同樂茶軒-문화와 예술/詩가 있는 뜨락

정보화 사회의 현대시 /김용오

sosoart 2015. 5. 31. 17:27
정보화 사회의 현대시

(1)

일반적으로 정보가 자원이 되고 그 정보의 처리 가공에 의한 가치의 생성을 중심으로 사회나 경제가 발전하여 가는 것을 사전적 의미로서의 정보화사회라고

▲ 김용오 시인
부르고 있습니다. 그 속에는 반드시 정보+기술이라는 등식이 자리 잡고 있으며 데오도르 넬슨이 "꿈의 기계"라고 말한 컴퓨터가 나무뿌리 같은 기능으로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음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미 오래전에 가장 대중적인 인물이며 인류의 미래학자로 불리는 앨빈토플러가 앞으로 닥쳐올 정보 사회화의 물결을 예언적으로 설파한 바가 있고 그에 앞서 이론가로서의 미래학의 초석을 다진 다니엘 벨도 70년대부터 『탈산업사회의 도래』『'정보화 사회』라는 저서를 내놓고는 컴퓨터와 커뮤니케이션이 결합된 [컴퓨니케이션]을 말하고 정보가 곧 권력의 핵심임을 강조한 적도 있습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21C 현대를 칭하여 디지털시대 또는 디지틸사회라고 이야기 하는 것도 그 정보의 기반인 디지털이 단순한 전자기술이 아니고 우리의 미래를 창조하는 엄청난 힘의 원동력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생활 기반이 디지털화 되고 있으며 디지털 사고, 디지털 마인드, 디지틸 지문이라는 새로운 개념까지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원래 디지틸이라는 말은 당초 아날로그와 대비되는 용어로 출발을 했지만 사회전반에 미치는 그 기술적 영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지대해서 최근에는 디지털 혁명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결국 21C 화두로서 정보통신 혁명, 인터넷 혁명, 지식 혁명 등으로 불리는 것은 디지털 정보와 지식이 인터넷이라는 쌍방향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에 의해 대량으로 신속하게 전달됨으로써 인터넷이 인류의 새로운 부의 원천이 될 것이고 세계가 하나의 지구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더욱 시급한 것은 디지털시대로 인한 우리 사회 구조와 사고방식 더 나아가 정신문화까지 디지털사회에 맞게 바꿔가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를테면 그동안 아날로그 사회에서 통하던 위계질서와 권위의식이라는 관습을 거부하는 대신 토론과 논쟁창조적인 파괴를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컴퓨터 기계문명으로 인해 인간의 사유까지 수직사고에서 수평사고로 전환해야 하는 고도 정보사회에서의 문학 상품 즉 자본적 가치와 흥미로서는 그리 달갑게 환영 받지 못하는 현대시가 과연 어떤 존재방식으로 미래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며 어떤 내용과 형식을 가지게 될 것인지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는 소중한 시간이 되 었으면 합니다. 

 

(2)

정보화 사회란 결국 대중사회로의 발 빠른 변화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는 고유한 자신의 형태를 쉽게 바꾸거나 대중의 요구에 줏대 없이 몸을 허락하는 문학장르는 아닙니다. 그러다 보니 차츰 차츰 대중들의 관심과 시선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고 마치 생산자와 소비자가 따로놀고 있는 단절된 모습을 보이고는 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지난날에 비해 시의 생산량은 오히려 더 늘어나는 이율배반적인 형국에 와 있습니다. 다시 말해 기계문명의 변화에는 숫제 관심이 없다는 듯이 주제나 소재 또는 시적 기교면에서 더욱 다양하고 다원화된 모습을 한 채 다가온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저는 이따금 오해의 소지가 있을 줄을 알면서도 한국 현대시의 전체적인 상황을 알기 위해서랄까, 매년 매월 매일 끊임없이 발표되는 많은 시 작품들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수평선 위에 나란히 분리해서 놓아두고는 시적 가치 판단을 잠시 유보한 채 그량 바라볼 때가 있습니다. 

(#.1) 
어려운 시                                     좋은 시                                         쉬운 시

(#.2)
머리로 쓴 시                               온 몸으로 쓴 시                           가슴으로 쓴 시

역시 정보화 사회의 디지털 핵심은 단절이 아닌 쌍방 형 소통에 있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1은 발화자와 수신자의 소통을 전제로 한 것이고 #.2는 시가 태어난 근원이나 탄생을 배경으로 해석하여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다시 한 번 어려운 시를 머리로 쓴 시, 좋은 시를 온몸으로 쓴 시로, 쉬운 시를 가슴으로 쓴 시로 묶어도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아마 아직까지는 인터넷상에 떠도는 시라고 하면 가슴으로 쓴 쉬운 시 정도 뿐이겠지만 앞으로는 적어도 온 몸으로 쓴 시의 범주에 속하는 좋은 시들이 인터넷을 가득 메울 수 있도록 쌍방향 소통에 대한 시적 연구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터넷은 통신수단이지 창조수단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어느 시대에나 정신적 깊이와 예술성을 제공하는 진원지로서의 본격문학인 난해 시까지 없어져도 좋다는 이야기는 결코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현실적으로 나타나 있으며 잡힐 듯 분명한 한 가지 사실은 문자 매체를 존재의 근거로 삼고 있는 시로서는 무슨 방법으로든 이제 피할수 없는 불리한 조건에 놓여 있다는 것이며 그 또한 불행하게도 우리가 살고 있는 정보화사회의 시대적 요구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3)

