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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락재 통신-119: “거실을 서재로” 운동을 펴는 어느 일간지의 켐페인..

sosoart 2007. 10. 30. 22:52

 

 

 

<동락재 통신-119: “거실을 서재로” 운동을 펴는 어느 일간지의 켐페인을 공감하며>             07.10.30


옛날 우리가 부자나 가난한 자나 별 차이 없이 살던 사 오십여 년 전, 그때에는 웬만한 부자가 아닌 다음에는 혼자만이 쓸 수 있는 나만의 방은 고사하고 형제끼리 두셋이 쓸 수 있는 방이 있는 아이들도 꽤나 부러워 하던  시절이기도 했었다.


하물며 그런 시절에 서재라는 것이 가당키나 한 시절이었을까?


나는 옛 어린 시절부터 책 모으길 좋아했다.  아니 책은 물론이려니와 신문이나 잡지에서 나의 관심 분야에 관해서는 스크랩이던 버려진 책을 주어와  찢어내어 모아 두었기에 나의 중요한 수집 자료를 정리 보관할 책장이 절실히 필요했지만 경제적으로 뒷받침이 되지 않는 집안 살림으로 고리짝에 쑤셔 넣든지 책상 옆이나 선반위에 쌓아놓기 일쑤였다.


내가 성장하여 일가를 이루고 자식을 낳고 직장이나 사회적으로 안정되어 가면서 생활에 약간의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을 시절부터는 나는 유행이라든지, 남들이 시내에 나가서 영화나 친구들과 술 마시기, 데이트 등 대중문화를 즐긴다고 할 적에 서울에서 몇 군데 되지 않는 프레스 센터, 덕수궁의 그림 전시회장, 또는 미도파나 신세계 백화점의 화랑, 국립현대미술관 등에 혼자서 그림을 보러 다니거나 책방이나 레코드 가게에서 음반을 고르고, 휴일에는 도봉산의 한 암벽에 붙어서 암벽등반을 즐긴다던지, 또는 하루 종일 워킹코스의 종주 등반을 하던지, 그도 아니면 자연의 풀 내음이 깊숙한 호수의  한 켠 나무 그늘 아래에서 낚싯대를 던지고 있었다.


그러면서 평일엔 책과 음악 속에서 살았다고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나는 외아들이었기에 나만의 시간을 갖기가 남보다는 수월했다.


내 스스로 나 자신만의 세계와 늪에 빠져서 무언가 높은 인생의 의미를 찾는 것에 대한 후회는 지금도 전혀 없다.

그렇다고 남들과의 교류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나만큼 친구가 좋아 없는 형편에 친구들과의 커피 값이나 술 값 또는 여가선용(?)을 위한 오락의 비용을 지불한 것은 거의 나의 독점이었다고 할 수가 있다.

내가 돈이 많아서였던 것은 절대 아니었고, 돈을 낼 때가 되면 유독 구두 끈을 매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 워카 끈을 매는 친구들이 많기도 하거니와 성질 급한 놈이 매 맞는 다고 성격이 유순하지 못하고 급하다 못해 자신이 무슨 홍길동도 아니면서 정의의 사나이, 불의를 지나치지 못하는 사나이  요즘 말로 표현하면 아무 실속도 없는 못난 인사, 제 잘난 멋에 사는 바보 멍충이 이기도 했고,


또 훤칠한 키는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뭇 아가씨들에게 인기도 또한 많은 것은 사실이었다.

하긴 그 아가씨들이 모두 내가 큰 부자집의 아들이겠거니 착각을 했을 것이다.

나의 얼굴이 빈티가 나는 얼굴은 아니었기에 그랬으리라.


각설하고,

그렇게 책을 모으고 나의 관심 주제와 먹고사는 전공분야의 자료를 모으다 보니, 웬만한 자그마한 도서관 정도는 될 정도로 서재가 꽉 차있다.


