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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락재통신-129 : 진정한 Optimist를 꿈꾸며..... <2009. 2. 2>

sosoart 2009. 6. 5. 22:43

 

 

 

동락재통신-129: 진정한 Optimist를 꿈꾸며..... <2009. 2. 2>

 

오늘로서 이곳 횡성 청태산 숲체원에 들어 온지가 벌써 한 달이 다 되었다.

 

시간이 허락되는 대로 이곳 숲체원에 들어오게 된 사유를 기록으로 남겨둘 요량이긴 하지만 아직은 본격적으로 나의 이 “동락재통신”을 지난날처럼 매일 엮어갈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없다.

 

되도록 빠른 시일 내에 나의 “통신”을 전처럼 엮어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해본다.

 

오늘 밤엔 숲체원에서 “직무스트레스관리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진행하는 강연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가톨릭대 성모병원 정신과 교수이며 EAP협회 회장인 채정호 교수의 "행복한 선물- Optimist"란 제목의 90분간 강연이었다.

 

첫 번째 내용은,

진짜 웃음(Duchenne laughter)에 관한 것으로 (진정한 웃음)과 Pan American smile(가식적 웃음: 비행기 여승무원의 웃음)에 대한 내용이었는데 진정한 웃음은 눈가의 주름이 쪼글쪼글하도록 파안대소하는 웃음이라 할 수 있고, 속칭 범미항공사(Pan American) 여승무원의 웃음처럼 웃을 때 눈가의 주름살이 잡히지 않고 입술만 웃는 모습은 가식적인 웃음이라는 것이다.

 

더불어 이런 웃음을 웃는 사람들을 대학입학시의 cheerfulness(명랑함: 명랑한 웃음) 정도와 그들의 19년 이후 대비 연봉(수입)은 2만 불의 차이가 난다는 어느 연구보고서의 내용도 소개되었다.

 

또한 더럽고 지저분한 방에서 느끼고 행동하는 사람을 세 종류의 인간군으로 분류하여,

1. 비관주의자= 부정적인 사람

2. 낙관주의자= 긍정적인 사람

3. Optimist= 행동(실천)하는 낙관주의자, 행동(실천)하는 긍정적인 사람으로 나누어 사례를 분석하였다.

 

우선 비관주의자는 매사를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모든 좋지 않은 일은 남의 탓으로 돌리며, 방이 지저분한 것을 모두 남의 탓으로만 돌리고 남을 욕하기만 한다는 것이다.

 

또, 소위 낙관주의자라고 불리는 사람은 긍정적인 사람으로 평가받기 위해 타인을 의식하여 매사를 낙관적으로 보이도록 노력한다는 것이다.

남의 잘못으로 인하여 일이 잘못되어도 너그러운 척, 배려하는 척, “그럴 수도 있지”하며 억지 미소를 띠며 낙관적 표현을 한다는 말이다.

즉, 겉으로 욕도 하지 않지만 지저분한 방을 개선하기 위한 구체적 행동(청소를 하는 일 등)을 하지 않으며 lip service 만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낙관(천)주의자는 어떻게 하는가?

그는 지저분한 방을 깨끗하게 하기 위하여 남의 탓을 한다거나 너그러운 척, 사람 좋은 척, 말로만 나불거리지 않고 쓰레기를 치우기 위해 행동으로 실천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 속에서 “나”는 어느 부류의 인간을 지향하고 있나?“를 돌이켜보게 하는 대목이다.

 

강연자는 TV나 매스컴을 통해서 “이 시대의 진정한 Optimist"로 소개된 세 사람(가족)의 경우를 동영상 화면으로 소개하였다.

 

첫 번째 소개된 optimist는 선천성 기형인 해표지증 (phocomelia: 손과 발이 없는 기형장애)으로 1965년에 태어난 영국의 여성이었다.

장애의 몸으로 결혼도 했으나 후에 남편에게 이혼 당하고서도 온갖 고난과 장애를 극복하고 구족(口足)화가로 우뚝 선 불굴의 의지를 보여 생존하고 있는 인물로서 런던 도심의 한 복판에 동상으로 우뚝 서 있는, 영국의 자존심을 기린 위대한 인간의 극복을 보았고

 

두 번째는 화면의 처음부터 끝까지 나의 눈을 적셨던 미국의 중증뇌성마비 아들 “리 코인드”와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어떠한 쇠붙이 보다도 단단하고 강하며 한없는 父性愛, 신도 그처럼 할 수 없다는 확신을 가질 만큼 장애의 자식을 위해 헌신하는 부성을 시종 감동의 눈물로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들이 어렸을 때부터 40이 넘은 지금까지도 자신을 버리고 오로지 장애인인 아들을 위해 그 누가 그처럼 보살피고 사랑할 수 있을까?

