同樂茶軒-문화와 예술/詩가 있는 뜨락

사 모(思慕)/ 조지훈

sosoart 2017. 2. 5. 23:32






사 모(思慕)
                                    조지훈

사랑을 다해 사랑하였노라고
정작 할 말이 남아 있었음을 알았을 때
당신은 이미 남의 사람이 되어 있었다.

불러야 할 뜨거운 노래를 가슴으로 죽이며
당신은 멀리로 잃어지고 있었다.

하마 곱스런 눈웃음이 사라지기전
두고두고 아름다운 여인으로 잊어 달라지만
남자에게서 여자란 기쁨 아니면 슬픔
 
다섯 손가락 끝을 잘라 핏물 오선을 그어
혼자라도 외롭지 않을 밤에 울어 보리라.
울어서 멍든 눈흘김으로
미워서 미워지도록 사랑하리라.
 
한 잔은 떠나버린 너를 위하여
또 한 잔은 너와의 영원한 사랑을 위하여
그리고 또 한 잔은 이미 초라해진 나를 위하여
마지막 한 잔은  미리 알고 정하신 하느님을 위하여


조지훈


생몰년: 1920. 12. 3~1968. 5. 17
경력: 고려대학교 교수,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초대 소장
직업: 시인, 국문학자
대표작: 고풍의상, 승무, 봉황수, 청록집, 풀잎단장
<개설>
본관은 한양(漢陽). 본명은 조동탁(趙東卓). 경상북도 영양(英陽) 출신. 아버지는 조헌영(趙憲泳)이며, 어머니는 전주 류씨(全州柳氏)이다. 4남매 중 둘째 아들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어렸을 때 할아버지로부터 한학을 배운 뒤 보통학교 3년을 수학하고 1941년 21세에 혜화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였다. 이에 앞서 20세에 안동 출신의 김난희(金蘭姬)와 혼인하였다. 1941년 오대산 월정사에서 불교전문강원 강사를 지냈고, 불경과 당시(唐詩)를 탐독하였다. 1942년에 조선어학회 『큰사전』 편찬위원이 되었으며, 1946년에 전국문필가협회와 청년문학가협회에 가입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1947년부터 고려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고, 6·25전쟁 때는 종군작가로 활약한 경력이 있다. 만년에는 시작(詩作)보다는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초대 소장으로 『한국문화사대계(韓國文化史大系)』를 기획, 이 사업을 추진하였다.
작품 활동은 1939년 4월『문장(文章)』지에 시 「고풍의상(古風衣裳)」이 추천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어 1939년 11월「승무(僧舞)」, 1940년에 「봉황수(鳳凰愁)」를 발표함으로써 추천이 완료되었다. 이 추천 작품들은 한국의 역사적 연면성(連綿性)을 의식하고 고전적인 미의 세계를 찬양한 내용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고풍의상」에서는 전아한 한국의 여인상을 표현하였고, 「승무」에서는 승무의 동작과 분위기가 융합된 고전적인 경지를 노래하였다.
「봉황수」에서는 주권 상실의 슬픔과 민족의 역사적 연속성이 중단됨을 고지(告知)시키고 있다. 조지훈의 작품 경향은 『청록집(靑鹿集)』(1946)·『풀잎단장(斷章)』(1952)·『조지훈시선(趙芝薰詩選)』(1956)의 작품들과 『역사앞에서』(1957)의 작품들로 대별된다.
박목월(朴木月)·박두진(朴斗鎭)과 더불어 공동으로 간행한 『청록집』의 시편들에서는 주로 민족의 역사적 맥락과 고전적인 전아한 미의 세계에 대한 찬양과 아울러 ‘선취(禪趣)’의 세계를 노래하였다. 「고사(古寺) 1」·「고사 2」·「낙화(落花)」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들 시편에 담긴 불교적 인간 의식은 사상적으로 심화되지 않았으나, 유교적 도덕주의의 격조 높은 자연 인식 및 삶의 융합을 보인다는 점에서 시문학사적 의의가 있다고 평가받고 있다. 또한, 『풀잎단장』과 『조지훈시선』은 『청록집』에서 보인 전통지향적 시세계를 심화시켰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역사앞에서』는 일대 시적 전환을 보이고 있는데, 종래의 『청록집』 등에서 나타난 시세계와는 달리 현실에 대응하는 시편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광복 당시의 격심한 사상적 분열 현상과 국토의 양분화 현실 및 6·25전쟁이라는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의 분노를 표현한 작품으로는 「역사앞에서」·「다부원(多富院)에서」·「패강무정(浿江無情)」 들이 있다.
특히, 「다부원에서」는 전쟁의 참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시로서 동족상잔의 비극적 국면이 절실하게 나타나 있다. 기타 저서로는 시집 『여운(餘韻)』(1964)과 수상록 『창에 기대어』(1956), 시론집 『시의 원리』(1959), 수필집 『시와 인생』(1959), 번역서 『채근담(菜根譚)』(1959) 등이 있다.


