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는 소리가 월츠처럼 산속을 흐르는 작은 계곡의 물을 타고 오더니 요 며칠간은 또 시샘을 하는 추위가 심술을 부립니다.
가뜩이나 살기가 팍팍하고 정치한다는 사람들은 오로지 국민들은 안중에도 없고 보수는 보수대로, 종북골수좌파는 국가의 간성인 해군을 해적이라 하고 도무지 어느짝에도 쓸모없는 정치한다는 남녀노소 모주리 망태기에 쓸어담아 저 북극의 얼음바다에 던져버려야 직성이 조금 풀리려나......? 참으로 참담한 이 나라의 흘러가는 꼴이 너무 걱정스럽습니다.
그런데 오늘 인터넷을 들어가 보니 조선일보에 이런 기사가 있어서 "아! 그래도 이러한 스승이 있으니 세상은 살 맛을 다 뺏아가지는 않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학생시절엔 그래도 좋은 스승들이 계셨었지요. 50여년전 중학생때의 스승님은 꿰멘 자죽이 선명한 재건복을 입으시고 학교의 쓰레기를 주으며 학생들에게 이 강아지같은 녀석들 하며 인자한 웃음으로 보듬어 주셨던 선생님도 계셨고, 그 당시 소위 일류 5대공립이었던 같은 반 학우가 공부를 게을리 하여서 영어성적이 형편없었는데, 영어 선생님께서 수업시간에 그 친구에게 아주 쉬운 질문을 하시고 그 친구가 옳은 답을 말하자 "야, 박치우! 정말 잘 하는구나. 영어는 그렇게 하는 거야! 하면서 아주 칭찬을 해주셨지요. 그렇게 영어시간 마다 몇 가지 쉬운 질문을 던지기를 계속하며 수업시간마다 그 친구의 용기를 북돋아 주고 칭찬을 해주니 2학기에 가서는 그 친구의 영어점수가 90점을 돌파했습니다.
이 얼마나 제자를 사랑하는 스승님의 모습일까요? 그 선생님은 지금도 70을 바라보는 저의 머릿속에 영원히 미소를 머금은 훌륭한 선생님의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에도 불량 스승도 있었습니다.
가세가 기울어 모친께서 시장의 상인으로 가계를 꾸려나가게 될 즈음, 명색이 일류고등학교의 담임선생님이 가정방문 날짜를 부모님께 알리지 않았다고 교실의 교단 앞으로 끌어내어 60여명 급우들이 보는 앞에서 귀싸대기를 연거푸 몇 대를 때려서 맞은 적이 있습니다.
그 시절엔 학기 초에 담임교사들의 가정방문이 있었는데, 모친께서 시장의 가게문을 닫고 올 수가 없는 형편이어서 "집에 어머님이 안계셔서 가정방문을 오실 수 없다"고 담임선생님께 말씀을 드렸더니 "야 이 자식아 내가 뭐 얻어 먹을려고 너희 집 가는 줄 알아?"하면서 이를 악물며 주먹으로 다짜고짜 저의 뺨을 때리는 것이었죠.
물론 저는 문제학생도 아니고 가운이 기울어 학교가 파하는 대로 시장으로 가서 어머님을 거들어야 하기에, 선생님이 집에 오셔도 부모님을 만날 수 없다는 말을 했던 것이었습니다.
사춘기 어린 마음에 부모님이 시장에서 장사를 한다는 말은 자존심이 있어서 하지 못하고 어머님이 집에 안계신다는 말을 한 것인데.....
담임을 맡은 선생님이라면 그런 사춘기의 학생마음도 헤아리고 그 이유가 무언지 조용히 교무실로 불러서 묻는다면 학생에게 마음의 상처도 주지 않고 파악할 수 있어야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담임선생으로부터 따귀를 얻어맞고 귀의 고막이 나가지 않은게 다행이었지만 그 선생님에 대한 적개심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고 지금의 이 나이에도 그러한 교사들은 정말로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지금 이 늙은 나이에도 그 선생을 증오하고 용서하지 않고 있습니다.
학급의 담임이라면 특히 사춘기의 학생들의 마음을 다치지 않게 하며, 학생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학생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주지 않는 것이 선생들의 기본 덕목이 아니겠습니까?