그런 자식을 보트에 태워 수영을 하고, 자전거를 태워 180 Km를 달리며 또 그를 데리고 마라톤을 뛰며 철인경기에 도전하여 어떻게 철인이 될 수 있었을까?

 

그 아버지도 위대하지만 그 아들 또한 아버지에 대한 신뢰가 없었다면 가능한 일이었을까? 를 정말 깊게 생각하게 한 영상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나의 자식을 위해 무엇을 했단 말인가?

대학교육을 마치게 해주었다고 공치사나 하며 아직 아들이 자리를 잡지 못하였다고 원망하고 핀잔을 주며 나의 복 없음을 탓하지 않았던가?

 

나는 그 “코인트”란 사람의 발톱의 때만큼이나 되는 사람인가?

내가 무심코 던진 한 마디가 나의 아들에게 얼마나 많은 상처를 주고 얼마나 많은 세월동안 가슴에 피멍이 들게 하지나 않았을까?를 생각하니 그 화면을 보는 내내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그 코인트라는 인물에 대한 경외심과 더불어 나 자신이 아비로서 “졸렬하고 편협한 사랑이란 이름”으로 나는 내 아들에게 얼마나 많은 아픔을 주었는가를 돌이켜보면 전부터도 항상 가슴이 미어졌지만 그에 대한 회한이 노도처럼 밀려와 많은 눈물을 흘렸다.

 

누군들 제 자식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없겠는가?

단지 그 알량한 눈꼽만큼의 사랑을 베풀고 그 댓가를 바라는 이 조그만 가슴의 아비가 부끄럽고 슬플 뿐이지.....

 

요즈음엔 나의 아들이 뜻을 펴지 못한다 해도 내가 죽는 날까지 더 이상의 상처는 주지 않고 보듬어 주려는 마음으로 살아가고는 있지만 그러한 마음만이 정말 아들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행동인지는 이순을 지난 나이에도 확신은 할 수 없는 나 역시 “비관론자”의 낙인에서 죽는 날까지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초등학생인 “종건”이가 시각장애자인 “박진숙”어머니와 살아가는 모자의 이야기 또한 이 사회의 진정한 승리자의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이 된다.

 

장애와 가난의 어려움 속에서도 어머니는 폐지 등 폐품을 모아 한 달에 10만원 벌이로 아들을 교육시키고, 그 아들 역시 밝은 얼굴로 꿋꿋하게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마음속으로 격려를 보냈으며, 가톨릭 성모병원에서 어머니의 개안 수술도 해주고 또 여러 곳에서 많은 성금이 답지했지만 이를 받지 않고 홀연히 두 모자가 자취를 감추었다가 몇 년 후에 돌아와 성금에 의지하여 편하게 살아가려는 자신들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다시금 그전처럼 돌아가 자신들의 힘으로 살아가기 위해 집을 떠났었다는 이야기와 함께 자기의 눈을 뜨게 해준 (비록 한쪽 눈이기는 하지만) 병원에 감사하는 마음에 신축기금으로 비록 벽돌 몇 장 값밖에 되지 않는 돈이라도 받아달라며 십만 원에도 미치지 못하는 작은 돈이나마 성금을 내고 병원측의 간청에 의해 억지로 사진을 찍은 두 모자의 얼굴은 그 누구의 미소보다도 아름답고 따뜻한 그야말로 천사의 모습이었다.

 

세상의 행복은 돈만도 아니고 건강만도 아니다.

물론 모두를 다 갖춘 행복은 완벽한 행복일 수 있겠지만 “완벽”이란 신의 세계에도 없는 허구가 아니겠나?

 

내가 이 숲체원에 와서 제공된 숙소에서 숙식을 하며 비록 주말에만 가족들과 얼굴을 마주보게 되지만 나에게 숲해설가의 일도 하며 청정 자연의 숲에서 건강을 되찾을 수 있도록 하여준 관계자에게 진심으로 깊이 감사하는 마음이다.

 

또한 사랑하는 나의 아내, 아들, 딸에게 무심코 마음 상하거나 가슴 아픈 말이나 행동을 하기 전에 무엇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전하고 행동으로 실천할 수 있을까?를 새삼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은 모두 숲이 나에게 베푸는 은혜가 아닌가 싶다.

 

지닌 날, 이 세상과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속았다는 생각은 이제 모두 버리고 매사를 긍정적인 사고로 행동하는 진정한 Optimist가 되도록 나의 여생을 꾸며 가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