전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 오랜만에 들어와 봅니다.  그간 이런저런 일들로 인해 일상의 틀에서 빗겨난 고난스런 일들의 거친 물살에 휘말려 혼미한 정신으로 헤매다가, 그것도 일상이 되어버려 이제는 나름대로 이것도 다 나의 업보業報려니 하고 이제는 내치지 않고 동무하며 가기로 했습니다.

늪에 떨어지면 빠져나오려고 허둥거리다가 드디어는 늪의 바닥으로 떨어져버리는 것보다는 더 나빠지지 않기 위해 모든 고통도 친구처럼 같이 가기로 하니 그나마 마음이 다스려지고 보살의 마음으로 귀의 歸依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벌써 작년 가을 쯤 이었나 싶군요. 
제주의 올레길을 더 걸어 보려고 힘들어하는 아내의 양해 하에  집에 두고 혼자 제주도로 향했습니다.  남들처럼 올레길 완주를 위해 간 것도 아니었고, 남들이 모두 다 가는 올레길 보다는 제주 지질 트레일 길을 걷기 위해 여행길을 나섰다고 하는 것이 정확한 것이기도 합니다.
제주 지질트레일이란 유네스코에 제주 지질공원으로 지정된 곳을 걸으며 그 지역을 더욱 더 알고자하는 것으로 제주 올레길과 함께 외지인이 제주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지질공원이란 과학적 중요성, 희귀성, 아름다움을 지닌 지질 현장으로서 지질학적 중요성뿐만 아니라 생태학적, 고고학적, 역사적, 문화적 가치도 함께 지니고 있는 지역으로 보전, 교육 및 관광을 통하여 지역경제의 발전을 도모하고자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올레길이 제주를 알리고 또한 외지인이 제주에 오도록 유인하는 한 방법이었다면 이 지질트레일은 제주를 알리는 것 외에 외지인들이 제주를 걸으며 숙식과 지역 체험활동을 통해 지역경제의 발전에 이바지하고자 하는 목적이 더 크다고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제주도의 풍광이란 것이 뭍의 그것과는 달라서 화산섬으로서 청정한 공기와 초록과 연두 빛의 바닷물의 색 그리고 꺼먼 화산석이 지천에 깔려 그것 자체가 하나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구성하는 이국적이기도 한 섬이 아니겠습니까?
가까운 곳으로는 일본의 오끼나와섬과 아주 유사하다는 생각을 합니다만.


그렇게 제주의 자연풍광이 그림보다 더 아름답다고 생각하며 소위 여행과 걷기를 통한 마음의 치유가 숲길을 걸으며 마음을 치유하는 “healing in forest”와도 흡사한 치유와 마음의 성찰의 뜻있는 시간을 갖게 해 주는 매력으로 벌써 7~8차례 방문을 했었던 곳이 되었습니다.


제주를 처음 여행했던 때가 벌써 30여년을 지났습니다만, 그 때는 등산과 낚시에 빠져 있을 때여서 한라산 등반을 위해 몸담고 있던 직장의 산악회 회장으로서 등반대원을 이끌고 3박4일의 일정으로 등반을 주로하며 나머지 시간에 제주의 관광도 할 목적으로 김포공항을 떠났었습니다.
40대의 팔팔한 시절이어서 젊음의 패기로 당일치기로 영실을 거쳐 철쭉동산을 지나 깔딱고개를 넘어서 한라산 백록담으로 올랐습니다.


