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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락재 통신-108: 아내 친구들의 방문

sosoart 2007. 6. 26. 00:40



 

 

 

<동락재 통신-108: 아내 친구들의 방문>    07. 6. 12(화)


오늘은 아내의 고등학교 동창생들이 모처럼 동락재를 방문하는 날이다.

아내는 친구들이 온다고 하니까 어제 미리 이 동락재로 내려와서 준비랄껏 까지는 없지만 그래도 친구들보다 하루 먼저 내려와서 작은 준비를 했다.

내가 혼자 있는 날이 많으니,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내에게 준비를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특별히 준비하는 것은 없더라도 모처럼 오는 친구들에게 정성이 담긴 한 끼의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은 것이 남녀 가릴 것 없는 친구들의 정이 아니겠나 싶다.


올해엔 아내의 친구들이 처음 방문을 하는 것이라서 마음이 설레기도 한가보다.

실은 아내나 나나 친구들은 끔직이나 좋아하지만 이런 저런 사정과 연유로 그 좋아하는 친구들과 자주 만남을 가질 수 없는 것 또한 답답한 일이기도 하다.

이 모두가 어찌 보면 이 미련하고 못난 서방 탓이기도 하니, 남편으로서 아내에게나 자식들에게나 할 말을 잊은 지는 오래 되었다.

  

집안에서 가장이라고 하는 남편의 판단 잘못으로 탄탄대로를 마다하고 좁은 가시밭길에 가족들을 끌어들여 강제로 걷게 했으니 인생의 추락을 가져오게 되었고, 그 고난의 길을 걷게 된 가족들에게는 천추의 한이 될 만큼 후회가 되는 일이기도 하였지만 나와 내가족의 복이 그 정도 쯤 밖에 되지 않으니 그 박복한 것을 누군들 탓할 수가 있겠는가?

다 내 탓이오 하면서 어언 7년여를 고난과 깊은 고통과 씨름하며 극복하려고 노력을 아직도 하고 있는 처지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인간의 喜怒哀樂 중 喜와 樂의 한 가지 만이라도 그 끈은 놓치지 않으려고 정신을 놓고 있지는 않고 있다.


그러니 “지금”을 우리 가족이 살고 있다는 것은 생존을 넘어 생활을 하기 위한 통과의례의 엄숙한 의식을 치루고 있다고 생각을 하며 일상에서의 생활의 즐거움을 유보한지가 오래되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나 자신이 소나무와 같은 굳은 精氣와 육신으로 지금까지의 삶과의 투쟁에서 쓰러졌다가 일어서는 七顚八起의 끈질김과 강인함으로 극복하여 왔으므로, 조만간 이 길고 긴 고통과 艱難의 세월에 종지부를 찍겠다는 일념으로 전력투구하고 있다.

최후의 승리를 위하여.


하여 친구들과의 만남도 자제를 하고 있었지만, 모든 것을 단절하는 것만이 보탬이 되는 것은 아니어서 무언가를 단절만 하고 살 것이 아니라 같이 하면서 미래를 도모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아닌가 싶어서, 이제는 서서히 닫힌 마음과 생활의 대문을 조금씩 열어가고자 하여, 가족들과의 緣이 있는 사람들과의 만남에도 조금씩 사립문을 열어가기로 하였다.


나로 하여금 여러모로 사면초가의 불안정한 일상에 묶여있는 가족들에게 작지만 조금씩 숨통을 트이게 내가 자리를 비켜 주면서 나의 정체성을 확보해 나가는 것도 진일보한 방법이라 自評을 하고 올 여름부터 미래를 맞이하고자 하는 것이다.


각설하고, 

 

시간의 여유들이 있으면 여기 산촌에서 하루 밤을 묶고 가라고 했다지만 어디 딸린 식구들이 있는, 특히 투정부리고 보채는 철없는 큰아들(?)이 있는 남편과 자식들의 엄마 노릇을 하는 늙어가는 여성들의 행동이 그리 자유스럽지는 못하니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다.


