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꽃 문양의 단청, 기하학적이면서도 딱딱하거나 무미하지 않고, 문짝을 견고하게 하는 장석 또한 아름답다.
용모양의 문양이 요사채의 문에 새겨져 있다.
우리 선조님들의 신앙과 예술의 멋스러운 조화가 새삼 존경스럽다.
단기 수련기간동안의 예비(비구승, 비구니)스님들 정진과정에서의 저녁 예불 행사인지, 법고를 치는 스님의 시범을(?)보면서, 이들은 중생의 무슨 연을 끊고자 함일까?를 생각케 된다.
4월초파일 부처님 오신날의 연등에 이 모든 중생들의 염원을 담고 있다.
의문인 점은 어느 연등은 법당 안에서 부처님의 향기를 맡으며,
또는 스님의 업어를 일년 내내 들을 수 있는 특혜를 받으며,
어느 연등은 왜 밖에서 부처님의 모습도 보지 못하며 시간이 지나면 어디로 사라질 것인가?
오대산 두로봉 가는 길의 돌탑
월정사 경내의 연등
연등의 터널을 이루고 있는데, 경건함 보다는, 비닐하우스의 파이프에 매달아 놓은 연등이 하나의 상품으로 여겨지는 것은 전통불교의 목공예를 응용한 연등걸이가 아니라서, 더 그렇게 느껴진다.
차라리 옛날 시골에서 빨래를 널던, 양쪽에 막대 기둥을 세우고 그러한 줄에 연등을 옹기종기 매달았다면, 이렇게 상품처럼 일률적이지 않을것 같고, 명품과 짝퉁의 차별대우를 받는것 같은 가엾은 연등으로는 느껴지지 않았을터인데.........
<동락재 통신-65: 사랑하는 후배의 방문> 2006. 5. 6(토)
그러니까, 목요일에 홍천 읍내의 국유림관리소에서 “명예산림보호지도원증”(지도원 하니까 꼭 빨갱이새끼들 용어와 같아서 마음에 들지 않지만...)이 발급되었다고 찾아가라는 연락을 받고, 찾을 겸 또 Daum 블로그의 표지판을 우리 동락재의 안내판에 붙이려고, 주문한 것이 있어서 그것 또한 찾고, 거실용 문갑이랄까 장식장을 만들기 위한 목재의 수배 및 마땅한 나무가 있을까? 하여 홍천 읍내에서 이곳저곳 확인을 하기 위하여 외출을 했다.
요즈음은 나물을 캐러, 우리 동락재의 뒷산에도 사람들이 많이 오르내리기에 집을 잠시 비어놓고 외출을 해도 신경이 쓰인다.
남의 마당에 제 멋대로 들어와서 물을 마시고 가는 것은 좋으나, 수도꼭지를 틀어놓은 채로 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터라, 차단기를 연결하여 외출 시에는 전원을 차단하기는 하지만, 원래 정신이 깜박깜박하므로 어떤 때에는 그냥 전원을 켜놓은 채로 가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어쨌던, 찾을 것은 다 찾고, 목재상으로 돌아다녀 봤으나, 마땅한 목재들이 별로 없어서, 그전에 계속 거래하는 곳으로 가서 우선 필요한 목재만 주문을 하고 돌아왔다.
전통 가구점나, 일반 가구점에서 판매하는 가짜나무(?)가구, 즉 베니어 판이나, MDF에 감쪽같이 무늬목을 부치거나, 도색을 하여, 겉은 번지르한 가구를 만든다면, 목재 구입에 별로 신경을 쓸 일이 없으나, 원목으로 가구를 제작하다 보면, 내구성과 외양의 아름다움, 무늬결, 작업의 용이성, 작품의 견고성과 작품의 완성도와 경제성 등, 모든 것을 고려하여 작품을 제작하여야 하기에, 나무의 종류에 따라 천차만별이므로 이러한 점이 전통가구나 일반 가구제작에 제일 어려운 점들이 있다하겠다.
그러기에 일시에 제재소에서 원목을 그대로 구입하여, 원하는 칫수대로 절단, 재단을 주문하기도 하고, 나무의 경제성을 비교하여 볼 때, 기성의 칫수로 재단하여 놓은 제품화된 나무를 구입하기도 한다.