육칠십 년대에는 이 백록담으로 내려가서 텐트를 치고 밥도 해먹으며 야영을 했던 곳이지요. 지금 생각하면 그때에는 참 무지하고 미련했었습니다.  후손들에게 그대로 물려주어야 할 우리의 귀중한 자연유산을 그렇게 함부로 대했었다는 것이 그 당시의 일원으로서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이 한 말 또 하고 말이 많아지며 말 하고자 하는 핵심에서 마냥 멀어져가도 인지하지 못하는 참으로 서글프고 어눌한 모습이 되어가는 것이기도 해서 오죽하면 젊은 아이들이 꼰대, 꼴통이니 하겠습니까?  물론 웬만한 가정에서 자란 젊은이라면  막 되먹은 망나니처럼 그렇게까지는 말을 하지는 않겠지만 말입니다.


각설하고,  
이번 제주 지질트레일은 성산일출봉과 수월봉을 중점으로 걷고자 수월봉 일대의 차귀도 섬과 올레길 1코스인 시흥, 광치기 올레를 걷고 제주도에 와서 수차례 제주 현대미술관을 관람하고자 했지만 공교롭게도 휴일에만 갔기에 번번이 헛걸음 했던 빚을 갚고자 온전히 하루를 할애하여 저지리에 있는 현대미술관과 저지리 예술인마을을 또 한 번 살펴보고자 발걸음을 향했습니다.


혼자서 하는 여행이어서 숙소도 저렴한 게스트하우스로 정하고 교통편도 대중교통인 버스를 이용하였습니다.
모든 여행의 방식이 다 달라서 여러 가지임은 물론 장단점이 다르므로 다소 불편하기는 하지만 이번에는 나이 탓에 여러 가지 불편하고 힘들겠지만 기꺼이 게스트하우스를 이용한 무전여행과 흡사한 여행으로 단행을 한 것이지요.


지질트레일에 관한 여행기는 본인의 블로그 “우리강산 여행기”에 자세히 기록을 하겠습니다만 무인지경의 한가로운 저지리 예술인마을을 걸으며 그간 잊고 있던 조지훈 시인의 시 “사모思慕”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저지리 예술인 마을은 다음과 같이 제주도청 홈페이지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저지 문화예술인 마을은 1999년 지역특화 사업으로 사업을 추진하여 2007년 예술인 택지 48필지를 조성, 분양을 완료하고 2010년 ‘예술인마을 문화지구’로 지정됐고, 당초 입촌 신청자 48명 가운데 현재 26명이 입주해 있다.

이곳의 인적자원은 예술원 회원(김홍수, 조수호, 박광진)을 비롯해 한국 현대미술계의 원로작가 박서보 화백(전 홍익대미술대학장), 국악인 안숙선 명창, 가수 양희은, 전문 감정인 양의숙 등 15개 분야의 문화예술인들을 확보하고 있다.

또 이곳에는 제주현대미술관과 분관, 야외조각공원, 김홍수 아뜨리에, 창작 스튜디오 등을 갖추고 도내 최초의 지중화 선로로 만들어진 가로등 시설과 비포장 간선도로, 공간녹지 시범 조성을 통해 문화예술 친화적 마을로 조성돼 있다.“


여담입니다만, 아마도 당시 지역의 특성화를 위해 문화 예술인 마을로 조성하여 제주도가 단순히 관광지역으로서 만이 아닌 문화, 예술도 함께 공존하는 지역이라는 대외적 이미지 제고 사업으로 추진을 했던 것 같지만 공예가인 본인이 더 폭 넓은 문화, 예술의 아이디어를 얻고자 무려 7~8년 전부터 깊은 관심으로 수차례 방문을 했지만 기대했던 입주 예술가들의 작품 전시나 문화, 예술 활동을 본 적이 없었고 이러한 특혜를 받으며 분양을 받은 이 건물은 아마도 여름 한 철의 별장으로만 쓰이고 있지 않나 생각할 정도로 이렇게 아름답고 예술적인 공간에 개미 한 마리, 사람 숨결 한 오리 있지 않음을  실감했습니다.


차라리 본인과 같은 실제로 활동하는 돈 없는 예술인들에게 저렴하게 임대해주면 이 제주의 저지리 예술인 마을이 활기 있고 온갖 문화, 예술의 향기가 커피 향처럼 그윽하게 느껴지지 않을까요?
 