나는 오늘의 등산로 조사 코스가 그리 길지는 않아서 아내의 친구들이 도착할 시간 즈음에는 올 수가 있을 것 같기에, 이러한 시골에서만 맛볼 수 있는 숯불구이 준비를 해준다고 하며 집을 나섰었다.


다행히 등산로 조사가 일찍 끝나서 친구들이 도착할 점심 식사시간 쯤 전에는 도착을 할 수가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우리에겐 큰 손님들인 아내의 친구들을 위한 숯불을 피우기 시작했다.

이 숯불 피우는 일이 익숙하기 전에는 시간이 다소 오래 걸리곤 했으나, 이제는 know-how가 생기고 익숙해 져서 약 3-40분 정도면 숯불을 활활 타오르게 할 수가 있어서 준비를 하고 있는 중, 아내의 친구들에게 전화가 왔다.

이제 양평의 휴게소쯤을 오고 있다고.

그렇다면 약 50분 정도면 이곳에 도착을 할 수 있으니 그 동안 숯불은 충분히 피워서 고기를 구을 수가 있을 것이었다.


아내가 점심식사를 “홍천의 화로 숯불구이촌의 음식점에서 하자”고 하니까, 우리 집에서 “조용히 친구들과 얘기하면서 맛있게 먹는 것이 낫다”며 고기며 먹을거리를 준비하여 오고 있다는 것이다. (친구의 서방이 백수이니 아내 친구들도 자기들 먹을 것은 자기들이 준비하여 오지 않으면 밥을 굶을 줄 아나보다.)


그렇다면 평소대로 음식은 준비하면 될 일이어서, 아내는 아직도 남아있는 묵은 김치며 강원도 산촌의 방식대로 담근 막장이며 텃밭에서 갓 뜯어온 상추 등을 준비하고 나는 숯불과 집에 들어오면서 사 가지고 온 홍천의 “누룽지막걸리”와 술 등을 준비하였다.


하지만, 아내의 친구들 중 전혀 알지 못하는 친구들도 온다고 하니 과연 나의 작품에 관해 어떤 반응이 있을지 궁금하기도 하고, 만약 실망스런 반응이 나온다면 내가 받을 상처와 실망이 약간은 두렵기도 하였다.


내가 싫거나, 문화적 소양이 평균이하 수준의 사람이라면 그들이 아무리 돈이 많던 학식이 많던 아내의 친구이던 간에 나의 性情상 좋은 얘기나 표정을 지을 수 있는 好人은 아니어서 공연히 아내에게 본의 아니게 허물을 씌우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실제로 1-2년 전에는 아내의 친구도 아니고, 학교 후배는 아니지만 아내 친구가 후배 로 알고지내는 여자가 우리의 동락재에 작품 구경을 온 일이 있었다.

이 여자는 (솔직히 이 여자는 “여자”라고 부르는 것도 아깝고) 세상에서 제일 험한 욕으로 불러야 마땅한 여자이지만 아내의 친구가 보낸 여자여서 그 여자의 행동에 내 생애 최고의 인내력으로 버티고 있었다.


소개를 받기는 미술을 전공한 미대출신이며 남편이 대학교수이고 강남에서 돈 좀 쓴다?는 기본 교양쯤은 있는 여자로 들었는데, 실제로 접해보니 아주 천박하고 무식한 고등학교의 교문에도 가보지 못한 그런 최하급의 길거리의 노점상만도 못한 것이 남의 작품을 보고 “물건이 비싸니, 어쩌니” 하면서, “어머 뭐가 이렇게 비싸요.....?” 등등 노는 꼴이 가관이어서 나는 아내의 친구라는 여자가 “과연 당신의 친구가 보낸 여자야?” “그 친구라는 여자가 소개한 물건이 겨우 그 정도 길거리의 여자만도 못한 교양도 체면도 아무것도 없는 그런 정도의 종자밖에 안되나?”면서 애꿎은 아내에게 화풀이만 한 적이 있었기에, 아내의 친구들이라면, 또 강남에서 왔다는 여자들만 보면 일단은 내 작품을 보여주지 않으려 하고 있던 터였다.

