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니골 통신-인생2막 이야기/다헌정담(茶軒情譚)-일상의 談論

비구니 스님의 목판화

sosoart 2006. 3. 8. 02:09

1980년대 초,   전두환정권 시절 서울의 연구단지를 대전의 대덕연구단지에 인위적으로 몰아넣기 위해 국가가 강제 이전방침을 정해, 본인이 근무하던 연구소도 대전으로 이전해 감에 따라, 가족들과 대전에서 몇 년간 살아 본 적이 있었다.

 

그 당시 대전이란 곳은 인구 50만도 안되는 그런 곳이었고, 유성온천 정도가 유명한 것으로 기억이 된다.

 

생면부지의 지방도시에서 특별히 아는 지인들이 없으니, 휴일엔 주변의 야산이나 고작해야 계룡산의 동학사나 갑사 정도를 등산 삼아 다니곤 했고, 시내의 백화점이란 지방의 소규모 백화점 밖에 없던 시절이어서 아이들을 데리고 가끔 가족 쇼핑을 나가기도 했다.

 

그 당시 서울에서 내려가거나, 경상도나 전라도 지방에서 올라온  젊은 직원들은 어쩔수 없이 기숙사인 독신료에서 기거를 하게되니,  어머니가 해주는 밥을 먹지 못하고 매일 밥을 사먹게 되니, 집에서 해주는 밥이 얼마나 먹고 싶겠나 싶어, 가끔 집으로 불러서 옥상 위에서 숯불 돼지불고기 파티를 열곤 했었다.

 

이십년이 지난 지금도 그 친구들을 만나면 그때의 돼지고기가 그렇게 맛있었노라고 회상을 하곤 한다.   그들도 이제는 부서의 장으로 중견간부로서 퇴직후 노후를 걱정하는 나이들이 되어간다.

 

대전엘 가면 지금도 그 친구들을 부담없이 불러 만나곤 한다.

 

그 당시 클럽을 결성하였는데, 그 이름이 타골스(Tagols: 打골s: 즉 "골 때리는 사람들"이란 뜻으로) 였다.

 

남녀 혼성 야구팀을 만들면서 본인이 장난스럽게 붙인 이름이었는데 그 당시 후배 직원들이 이름이 재미있다고 하여 이름이 그대로 굳어 버렸는데, 연구단지 연구기관 내에서  남녀 혼성 야구팀은 본인이 창설(?)한 우리 "타골스"팀 밖에는 없었으리라. 

 

본인이 정식으로   아마츄어 야구팀인 "000연구소 야구단"을 창단하여 그 당시 "일간 스포츠"에 "아마츄어 야구 연구단지 리그 탄생하다"라는 제목으로 사진과 함께 제법 크게 기사화  된적도 있었다.

 

그들은 본인을  "上王타골"로 모시고 자기들은 각자 "卒타골"로 자임을 하던 터였다.

 

그래도 그 때가 역시 참 좋았었다.  후배 직원들과 어울려 지나다 보면 정신도 젊어지고, 감각과 건강 또한 젊어짐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지나던 중, 우연히 "동양백화점"이란 델 들어갔다가, 동학사의 어느 암자에 기거 중인 어느 비구니 스님의 판화 작품이라는 것을 우연히 구입하게 되어 액자에 걸어 놓은 그림이 바로 아래의 그림이다.

 

옛날 고승의 말씀, "성 안내는 그 얼굴이 참다운 공양구요 부드러운 말 한 마디 미묘한 향이로다"

 

달마대사의 판화를 음각하다가 문득 그 생각이 나서 이렇게 적어 본다. 

어느 비구니 스님의 판화 작품

 

 

본인의 목판화 원판 작품 달마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