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의 한산도행 선착장
한산도 이순신 장군의 수루에 놓여져 있는 북
다리가 긴 부부
<동락재 통신-50: 동락차(同樂茶)를 끓이며> <2006. 3. 25>
봄바람 치고는 너무 폭풍처럼 몰아칩니다.
이미 봄을 일찍 내려놓음을 후회하고 있음일까? 다시 거두어 가려는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만 내달리는 바람의 휘몰아치는 서슬에 마당의 강아지 플
라스틱 물그릇이 달그럭 거리며 저 쪽 밭으로 날아가고 있었습니다.
너무 을씨년스럽기만 하여, 아침에 복돌이와 마당의 녀석들 밥을 주고 토순이,
토돌이 물과 사료를 주고 얼른 공방 작업장으로 들어가 난로 뚜껑을 열어보니.
앗 불싸! 잘못하면 불 꺼트릴 뻔 했습니다.
어제 “同樂茶”를 끓인다고 난로 공기구멍을 활짝 열어 놓은 걸 잊은 채, 그냥 이
쪽 거실로 와버렸더니 연탄이 하얗게 다 타고 빨간 불이 시원찮게 쳐다보고 있
습니다 그려.
얼른 연탄불을 갈고, 작업을 할까 하다가 바람소리에 마음이 심란하여 내처 이
쪽 동락재로 와서 벽걸이의 단청 채색 디자인 작업을 하였습니다.
寺刹 단청의 문양은 기하학적 문양으로서 그 정교하기가, 언뜻 눈으로 보는 것
과는 달리, 아주 섬세하고 그 다양함과, 채색의 화려함과, 또 색채의 gradation
이 현대의 미술가들이나 색채 디자이너들의 그것 보다, 단순하고 간결하면서도
절도가 있으며, 눈부신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목공예 디자인을 공부하면서 우리 옛 선조들의 木 건축물과 전통 생활의 목가
구, 생활 목공예품과 일상용품들을 보며, 그 설계도를 유추하며 짜맞춤의 結構
法을 살펴보면, 우리네 조상들의 慧眼과 과학적 思考와 技法에 새삼 놀라고 탄
복하게 됩니다.
비과학적일 것 같으면서도 아주 과학적인, 느슨한 것 같아도 아주 단단한, 모든
면에서 뛰어난 조상들의 생활에서의 과학은 절로 머리가 숙여지게 합니다.
백의민족이라 하여 흰색 밖에 없는, 색에 대하여 아주 단순한 色痴의 민족일
것 같지만, 전혀 그 반대의 아주 색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줄 아는 화려한 색채
의 마술사 같은 우리네 조상님들이라는 것을, 단청의 색채를 模寫할 때마다 다
시금 깨닫게 되고 놀라게 됩니다.
함부로 색을 남용하지 않고, 화려함과 부귀와 영예를 상징하는 모든 사물에는
어김없이 화려함과 절제된 색채로 아름다움을 표현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대부들이나 班家의 일반적인 木家具는 화려한 색채의 것 보다는 은
은하게 싫증나지 않는 木理를 살려 자연스럽고, 쓰면 쓸수록 정이 가며, 손때
가 묻을수록 그 빛이 더하는, 은근한 無色의 아름다움을 즐겨했던 것을 보면,
정말 우리네 조상님들은 멋과 맛을 아는 자랑스런 선조들이라는 것을 새삼 느
끼게 됩니다.
실로, 저는 젊은 30대 까지는 우리네 한국화, 문인화 등을 보면 졸음이 올 정도
로 너무 靜的이라며, 아예 멀리 하였고, 취미로 서양화를 즐겨 그렸었으며, 우
리네 일상 전통 목가구인 옛날의 오래된 장롱이나 반닫이, 병풍, 생활가구 등
은 고물이 다 되었다는 구실로 함부로 다 내다 버리거나 불 때어 없앴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지요.
그냥 두고, 잘 보관하였다면 지금은 골동품으로서 가치도 충분하였을 터이고,
고풍스런 고가구가 멋스럽게 집안을 장식하는 효과도 있었을 터이니 말입니다.
옛날 어른들의 말씀이나 흔적들을 함부로 버리거나 홀대를 한다면 그것이 곧
자기 자신을 함부로 대하는 것이나 똑 같은 것 일진데, 당시에는 왜 그것을 깨
닫지 못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뒤늦게 걸어온 길과는 전혀 다른, 이 길에 들어서서, 전통 목가구를 연구하고
재현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 저로서는 새삼 孟子의 이런 말씀이 머리를 콕콕 쑤
시고 있습니다.
“出乎爾者 反乎爾者” 출호이자 반호이자
너로부터 비롯된 것은 너에게 도로 되돌아간다.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우물물을 마시고 나서, 다시는 제가 먹지 않을 것
이라 여겨, 우물에 침을 뱉은 인사가 다시 그 물을 먹는다”는 경우처럼
어떤 물건을 소중하게 잘 써 오다가, 다 낡고 고장 난 헌 것이라고, 함부로 버
리고 나면 또 아주 요긴하게 필요한 적에 없어서 낭패를 본 적이 있지 않습니
까?