지금은 서울의 집에는 나의 서재가 방 하나도 모자라 아들, 딸의 방에 분산되어 서가에 꽂혀져 있거니와 이곳 나의 산촌화실 동락재에는 보관 공간이 없어서 창고의 철제선반에 박스에 담겨 있어서 서재라기보다는 서고가 있다고 해야 맞을 것 같다.


어쨌거나, 책은 영원한 나의 벗이다.  나의 아내나 나의 자식만큼이나 없어서는 안되는 내게는 아주 중요한 버팀목이 되어, 책이 없다면 나의 존재도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하긴 백수 이전의 공직에 봉직할 때에는 도서관장을 한 이력이 있으니 일러 무삼하겠는가?


아무리 인터넷의 세상이 도래했다 해도 나는 아직도 인쇄매체에 대한 애정과 순수한 사랑을 버릴 수가 없다.

나의 미니 홈페이지인 블로그를 꾸며가면서 실제 펜과 만년필로 쓰던 글을 컴퓨터의 자판으로 두드린다는 것이 다를 뿐, 활자와 분리되어 살 수 없는 것도 지금의 산촌생활이기도 하다.


이제는 나의 인생에서 꼭 필요한 것을 들라면


우선 첫째는 물론 나의 아내이다.

그 다음엔 책이고 그 다음이 나의 목공예작업이며 그림 작업이다.

자식들이 알면 섭섭할지 몰라도 자식들은 그 다음이다.


어차피 자식들은 이제 서로 자기의 평생반려를 찾으면 그들이 우선 내 자식들에게 소중하고 첫째가 될 것이므로 서로 섭섭해 할 일은 아니다.


다시 얘기를 바꾸어 돌이켜보면 나는 우리 가족의 모든 살림(재산) 중에서 으뜸이 나의 책이다.


재산목록 1호이긴 하지만 누가 그 값을 나의 재산목록 1호로 쳐 주겠는가?


그러나, 나는 내 서재에 자주 들락거리면서 꽂았다 뺐다 하는 그 책들을 구입하기 위해 나의 수입의 많은 부분을 고스란히 바친 것이기도 하다.




지금도, 나는 백수이긴 하지만 아직도 내게 꼭 필요한 자료라면 1권에 10여만 원이 되는 책이라도 기꺼이 구입을 한다.


외국자료이든 국내 자료이든, 그것이 곧 나의 마음과 머릿 속을 흡족히 해주고 채워줄지언정 다른 즐거움보다는 모든 것에서 으뜸이라고 거리낌 없이 얘기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책값은 언제부터 왜 이렇게 비싸졌는가?


백수인 나에겐 이것이 제일 아킬레스건처럼 아픈 것이,  감출 수 없는 나의 빈약한 현실이다.


또한 왜 늙어갈 수록 더 읽어야 할 책은 많아지고 책에 대한 욕심이 커지는 것일까?


어느 조용한 산속 깊은 계곡의 물소리와 함께 생각해 볼 일이다.


오규원 시인의 시 <말> 처럼 나도 나의 말 만을 믿는다

 


나를 확신하기 위하여

나의 말을 믿는다

모든 것을 확신하기 위하여

나는 말을 믿는다.


확신의 그늘에서 우는 풀벌레

확신의 울안에서 서성이는 소

확신과 확신 사이로 내리는 어둠

꿈꾸지 않고 나는

꿈꾸는 대신 꿈을 씹는다.


  나의 말이 지금 이 순간까지 한 번도 확실하게 나의 형체를 드러

내지 못했고 미래까지 이순간이 반복된다 하더라도 나의 믿음은 내

가 믿음으로 믿음, 허위의 믿음이라도 믿음으로 믿음이다.


  꽃을, 꿈을 한국을, 인간을 하나의 명사로 믿을 때, 꽃도 꿈도 한

국도, 물론 인간인 그대도 행복하다. 행복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믿으

라. 이 말은 예수의 말이 아니므로 믿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