그러나, 경제성에서는 단연 원목을 통째로 구입하여, 원하는 칫수로 재단하여 달라는 것이 좋긴 하지만, 나무의 건조에 오랜 시간이 걸리므로 그 또한 결점이며, 공장에서 대량으로 목재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기에, 많은 비용을 들여 건조장에 건조를 의뢰하는 것 또한 쉬운 일은 아니어서,
대개는 한꺼번에 목재소에서 필요한 나무를 원목으로 구입하여, 작업장의 밖에서 자연 건조하는 방식으로 건조시켜 사용을 하니, 자연건조에 필요한 시간이 최소한 1년은 지나야 되므로, 작품제작에 적당한 나무가 없으면, 그때 그때 제품화된 나무를 소량으로 구입을 하게 되니, 값도 비쌀뿐더러, 사용하고자 하는 나무도 구하기가 어렵고, 또 있다하여도 소량을 가져오기 위해 멀리서 운임을 지불하고 구입하여 오기에는 상당한 애로점이 있다.
물론, 내가 공방을 영리의 목적으로 목가구나 목조각, 목공예 작업의 기술과 안목을 가진 공예인을 고용하여 중소형의 공방을 운영한다면 투자를 하여, 많은 목재도 확보하고 작업장도 공장 수준으로 바꿔야 하겠지만,
우리나라의 현실이 이러한 공예가들의 수공예품들은 高價일 수 밖에 없으므로(왜냐하면 나무재료부터 원목의 양질의 나무를 사용하여야 하고, 건조에 많은 시간을 들여 좋은 나무를 다종, 다량으로 확보를 함은 물론, 목공예가나 목공예의 기술이 능숙한 기능인을 고용하여야 하며, 또한 전시장이나 매장확보도 중요한 일이지만,
타 업종에 비해 그만큼의 투자로 적정이윤의 창출은 커녕, 시작하자마자 망하는 지름길이기에, 이러한 문화예술상품 관련 사업은 사업이 아니고, 창조적 작업이며 자신의 예술혼이 반영된 창작의 예술품이므로, 그 작품의 진가를 아는 사람이 아니면, 또한 작품에 대한 상식과 안목이 없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그가 돈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돼지 목에 진주”밖에 되지가 않아, 예술품을 구입하는 문화인이 많이 없는 실정이므로, 거의 모든 예술가들이 밥을 먹고 살기가 힘든 다는 것이 우리의 실정이다.
몇 백만 원짜리 술자리는 아까워하지 않지만, 단 몇 십 만원의 작품을 구입하는 것은 제 살을 찢는 것처럼 아까워하고, 제 집안에 그림 하나 걸어 놓지 않는 살찌고, 무식한 돼지들이 대부분인 우리나라의 문화수준의 현실이 아닌가 싶다.
외국의 가정에는 하다못해 일본, 아니 우리나라의 전라도 지방엘 가보아도, 하다못해 허름한 다방에도 그림 몇 점씩은 걸려있다.
물론 그것도, 복제품이나 사진으로 찍은 것, 이발소 그림 수준의 그림이 아닌, 제법 예술혼이 느껴지는 그림들을 흔히 볼 수가 있다.
그러면 그들이 모두 돈을 많이 가진 사람들이어서라고 할 수 있을까?
비록 배부른 돼지 보다는 정신이 고고한 문화적이며 예술적인 생활의 감성과 지성이 풍부한 사람이길 원하는, 또 그러한 자부심을 가진 사람들이기에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물론 전라도와는 아무런 인연도 없는 사람이지만, 전국을 여행하면서 일생을 통해 느끼는 것은, 과연 전라도 사람들이 자기들의 땅이 서로 藝鄕이라고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부러움과 그들의 자긍심에 진심으로 찬사를 보내곤 한다.
우리가 한 때는 전라도 사람들에 대한 편견이 만연된 적이 있기에, 나도 아무런 정확한 비판의식 없이 그러한 시류에 편승하여, 이성보다는 감정에 밀려 덩달아 그러려니 한 적도 있었지만, 사람이란 것이 어느 지방 사람은 좋고, 어느 지방 사람은 나쁘다는 편견이야말로 나라를 망하게 하고, 나를 망하게 하는 지름길이 아니겠는가?