우리가 쓰는 물건도 그러하듯이, 조상님들의 말씀, 가르침, 예절과 정신 등 이
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옛 소중한 것이 일회용, 일회적으로 버리고 잊혀져가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과거에 우리 조상님들과 부모님들을 그렇게 생각하고 함부로 행동한 적이 많았
던 것 같아, 부끄럽기도 하거니와
내가 한 행동 그대로, 나의 자식들에게 그대로 받는 것이 아닐까? 반성을 해봅
니다.
위의 맹자의 말처럼,
내가 베풀었다면 그도 베풀 것이고
내가 속이고 등을 친다면 그도 역시 나의 등을 후려칠 것이기에
이것이 바로 뿌리는 대로 거두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선하게 하면 선이
악하게 하면 악이 그대로 돌아올 텐데
나의 삶이 어질다면
되돌아오는 것마다 즐겁고 행복할 것이라는 생각이 됩니다.
오늘은 사찰 단청 문양을 벽걸이 작업에 응용해 옮겨보며, 그 아름다움의 화려
함에 새삼 다시 한 번 반하였고, 또 그 작업의 섬세함과 빈틈없는 기하학적인
문양의 전개에 놀랐으며, 그 작업의 어려움에 다시금 놀랐습니다.
과연 우리 조상님들께서는 참 훌륭하셨음에 머리 숙여 집니다.
이렇게 쌀쌀하고, 독하며, 심술 맞은, 꽃샘추위가 지나는 밤에는 연탄불 지글
지글, 돼지고기 한 점에 땅 속에 묻어 놓은 막걸리 항아리에서 바가지로 술을
퍼서, 한 사발 꿀꺽꿀꺽 들이키던 40년 전, 서울 광교의 삼각동 선술집 생각이
간절합니다.
문을 열면
만나지
떨리는 손목으로
여러 얼굴들을
만나지.
쌀값도
연탄값도 걱정없이
술을 들고 있지.
아들 딸들의
껑충 뛴 등록금도 잊고
술을 들고 있지.
나도 한 잔 오래만에
들어볼까.
어린 북어 새끼들을
우선 씹으며
목청을 가다듬는다.
고약한 세상에
고약한 얼굴들은 없고
단 한잔에
어둠들이 물러간다.
한잔 더 마셔야지
또 마셔야지
반가와서 마시고
억울해서 마시고
젊어서 한잔
늙어서 한잔
밤은 이렇게 만나지.
신문기사 일단짜리를 읽으며
용케도 흥분을 참는
대담한 동지들은
우선 술을 들지.
밤엔 약속없이
문을 열면 만나지.
박봉우 시인의 <밤이 되면 만나지> 였습니다.
박봉우 시인 연보
1934년(1세) 7월14일, 전남 순천군 외서면 금성리 679번지에서 전남 승주군
군수를 지낸 바 있는 아버지 박병모와 어머니 ***사이에서
3남2녀 중 막내로 유복자로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密陽), 아호는 추봉령(秋鳳嶺)이다.
1941(7세) 4월1일, 광주 서석공립국민학교 1학년에 입학하다.
1948(14세) 6월25일, 광주서석공립초등학교 졸업.
9월28일 광주서공립중학교 입학. 서중학교 재학시절 문예반에
들어가 시동인 ‘진달래’를 결성하고 작품활동하기도 했다.
이 때 특히 가곡 ‘바위고개’를 잘 불렀다고 한다.
1951(17세) 7월25일, 광주서중 졸업. 9월28일, 광주고등학교 입학.
광주고 재학시 후일 문인이 된 강태열, 윤삼하, 주명영 등과
더불어 문예반에서 활동하면서 시동지 성격의 4인시집 『상록집』
을 간행. 특히 박봉우는 고등학교 재학시절 교지(校誌)
‘광고(光高)’을 만드는데 열성을 보이고 있으며, 1학년 때인
1952년 단편소설 형식의 산문 「푸른 별과 같이」를 발표.
이후 여기에 그의 시 「촛불의 노래」(1952), 「마리아像」(1953)을
차례로 발표하다.
1952(18세) 주간지 『문학예술』에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石像의 노래」가
당선되다. 전남일보 주최 제1회 학생문예 경작대회서 박성룡,
윤삼하, 주명영, 박상식 등과 함께 입상.
전남일보주최 제1회 신춘문예에 박성룡, 정현웅 등과 함께 당선.
1953(19세) 서울 희망사주최 제1회 전국 남고생 문예현상릴레이에서 당선.
서울 수험사주최 전국 고등학교 문예현상대회서 윤삼하, 지명수
등과 입상.
전남일보주최 제2회 학생문예경작대회서 또 다시 당선하다.
1954(20세) 3월31일, 광주고등학교 3년 과정을 졸업하다.
4월8일, 전남대 문리대 정치학과 입학하다.