  

그래도 아내의 친구들은 우리 대한민국 유수의 여고를 졸업한 동창생이며 각자 전문분야에서 종사하거나 교사 및 교수로 활동을 했고 해외에서의 견문과 교양을 두루 섭렵하였으니 실망스런 일은 없으리라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한 편으로는 또 다시 그런 더러운 경우를 겪게 되면 내가 어떻게 그들에게 돌출 행동을 하여 아내의 얼굴에 오물을 묻히는 일이나 생기지 않을까가 걱정이 되기도 했다.


기실 우리나라의 대다수의 중산층 이상의 인테리나 오피니언리더니 하는 사람들의 문화적 수준은 그들의 교육수준이나 생활수준에 못 미치는 것이 우리 주변의 현실이기에 그러려니 생각하면, 내 작품이 시장의 마구 찍어낸 고무신짝 같은 물건 취급을 받는다고 마음의 상처를 받을 필요는 없는 것이긴 하지만, 내 친구나 내 아내의 친구 또 내 주변의 사람들은 그래도 자기들 생활수준에 버금가는 문화적인 소양이나 지식, 교양과 자질을 갖추기를 바라고 있는 내가 理想만을 꿈꾸는 철부지라고 하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 부류의 인간들을 경멸하는 내가 그들에게 경멸당하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어쨌던 아내의 친구들은 도착을 했고, 나는 모처럼 아내를 만나기 위해 멀리 수원에서 또 서울의 강남에서 온 친구들을 성심껏 환영하고 숯불구이를 써빙하며 아내 친구들에게 반갑고, 또 아내를 찾아준 고마움으로 진심으로 정성껏 마음의 대접을 했다.


친구란 이렇게 남자나 여자나 나이가 들면 들수록 소중해져 가는 것이 아닌가?

그 친구들과 더불어 잠시 시름을 잊고 천진난만하게 웃고 밝게 얘기하고 재미있어하는 얼굴들을 보면서 아내에게 미안함과 함께 항상 이렇게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해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역시 친구는 고등학교 친구가 그래도 제일 가깝지 않겠는가?

그것은 여자나 남자나 매 한가지 일게다.


친구는 오래된 친구가 좋고 술은 새 부대의 술이 좋다고는 하지만, 나는 친구나 술 모두 오래 묵은 친구가 좋다.


식사를 마치고 차도 마시며 나의 작품을 보면서 好評을 해주었다니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뒷동산에 산책을 하며 뜰 안의 꽃에 둘려서 담소하며 사진도 찍고.....


그렇게 길지 않은 시간을 아쉬워하며 캄캄하고 차가 많이 밀리기 전에 저녁 7시가 지난 시간에 또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아내의 친구들은 떠났다.


이렇게 친구나 가까운 사람들이 우리 동락재에서 그 즐거운 흔적과 다 하지 못한 정다운 언어들을 남기고 떠난 후의 그 적막은 처음보다 더 적막하다.


그 여운을 잠시 간직하며 거실의 커다란 다탁위에 그들의 남겨진 말들을 추억하며 주어 담다가는 “사람은 언제나 항상 헤어진다”는 현실에 화들짝 마음을 정리한다.


그러나 사람은 언제나 헤어지지만 또 기다리는 마음도 항상 희망을 기대할 수 있으니 이것 또한 산촌의 고적한 구석 한 자락에서 살아가는 적지 않은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실로 오랜만에 다시금 조병화 시인의 “밤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실은 맨손이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단 말이다


이곳에선 외롭긴

누구나 매한가지겠지만

아무것도 없는 외로움이란

- 이루 말할 수 없다


헤세의 말을 빌면

인간은 

깊은 안개 속에서

서로의 Sein

-서로를 모르는 채

그저 서로 Sein하고 있는 것이라 하지만

생존은 너무나 허허한 자리

실로 이상한 건

살고 있다- 하는 마음이다


무욕해질수록 가득 차 가는 마음

바람에 집을 둔 마음

입김처럼 순한 이 외로움


생명이여 

따나는 것이여

이곳에선 가진 자나 없는 자나 매한가지겠지만

아무것도 없는 빈 마음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