우리나라의 일부 귀족 문화, 예술인들은 이렇게 특혜 속에서 본인들의 부를 축적하고 있는 것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또한 이 나라의 정치하는 자들은 물론 지역에서 정치한다고 하는 자들은 이러한 자신의 홍보적 효과만을 노려 제 돈이 아닌 공금으로 제 자신의 이득을 위해 불철주야 온 힘을 경주하고 있음은 그러한 자들의 행동이야말로 촛불행진을 해야 할 사항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그려.


어쨌거나 이 새 소리마져 청아한 숲으로 펼쳐진 오솔길을 걸으며 어느 한 자리에 다달으니 저지리 예술인 마을에 입주하고 있는 서예가의 글씨로 돌에 음각을 하여 세운 시비詩碑를 보게 되었습니다.


지난 번에 왔을 때는 아마 이 곳 구석진 데 까지는 오지 않고 아래쪽 예술인들의 별장만을 보고 실망만을 하며 돌아갔던 것 같습니다.

고요한 자리에서 이 핏물처럼 진하며 사무치는 한 남자의 피울음소리 없는 아픈 어깨의 들썩거림을 보니 내 젊은 날의 한 때를 어쩌면 이렇게도 똑같이 표현했는지 깊은 공감을 하며 몇 번을 읊조리기도 하면서 한 편으로는 젊은 날의 맑고도 순수한 치기稚氣에 슬며시 미소를 띠기도 했습니다.


내 사랑이라고 굳게 믿었던 그 여인이 이미 남의 남자가 되었을 때, 그 사내의 마음은 어땠을까? 지옥보다 더 괴롭고 아픈 심연의 바닥에 사정없이 내 꽂혀졌을 정신과 육신은 하늘인 듯 구제할 수 있었을까?  한 편 그녀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증오와 적개심이란 이루 말 할 수 없는 사내만의 “죽음보다 더 깊은 연옥煉獄”이 아니었을까?


사내라는 자존심으로 한 때 목숨처럼 사랑했던 여인을 쪼잔하게 욕할 수도, 미워하는 마음을 가질 수도 없고 아주 작은 복수의 칼을 갈 수도 없는 그 잘난 사내라는 자존심 때문에 혼자 미치도록 울지도 못하는 그 마음을 뭇 여성들은 또 당사자인 그 여인은 알 리가 있으리오?

그래도 끝까지 사내의 자존심은 그녀를 욕하기를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한 잔은 떠나버린 너를 위하여/ 또 한 잔은 너와의 영원한 사랑을 위하여/ 그리고 또 한 잔은 이미 초라해진 나를 위하여/ 마지막 한 잔은  미리 알고 정하신 하느님을 위하여” 라고 허공에 대고 헛소리를 흩날리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불쌍하고 못난 남자들이여! 사내의 자존심이 뭐 말라빠진 개뼉따귀란 말이냐!


하지만 그때가 참 좋았습니다.   사나이 젊음을 훌쩍 지나 중, 장년이 언제였던가?  이제 초라한 노년이 되니, 세상의 나이 먹어 기氣가 충천한 마나님들은 귀찮은? 노인네에게 1 주일 치 곰국이나 끓여놓고 친구들과 산과 들로 나라 밖으로 룰루랄라 콧노래도 가볍게 오날을 즐겁게 보내고 있습니다.  “앞으로 오는 모든 날들이 오늘만 같아라!” 하면서......


그래, 당신들은 젊은 날 그 못된 남편과 잠 잘 때까지도 보살펴야만 했던 자식들로부터 해방이 되어 오늘과 내일을 노래하며 살아도 아무도 뭐라 할 사람 없습니다.


사죄하는 마음으로 그대들의 행복을 빕니다.  나무관세음보살!


또 다른 조지훈 시인의 “사모”를 옮겨 봅니다.


사모
            
그대와 마조 앉으면
기인 밤도 짧고나

희미한 등불 아래
턱을 고이고

단둘이서 나누는
말없는 얘기

나의 안에서
다시 나를 안아주는

거룩한 광망
그대 모습은

운명보담 아름답고
크고 밝아라

물들은 나무잎새
달빛에 젖어

비인 뜰에 귀또리와
함께 자는데

푸른 창가에
귀 기울이고

생각나는 사람 있어
밤은 차고나.


Paul Mauria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