입학 후 학과공부에 전혀 신경쓰지 않은 듯 대부분의 학점이
D 또는 F학점. 그런 관계로 2학년 1학기 때(1955) 휴학했으나
1956년 6월14일 제적처리되다.
1955(22세) 2월 강태열, 김정옥, 박성룡, 이일, 정현웅, 주명영 등과 함께
시동인 ‘영도’를 결성. ‘영도’ 동인지 1집, 2집에 참여하다.
1956(23세) 1월1일,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휴전선」이 당선
이후 약 2년간 전남일보(현 광주일보 전신) 서울주재기자로
재직하다. 이 무렵 명동거리의 ‘은성’ ‘돌체’ ‘르네상스’ 등을
누비며 천상병, 김관식, 신동문, 신동엽 등 다수의 문인들과
친교를 나눴으며 많은 일화를 남기다.
1957(24세) 첫시집 『휴전선』(정음사) 간행하다.
1958(25세) ‘전라남도 문화상’ 수상하다.
1959(26세) 제2시집 『겨울에도 피는 꽃나무』(백자사) 간행하다.
1962(29세 ) 4월1일, 제3시집 『四月의 火曜日』(성문각) 간행하다.
‘현대문학상’ 수상.
1963(30세) 1950년부터 1960년까지의 중앙 일간지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자를 중심으로 한 시동인 ‘신춘시’에 참여.
강인섭, 강인한, 김광협, 신세훈, 조태일, 윤삼하, 정진규,
김종해, 황명, 이근배, 장윤우, 이탄, 홍윤기, 김종철,
김원호 등과 함께 1969년까지 활동.
1965(32세) 김현승 시인의 주례로 서울 탑골공원에서 이정례씨와
결혼하다.
1966(33세) 1월, 동인지 ‘영도’ 제3집에 참여. 이때 ‘영도’ 동인으로
이성부, 임보, 손광은, 김규화, 윤삼하 등이 가세하다.
5월, 동인지 ‘영도’ 4집에 참여.
10월 르포집 『肝이 큰 女人들』(한국정경사)를 간행하다.
1969(36세) 10월10일, 김소월, 김영랑 등 작고시인들의 생애와
문학을 다룬 산문집 『사랑의 詩人像』(백문사) 간행하다.
1974(41세) 11월, 자유실천문인협의회에 창립회원으로 참여하다.
1975(42세) 『창작과 비평』 여름호에 시 「서울 下野式」 등을 발표한
이후, 서울 생활을 마치고 전주에 정착.
당시 전주시장이었던 고등학교 동창생의 주선으로
전주시립도서관 촉탁사원으로 근무하기 시작하다.
1976(43세) 7월1일 제4시집 『荒地의 풀잎』(창작과 비평사)을
간행하다.
1985(52세) 8월30일, 제5시집 『서울 下野式』(전예원)을 간행하다.
이 해 겨울 부인과 사별하다. ‘현산문학상’ 수상.
1986(53세) 11월15일, 기존의 산문집 『사랑의 詩人像』를
『詩人의 사랑』(일선출판사)으로 제목을 바꿔 재발간하다.
1987(54세) 제6시집 『딸의 손을 잡고』(사사연)를 간행하다.
1990(57세) 3월1일, 전주시립도서관 촉탁사원으로 재직중 지병으로 별세.
‘민족시인 박봉우 선생葬’(장례위원장 : 김중배)으로
전주시립효자공원묘지에 안장되다.
유족으로는 하나, 나라, 겨레 등 1남 2녀.
1991년 11월25일, 시선집 『나비와 철조망』(미래사) 간행하다.
1993년 6월, 민족문학작가회의 주최로 ‘박봉우시비 건립추진
위원회’ 발족. 시비에 새길 작품은 그의 대표작인
「휴전선」으로 정함.
1994년 12월, 광주사직공원에 그의 시 「조선의 창호지」를 수록한 시비
(글씨 : 이돈흥, 제작 : 정윤태)가 세워지다.
1996년 4월, 민족문학작가회의 정례이사회에서 ‘박봉우시비 휴전선
건립추진위원회’를 ‘통일동산 시비건립추진위원회’로 확대개편.
위원장에 강태열을 선임.
2001년 8월22일, ‘시인 박봉우 시비건립위원회’를 구성,
위원장에 현기영(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
김윤수(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이사장),
김중배(MBC 문화방송 사장)씨를 추대하다.
11월25일, <휴전선> 발표 45주년을 기념하여
경의선 임진강역 구내에 그의 시 「휴전선」을 새긴 시비
(글씨 : 쇠귀 신영복, 제작 : 김운성)가 세워지다.
2006년 6월 『박봉우 시전집』(화남출판사)이 간행되다.
이 산촌의 깊은 밤에도 바람이 사정없이 후려칩니다.
밤의 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잠자리를 피렵니다.
'소니골 통신-인생2막 이야기 > 소니골 통신-귀산촌 일기歸山村 日記'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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