오랜 세월을 우리 민족과 함께 해온 불교 사상에 체용의 논리가 있습니다. 즉 몸과 몸짓의 세계를 담론화 하고 있는 것인데 그 체용 사상을 현대시에 접목해 한 번쯤 변화를 시도하여 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시라는 몸(언어)은 그대로 계속 고수하면서 밖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방법으로서의 몸짓(표현. 형식)에는 이 정보화사회에 맞는 다양한 의상을 갈아 입혀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입니다. 예를 들어 미술이 비디오 아트를, 음악이 전자 음악을, 영화가 애니메이션으로의 변신을 시도하듯 새로운 현대시의 모던한 몸짓을 보여주면 어떨까 하는 것입니다. 

이미 세계적인 추세이기도 하고 여러 해 전부터 행하여지고 있는 것으로는 [공익 광고에 시구 인용하기] [시낭송에 의한 심리 치료] [멀티 포엠] [시네포엠] [디카 시] [하이퍼텍스트] [북 텔러] [시적 포퍼먼스] [TV를 통한 시낭송] 등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로저 하우스덴이 전하는 새로운 공연 시 사례 한 가지만은 그의 말을 그대로 옮겨서 보여 드릴까 합니다. 

"그러나 시는 예나 지금이나 생생하게 살아 숨 쉰다. 갈수록 더 많은 시 축제와 낭독회가 열리고 있으며 더 많은 사람들이 시를 쓰고 있다. 뉴저지 원터루에서 2년마다 열리는 시 축제에서는 1만 2000명의 인원이 열광적으로 참여한다. 완전히 새로운 포이트리 슬램도 열린다. 포이트리 슬램은 젊은이들이 무대에 올라가 약 30분 동안 직접 지은 시를 랩으로 읊는 행사다. 시인들이 공연을 하면 관객 중에서 뽑혀 나온 심사위원들이 점수를 매기고 우승자를 뽑는다. 포이트리 슬램은 공연예술의 형태를 띤 관객이 참여하는 흥겨운 시낭송회다. 소재도 놀라울 정도로 다양하다. 이 특별한 행사는 어마어마한 수의 새로운 관객들을 시의 세계로 끌어 들이고 있다."

위의 인용문을 읽고 있으면 그동안 정보화시대의 시적 위기에 대하여 가끔씩 몰래 생각해 온 사람들까지 새삼 부끄럽게 만들 정도로 고무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언제인가 미국의 계관시인인 리타 더브 교수도 한국에 와서 "이제 시인은 보통 사람들의 거리로 언어를 몰고 나가자"며 시의 대중화 필요성을 역설하고 돌아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처지에서 보면 아직은 원고지 세대와 모니터 세대, 수직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아날로그 세대와 수평사고를 선호하는 디지털 세대가 함께 혼재하고 있기 때문에 혹자는 시의 몸짓 논리에 대해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고 시의 퇴보나 시의 타락으로 폄하 할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인 저의 입장에서는 어디까지나 다양한 시의 발전이나 진화라고 믿고 싶습니다. 물론 시도 때도 없이 숱하게 쏟아져 나오는 문학잡지들과 너도 나도 시인이라는 명함을 들고 다니는 꼴을 보고는 오히려 시인으로 사는 것이 부끄럽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자기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저 시는 엉터리다 저 시는 쓰레기다 하면서 문학적 패륜행위로 여기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들 역시 우리가 다 함께 껴안고 가야할 시의 동업자요 언어의 피를 나눈 형제자매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그들에게 어떤 힘을 실어주자는 것도 아니고 전통적인 시 미학까지 부정하자는 것은 더욱아닙니다. 다만 상업적 인쇄문화의 발달과 정보화 사회가 낳은 저급한 문화 또 다른 형태의 하수도적 현상으로 받아들이자는 것이고 시사적 의미에서 보면 먼 훗날 그들도 일종의 시적 토양으로 충분히 자리매김 할 수 있다고 인식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어떤 면에서 보면 우리들이 안고 있는 질서와 혼돈이 서로의 반면적인 거울 역할을 톡톡히 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누구라고 딱히 지칭해서 말 할 것도 없이 우리 모두 다 함께 한 번쯤은 지적 허영이나 오만 아니면 구린내 나는 위선에서 벗어나 정직한 시선으로 시적 자아의 내면을 투명하게 들여다보며 어떤 것이 진정 현대시에 도움이 될 것인지를 심도 있게 성찰해 보았으면 합니다. 즉 예술을 위한 예술 그 많지 않은 소수도 존중하면서 정보화 사회의 더 많은 다수에게 필요한 시가 무엇인지 지금 즉시 무엇부터 시급히 바꿔가야 할 핵심인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끝으로 이제까지 오랜 시간 많은 이야기를 두서없이 한 것은 당장 하나의 어떤 결론을 도출하기 위한 몸짓은 아니었으며 다만 나름대로의 어떤 문제 제기에 지나지 않았음을 이 글의 마지막 말로 남길까합니다. 감사합니다.

■ 김용오
시인. 한국현대시인협회 부이사장

[격월간《좋은문학》2007년 9/10월호 수록]

 

 

출처: http://cafe.daum.net/tldlemf/mNTz/30?q=%B1%E8%BF%EB%BF%C0%BD%C3%C0%CE&r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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