그 담임선생의 이름은 아직도 잊지 않고 머릿 속에 각인되어 있습니다. 경O고등학교 독일어선생 O아무개 선생. 지금 살아있다면 80대 후반이나 90이 좀 넘었겠네요. 아직도 용서가 안되는 내 생애의 유일한 한 사람.
공직을 은퇴하고 저는 숲 속에서 "숲해설가"나 "생태체험 목공예가"로서도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때의 아픈 기억을 잊지않고 "나는 숲 속에 온 아이들이나 내가 맞이하는 가족들 그리고 모든 숲해설을 들으려는 이들에게 정말 "사랑하는 마음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숲해설과 체험의 강사로 임하고 있습니다.
또한 장애를 가진 사람들과 마음의 아픈 상처와 몸을 숲을 통해 치유하려는 사람들에게 자연사랑과 사람사랑하는 마음을 넉넉하게 가지도록 도와주기도 합니다.
이야기가 조금 빗나갔군요.
오늘은 대학교수의 제자 사랑에 대한 기사를 널리 알리고 싶어서 퍼왔습니다.
요즘같이 참 살맛 안나는 세상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우리들에겐 이러한 소식들이 주변에 쫙 깔렸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도 다만 몇 푼어치 안되는 금전이나 마음의 보시라도 실천해 나가는 것도 참 좋은 일이지요.
가끔은 추운 길 바닥에서 푸성귀 한 보따리 놓고 파는 할머니들을 보면 남자이긴 하지만 몇 천원어치 일부러 비닐봉지에 담아오고 있습니다.
아픈 이웃을 같이 아퍼하는 마음이 살기좋은 우리나라를 만드는 원동력이 아닐까 합니다.
오늘은 건대 정일민 교수의 제자사랑하는 마음을 깊이 칭찬하고 널리 알리고 싶었습니다.
다음은 기사의 내용입니다.
"자식 등록금 도와달라"
100만원 들고 온 아버지 간청에 교수 "학생엔 비밀" 대신 내줘
A학생의 아버지는 "사업을 하고 있는데, 요즘 어렵다"고 어렵게 입을 뗐다. 이어 생면부지의 교수에게 "지금 100만원밖에 없는데, 이번 한 번만 등록금을 낼 수 있게 도와달라"고 간청했다. 교수 생활 17년째인 정 교수도 처음 겪는 일이었다. 하지만 학부모의 진심 어린 말과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정 교수는 조교를 통해 해당 학생의 등록 여부를 확인한 다음, 조교에게 자신의 카드를 주고서 한 학기 등록금인 500만원을 결제하라고 했다. 그는 "학생에게는 절대로 말하지 마시라"고 학부모에게 부탁하고서는 100만원도 돌려줬다. 학부모는 떠나면서 돈을 꼭 갚겠다고 했다.
정 교수는 학부모가 돌아간 뒤 한참 동안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얼마나 절박했으면 등록 마감 직전에 100만원을 들고 얼굴 본 적도 없는 교수를 찾아왔겠습니까. 자식들 공부시키려고 등골이 휘도록 일했던 제 부모 세대가 생각났어요. 학생들이 저런 부모 심정을 알면 좋을 텐데…."
A학생은 정 교수와 아버지와의 특별한 거래(?)를 모른 채 등록을 하고 학교에 다니고 있다.
정 교수는 지금까지 건국대 교수 중 가장 많은 SCI(과학기술논문인용색인)급 논문 263편을 발표해 '논문왕'으로 불린다. 지난해 12월 건국대 총동문회로부터 '2011 건국학술대상'을 수상하면서 받은 상금 1000만원 전액도 장학금으로 기부했다. 정 교수는 2007년에도 같은 상으로 받은 상금 500만원을 기부하는 등 2004년부터 지난해까지 8차례에 걸쳐 총 1800만원을 학교에 기부했다.
"정말 형편이 어려운 학생도 있지만, 상당수 학생은 부모한테서 등록금을 받는 데 익숙해져 있어요. 최근 등록금 문제로 학생들이 민감해 있지만, 비싼 유명 브랜드 테이크 아웃 커피를 들고 다니는 모습을 보면 어색해요. 부모들이 얼마나 고생해 등록금을 대는지 좀 더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지요." 건국대 출신인 정 교수가 제자이자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얘기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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