 나의 앞마당에 그 한 발짝을 딛고 있습니다.

강원도의 겨울은 빠르게 오고, 빚쟁이처럼 제일 느리게 걸어갑니다.

 

이제 옷깃을 여미고 이미 찾아온 겨울과 친해지는 연습을 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