어쨌던 예술에 관심을 갖고, 사랑하는 사람만이 예술작품을 보고 느낄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다.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조각가의 조각을 이해하고 사랑하고, 좋아하니까 소장하기 위해 구입을 하고, 서예가가 그림을 구입하고, 조각가가 공예가의 목조각, 목공예품을 구입하고, 도자기의 작품을 구입하는 것이 일반적인 흐름이다. 그 예술을 하는 사람들이 돈이 많아서 일까?
일반인들이 그림이나 공예품 등의 작품을 구입하는 것은 너무 高價이기에 하지 못한다는 말은 하나의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이 세계적인 名品이라고 하는 옷이나 액세서리, 또는 소품이나 그 어느 것 하나쯤은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몇 만원하는 점심과 몇 십만 원하는 음식은 아깝다 하지 않고 먹으며, 물건들을 다반사로 구입하지 않는가?
해외여행이다 뭐다 하면서, 보약이다, 영양제다, 비아그라다, 녹용이다, 화장품이다, 옷이다 하며 사들이는 돈은 무릇 얼마나 많다는 말인가?
나는 내가 넉넉지 않은 젊은 시절에도, 물론 그러기에 지금도 넉넉할 수는 없지만, 몸에 바르고, 먹고, 치장하는 것 보다는 나의 머리를 치장하는 데 중점을 두었기에 지금도 문학, 예술, 지식 어느 것에 내가 남에게 뒤진다고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물론, 제 잘난 멋에 산다고 할지는 모르겠으되, 유행가의 가사처럼, 나는 배부르고 살찐 돼지보다는, 마른 인간이 되고자 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내 사랑하는 사람과 가족의 얼굴을 보는 것이 행복한 마음이지만, 벽에 걸려 있는 나의 것이던 남이 그린 그림이던 글씨이던 작은 소품들이던, 그런 것을 보며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 행복하다.
그래서 지금도, 퇴직 전의 한 길로만 정진했던 직업과는 또 다른 세계에서 또 나의 새로운 예술과 정신과 길을 찾는 작업 세계와 나의 정체성 확보를 위한 인생작업의 길을 열심히 걷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남들이 보면 딱하다고 할지 몰라도, 그것은 그네들의 잣대로 보는 눈이지, 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는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들, 그리고 앞으로도 추구하는 바가 같은 나의 사랑하는 아내에게 감사한 마음과 끝없는 사랑과 마음을 보낸다.
또 나의 사랑하는 자식들에게도.
그들은 그런 나를 부유한 생활을 하지 못해 조금은 불편했겠지만, 그들의 정신은 역시 부모와 같이 건강하고 착하고 올바르다.
그것으로 나는 조금을 안도하긴 하지만.........
또 얘기는 다른 곳으로 빗나갔다.
어제부터 대부분의 직장인들에게는 사흘간의 연휴가 시작되지 않았던가?
그런데 나의 고등학교 후배이면서, 또한 직장의 후배인, 나와는 십오년 정도의 나이 차이가 있지만, 내가 평소에도 이뻐하는 잘 생긴 인물에, 부부가 열심히 삶을 살고 있는 그 친구가 나의 블로그의 글을 보고, 아마 내가 패배감에 젖어 있든지, 아니면 일상의 생활에 매우 불만족하여 속이 상해있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자기 마음이 허허롭고 조금은 아프고 편치 않아 전화를 드렸다며, 이번에 모처럼 아내와 설악산 여행을 가는데, 가는 길에 들렸다 가겠다고 연락이 왔다.
그래서 나의 동락재에 오랜만에 부부가 같이 오겠다는데, 얼마나 반가운 일이겠는가?
“그래, 막내야! 기다릴 테니 꼭 오라”며 반갑게 전화를 받았다.
이 친구는 내가 다니던 직장의 대, 여섯 명의 고등학교 동창 중에서 제일 막내이고, 내가 제일 위이기 때문에, 나나 나의 아내는 막내라고 부르며, 그는 나의 아내에게 형수님이라 부른다.
아내는 내가 외로운 獨子이기에, 시동생이 없는 것이 부러웠던 차에, 형수라고 부르는 동생이 있으니 얼마나 좋겠는가?
또한 이 친구는 붙임성이 좋고, 사람이 좋은 것은 물론, 사업성 수완도 있어, 아내가 하는 일에 많은 힘이 되어주고 있기도 하다.
“자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나, 속상하지 않다! 잘 알지 않느냐? 내가 전직 원자욕 연구소 소장”이란 것.
그리고 내가 언제나 할 말 하고 살았지, 불만이든 희망이든 마음속으로 집어 삼키고 살진 않았지 않느냐?“
“걱정하지 마라. 난 항상 그렇게 살고 있고, 무지막지하게 내가 욕을 해대는 것은 소위, 남들이 말하는 스트레스 해소용이니, 전혀 신경 쓰지 말게.....”라며 오히려 내가 위로를 했다.
그 다음날은 마침 또 아내가 이곳 농사일을 나에게 맡긴 것이 미심쩍어, 서울에서 내려온다고 한 날이어서, 마침 양쪽의 부부가 모처럼 같이 저녁식사를 할 수 있으니, 이 어찌 또한 즐거운 일이 아니겠는가?
아내는 홍천 터미널에 6시경 도착을 하여, 마중을 나가서 일용할 양식을 준비하고, 집으로 들어와 저녁준비를 하며 기다리니 8시가 지난 약간 늦은 시간에 도착을 해서, 모처럼 그간의 이야기와 식사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오늘은 여기서 자고, 내일 아침에 떠나라 하니, 설악산의 콘도 예약도 예약이지만, 누굴 거기에서 만나기로 했다며 12시가 거의 다 시간에 막내는 출발을 했다.
아쉽기는 하지만, 앞으로는 자주 오기를 바라고, 또 자주 오겠다며 인사를 나누고 그들은 출발을 했다.
그러면서, 이 산촌 시골에서 고적한 생활을 하는 선배에게 작품제작에 정진하라는 격려의 의미로 작품을 하나 구입을 하여주고 갔다.
작품이 차에 싣고 가기에는 크기에 훗날 화물차 편으로 보내 주기로 했다.
이렇게 저렇게, 동락재에 들렸다가 작품을 구입하는 나와 아내의 친구나 친지들이 고마울 따름이다.
나의 다음 작품을 위해 작품을 계속 할 목재와 재료를 구입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될 수 있는 것이니까.
이렇게 작품을 가져가는 지인들이 있으므로, 계속 작품의 작업을 할 수 있으니, 나에겐 얼마나 좋은 일인가?
나를 도와준다고 생각하기 보다는 나의 작품이 좋아서, 집에다 걸어 놓고 싶어서 구입을 하는 것이라 애써 생각을 하며 자부심도 가져본다.
나의 작품이 좋다고 아껴주면 그 또한 나를 그렇게 해 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작품성을 인정해 준다는 것 또한 나에겐 많은 힘이 되는 것 아니겠는가?
그렇다고, 혹여 이글을 읽는 후배들이나 친구들, 그리고 知人들께서는 부담을 갖지 마시기를 바란다.
그저 그냥 여기에 와서, 얼굴을 보고 이야기만 해도, 그 자체가 우리들에게는 행복한 하루가 되는 것이니까?
차 한 잔, 쐬주 한 잔, 또 홍천의 명물 “누룽지 막걸리” 한 사발에 정이 넘치고 사랑이 즐거우면, 산골 생활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지 않겠는가?
정희성의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라는 시를 봄에 오는 실비처럼 살포시 오는, 그런 비가 아니라, 새벽부터 무지막지하게 쏟아지는 아침에, 그리움을 노래하니, 무언가 나도 그리운 게 있는가 보다.
어느날 당신과 내가
날과 씨로 만나서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우리들의 꿈이 만나
한 폭의 비단이 된다면
나는 기다리리, 추운 길목에서
오랜 침묵과 외로움 끝에
한 슬픔이 다른 슬픔에게 손을 주고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의
그윽한 눈을 들여다볼 때
어느 겨울인들
우리들의 사랑을 춥게 하리
외롭고 긴 기다림 끝에
어느날 당신과 내가 만나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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